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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주의 — 2000년 전 철학이 현대에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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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노예와 황제가 같은 책을 읽었다면

상상해 봅시다. 한 사람은 다리를 절고 평생을 노예로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세계의 절반을 다스리던 로마 황제였습니다. 둘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한 사람이 죽고 나서야 다른 한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남긴 글을 나란히 놓으면, 마치 같은 스승에게 배운 형제처럼 비슷한 말을 합니다.

"네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두고 괴로워하지 말라. 네가 바꿀 수 있는 것에만 마음을 쏟으라."

이 두 사람이 바로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공유한 사상의 이름이 바로 스토아주의(Stoicism)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 철학 소개"가 아닙니다. 약 2300년 전 아테네의 한 주랑(柱廊, 그리스어로 스토아)에서 시작된 이 사상이, 어째서 21세기의 스마트폰 시대에 다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운동선수와 기업가와 심리치료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흥미로운 질문 하나로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흔히 "스토아적(stoic)"이라는 단어를 "감정이 없는", "냉정한", "꾹 참는" 같은 뜻으로 씁니다. 영어 사전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정작 스토아 철학자들이 남긴 글을 읽어 보면, 그들은 감정을 없애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잘 살고, 잘 사랑하고, 잘 견딜 수 있는지를 끈질기게 고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오해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끝까지 읽으시면 그 답이 보일 것입니다.

스토아주의란 무엇인가: 한 문장으로 시작하기

스토아주의를 가장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행복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판단과 태도에 달려 있다."

이것이 전부냐고요?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이 한 문장 안에 스토아주의의 씨앗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생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흔히 윤리학, 자연학, 논리학이라 부르는 세 영역입니다. 자연학은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논리학은 어떻게 올바르게 사고하는지를 다룹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결국 향하는 곳은 윤리학, 즉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좋은 삶을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 그리고 "이성과 덕에 따라 사는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덕(arete)이란 단순히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기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한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들에게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핵심 덕목이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부, 건강, 명예, 좋은 평판 같은 것을 "나쁘다"고 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선호되는 무관한 것"이라는 다소 까다로운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즉, 있으면 좋지만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결정짓지는 못하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미묘한 구분이 뒤에서 다룰 여러 오해의 출발점이 됩니다.

어디서 시작되었나: 채색된 주랑에서 태어난 철학

스토아주의가 현대의 실천 지침으로만 소비될 때 자주 잊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상이 어엿한 역사를 가진, 수백 년에 걸쳐 발전한 철학 학파라는 점입니다. 그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스토아주의의 창시자는 키티온의 제논입니다. 키프로스 섬의 도시 키티온 출신이었던 그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본래 상인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항해 중에 배가 난파되어 가진 것을 거의 잃은 그는, 아테네에 흘러들어 한 서점에서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깊이 감명받은 그는 철학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훗날 그는 농담처럼 "난파 덕분에 좋은 항해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잃음이 새로운 길의 문이 되었다는 이 일화는, 그 자체로 스토아적인 색채를 띱니다.

제논은 기원전 300년 무렵 아테네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제자들과 모인 장소가 아고라 한편의 스토아 포이킬레, 곧 "채색된 주랑"이었습니다. 여러 색으로 그린 벽화가 걸려 있던 이 공공의 회랑에서 강의가 이루어졌기에, 사람들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주랑의 사람들", 곧 스토아학파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한 철학의 이름이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들이 모이던 장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꽤 인상적입니다.

제논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소스의 클레안테스였습니다. 한때 권투 선수였다고도 전해지는 그는, 가난하여 밤에는 물을 길어 생계를 잇고 낮에는 철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성실하고 우직한 인물이었던 그는 우주에 바치는 찬가 같은 시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학파를 가장 정교하게 체계화한 인물은 세 번째 수장 크리시포스였습니다. 그는 논리학과 자연학을 치밀하게 다듬어, 스토아주의를 하나의 정합적인 사상 체계로 완성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크리시포스가 없었다면 스토아도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제논,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 이 세 사람을 흔히 초기 스토아의 세 기둥이라 부릅니다.

이 그리스 철학은 시간이 흐르며 로마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로마라는 토양에서, 사변적인 논리학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실천적 물음에 더 무게가 실리는 방향으로 무르익었습니다. 우리가 앞서 만난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바로 이 후기 로마 스토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 읽는 스토아주의는, 그리스에서 씨가 뿌려지고 로마에서 열매를 맺은 긴 여정의 산물인 셈입니다.

네 개의 기둥: 스토아의 핵심 덕목

스토아주의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는 네 가지 핵심 덕목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널리 이야기되던 이 네 덕목을, 스토아 철학자들은 좋은 삶의 뼈대로 삼았습니다. 지혜, 용기, 정의, 절제가 그것입니다.

첫째는 지혜입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좋고 나쁜지, 무엇이 내게 달려 있고 달려 있지 않은지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순간순간 올바르게 판단하는 실천적 분별력에 가까웠습니다.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에 발끈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이건 정말 화낼 일인가"를 헤아리는 그 짧은 틈이, 일상 속 지혜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용기입니다. 두려움 앞에서 옳은 일을 행하는 힘입니다. 전쟁터의 용맹만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인기 없는 옳음을 지키고, 역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일상의 꿋꿋함이 모두 여기에 들어갑니다. 회의에서 다수의 침묵을 거슬러 잘못된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작은 용기입니다.

셋째는 정의입니다. 타인을 공정하게 대하고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스토아주의가 결코 고립된 자기 수양이 아니라는 사실은 바로 이 덕목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납니다. 마르쿠스는 인간이 본래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고 거듭 적었습니다. 줄을 설 때 새치기하지 않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같은 사소한 일에도 정의는 깃듭니다.

넷째는 절제입니다. 그리스어로 소프로쉬네라 불리는 이 덕목은, 욕망과 충동을 알맞게 다스리는 균형 감각입니다. 금욕적인 억압이 아니라,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만큼 누리는 절도에 가깝습니다. 한 잔의 술을 즐기되 취해 무너지지 않고, 칭찬을 기쁘게 받되 그것에 목매지 않는 태도가 절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 네 덕목을 따로 떨어진 항목이 아니라 서로 얽힌 하나의 전체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용기는 지혜 없이 성립하지 않고, 정의는 절제 없이 지켜지기 어렵습니다. 덕은 낱개의 기술이라기보다, 잘 사는 한 사람의 통합된 성품에 가깝습니다.

핵심 개념 하나: 통제의 이분법

스토아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개념이 바로 통제의 이분법(dichotomy of control)입니다. 에픽테토스의 짧은 핸드북인 엔케이리디온(Enchiridion)은 바로 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이 단순한 구분이 스토아 실천의 출발점입니다. 에픽테토스에 따르면, 우리의 판단, 의견, 욕구,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피할지를 정하는 의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몸, 재산, 평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대부분의 외부 사건은 온전히 우리 손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구분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우리의 괴로움 대부분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들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을 떠올려 봅시다. 비행기의 출발 시각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짜증으로 한 시간을 태울지, 아니면 책을 펴고 그 시간을 활용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둘 점이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해설가들은 이 이분법을 다소 거칠게 받아들이면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세상에는 "완전히 내 통제 안"도 아니고 "완전히 내 통제 밖"도 아닌, 그 중간에 놓인 일들이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시험 성적은 내 노력에 어느 정도 달려 있지만, 출제 경향이나 컨디션처럼 통제 밖의 요소도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현대 철학자들은 이를 "통제의 삼분법", 즉 완전히 통제 가능한 것, 부분적으로 영향만 줄 수 있는 것,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나누어 이해하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는 읽는 분이 스스로 판단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통제의 이분법, 한눈에 보기

  [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 ]        [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 ]
   - 나의 판단과 해석                - 날씨, 교통, 경제
   - 나의 가치와 목표                - 타인의 행동과 평가
   - 나의 노력과 태도                - 과거에 일어난 일
   - 지금 이 순간의 선택             - 최종 결과 그 자체

   여기에 에너지를 쏟으면 ->         여기에 집착하면 ->
   힘이 생긴다                       괴로움이 생긴다

핵심 개념 둘: 부정적 시각화

두 번째로 소개할 개념은 부정적 시각화입니다. 라틴어로는 프라이메디타티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우리말로 옮기면 "나쁜 일에 대한 미리 헤아림" 정도가 됩니다.

이름만 들으면 우울한 훈련처럼 느껴집니다. 일부러 안 좋은 일을 떠올리라니, 비관주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자들의 의도는 정반대였습니다. 이 훈련의 핵심은 "잃을 수도 있었던 것에 새삼 감사하기"에 가깝습니다.

세네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리 역경을 마음속으로 그려 본 사람은 그 일이 실제로 닥쳤을 때 훨씬 덜 흔들린다고 말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불행은 우리를 무너뜨리지만, 마음으로 한 번 겪어 본 불행은 우리를 단련시킵니다.

조금 더 따뜻한 버전도 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가족을 안아 줄 때, "오늘 이 사람을 보는 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잠시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섬뜩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짧은 상상은 늘 곁에 있어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을 다시 소중하게 만들어 줍니다. 심리학에는 우리가 좋은 일에도 금세 익숙해져 버린다는 개념이 있는데, 부정적 시각화는 바로 그 익숙함의 김을 빼는 장치인 셈입니다.

생각 실험을 하나 해 봅시다. 지금 당신이 매일 쓰는 물건 하나, 이를테면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를 떠올려 보세요. 만약 내일부터 한 달 동안 찬물만 나온다면 어떨까요? 한 달 뒤 다시 더운물이 나오는 순간, 당신은 그 평범한 수도꼭지에 작은 경이를 느낄 것입니다. 부정적 시각화는 한 달을 기다리지 않고도 그 경이를 지금 불러오려는 시도입니다.

세 사람의 초상: 노예, 정치가, 황제

스토아주의를 사람의 얼굴로 기억하고 싶다면, 로마 시대의 세 인물을 떠올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셋은 사회적 신분이 극과 극이었습니다. 노예, 부유한 정치가, 그리고 황제. 그런데도 같은 철학을 공유했다는 점이 스토아주의의 보편성을 잘 보여 줍니다.

에픽테토스: 사슬에 묶였어도 자유로웠던 사람

에픽테토스는 노예로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그리스어로 "획득된 자", 즉 소유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다리가 불편했는데, 노예 시절의 학대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훗날 자유를 얻은 그는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정작 그는 책을 직접 쓰지 않았고, 우리가 읽는 그의 가르침은 제자 아리아노스가 받아 적은 강의록과 핸드북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명료합니다. 외부의 어떤 힘도 너의 의지 자체를 빼앗을 수는 없다는 것. 몸은 사슬에 묶을 수 있어도 판단은 누구도 묶지 못한다는 것. 노예에서 출발한 사람이 자유의 본질을 가장 깊이 말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그는 화려한 수사보다 직설적인 비유를 즐겼습니다. 인생을 연회에 빗대어, 음식이 네 앞으로 돌아오면 손을 뻗어 알맞게 덜되, 아직 오지 않았다면 욕심내어 손을 뻗지 말고, 이미 지나갔다면 붙들려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매달리지 않는 태도를, 그는 이렇게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쉽게 와닿는 것은, 바로 이 손에 잡히는 구체성 덕분입니다.

세네카: 권력과 부 한가운데의 철학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앞의 두 사람과 사뭇 다릅니다. 그는 부유한 가문 출신의 정치가이자 극작가였고, 한때 젊은 황제 네로의 스승이자 조언자였습니다. 막대한 부를 누렸고, 권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세네카는 예나 지금이나 논쟁의 대상입니다. "검소를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부자가 아니었나"라는 비판이 그의 생전부터 따라다녔습니다. 이에 대해 세네카 자신은, 부를 가지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부에 사로잡히는 것이 문제라고 답했습니다. 현자는 부를 가지되 부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답변을 변명으로 볼지, 진지한 입장으로 볼지는 읽는 분의 몫입니다. 다만 그가 남긴 편지들, 특히 인생의 짧음에 관한 글과 친구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서한들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세네카의 글이 지닌 매력은, 그가 추상적인 교리를 늘어놓는 대신 일상의 불안과 욕망을 솔직하게 들여다본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분노에 관한 긴 글에서, 분노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고 망가뜨리는지를 임상의처럼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마음의 평정,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시간의 낭비 같은 주제를 마치 곁에서 말을 건네듯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2000년의 거리를 뛰어넘어 오늘의 독자에게도 친구의 편지처럼 읽힙니다.

말년에 그는 네로의 명령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습니다. 그가 평생 글로 준비해 온 죽음 앞의 평정을, 마지막 순간에 실제로 시험받은 셈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일기를 남긴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흔히 "오현제"의 마지막 인물로 꼽힙니다. 그가 남긴 명상록(흔히 Meditations라 불립니다)은 사실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 아니었습니다. 전쟁터의 막사에서, 혹은 통치의 무게에 짓눌리던 밤에 자기 자신에게 건넨 메모이자 일기였습니다.

그래서 명상록을 읽는 경험은 묘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을 다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엿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너는 참견하기 좋아하고, 은혜를 모르고, 오만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로 시작해, 그럼에도 그들에게 화내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대목은 황제의 글이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아침 다짐처럼 느껴집니다.

그가 다스리던 시절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변경의 전쟁과 역병이 제국을 거듭 흔들었고, 그는 생애의 많은 시간을 전선의 막사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명상록의 적지 않은 부분이 그런 고단한 밤에 쓰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 담담한 문장들의 무게가 새삼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지는 대신, 매일 아침 다시 의무로 돌아갈 힘을 글 속에서 길어 올렸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도 흔들리는 한 인간이, 무너지지 않으려 자기 자신과 나눈 대화. 명상록의 진짜 매력은 거기에 있습니다.

스토아의 실천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스토아주의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삶의 기술이었다는 점은, 그들이 남긴 구체적인 정신 수련법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들에게 철학은 강의실의 지식이 아니라 매일 갈고닦는 운동에 가까웠습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수련을 살펴봅니다.

첫째, 위에서 내려다보기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즐겨 했던 상상으로, 자신의 시점을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훈련입니다. 그 높이에서 보면 거대해 보이던 내 고민도, 거창한 다툼도, 도시와 군대의 행렬도 작은 점들의 움직임으로 줄어듭니다. 이 시야의 전환은 우리를 짓누르던 문제에 새로운 척도를 부여합니다.

둘째, 저녁의 자기 점검입니다. 세네카는 잠들기 전 하루를 차분히 되짚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나는 어떤 잘못을 고쳤는가, 어떤 결함에 맞섰는가, 어느 점에서 더 나아졌는가." 그는 이것을 재판이 아니라 다정한 자기 대화로 여겼습니다.

셋째, 자발적 불편입니다. 일부러 검소한 음식을 먹거나, 거친 옷을 입거나, 안락함을 잠시 내려놓아 보는 훈련입니다. 그 목적은 자기 학대가 아니라 두 가지에 있습니다. 하나는 "최악의 상황도 견딜 만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소의 안락이 얼마나 큰 복인지 새삼 느끼는 것입니다.

넷째, 코스모폴리스의 감각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 곧 세계 시민의 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를 그들은 우주적 공감, 곧 심파테이아라는 말로도 표현했습니다. 내 앞의 낯선 사람도 결국 같은 이성을 나눠 가진 동료 시민이라는 감각은, 편협한 자기중심에서 우리를 끌어냅니다.

다섯째, 아모르 파티, 곧 운명을 사랑하기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과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을 마지못해 견디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태도입니다. 마르쿠스는 우주가 짜 놓은 직물 속에서 자기 자리를 받아들이라고 스스로에게 일렀습니다.

여섯째, 메멘토 모리, 곧 죽음을 기억하기입니다. 죽음을 음울하게 두려워하는 대신,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또렷이 의식함으로써 오늘을 더 진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관한 글에서,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많은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습니다.

원전의 목소리: 그들은 실제로 무엇이라 적었나

해설을 넘어, 스토아 철학자들이 남긴 말의 결을 직접 느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래는 원전의 취지를 우리말로 풀어 옮긴 것으로, 한 글자 한 글자의 직역이라기보다 뜻을 살린 의역에 가깝습니다.

에픽테토스는 핸드북의 첫머리에서, 세상일을 두 무더기로 나누라고 권합니다. 한쪽에는 우리의 판단과 의지처럼 우리에게 달린 것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몸과 재산과 평판처럼 우리에게 달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달려 있지 않은 것을 제 것인 양 붙들면 반드시 막히고 슬퍼하고 흔들리게 되지만, 달려 있는 것에만 마음을 두면 누구도 너를 가로막지 못한다고.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관한 글에서 시간의 낭비를 날카롭게 꾸짖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재산은 한 푼도 함부로 내주지 않으면서, 정작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만은 아낌없이 흘려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짧은 인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인생을 짧게 만들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모든 것의 덧없음을 거듭 곱씹습니다. 한때 위세를 떨치던 황제들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름들도 결국 흙으로 돌아가 잊힌다고. 그러나 그의 결론은 허무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가기에, 지금 이 순간 옳게 행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 손에 남은 유일한 진짜라는 것입니다.

잠깐 멈추고: 미니 퀴즈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핵심 개념이 어느 정도 잡혔을 것입니다. 가벼운 퀴즈로 점검해 봅시다. 답은 바로 아래에 있으니 먼저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1. 통제의 이분법에 따르면, 다음 중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 내일의 날씨 (나) 발표를 듣는 사람들의 평가 (다) 발표를 준비하는 나의 태도와 노력
  2. 부정적 시각화의 진짜 목적에 가장 가까운 것은? (가) 비관적으로 살기 (나) 가진 것에 감사하고 역경에 대비하기 (다)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기
  3. "스토아적"이라는 단어가 흔히 오해되는 뜻은? (가) 감정을 잘 느끼는 (나) 감정 없이 무덤덤한 (다) 매우 사교적인
  4. 스토아주의를 창시한 인물과, "스토아"라는 이름의 유래로 맞는 것은? (가) 소크라테스, 시장 이름 (나) 키티온의 제논, 채색된 주랑 (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궁 이름
  5. 스토아의 네 가지 핵심 덕목으로 알맞은 것은? (가) 지혜, 용기, 정의, 절제 (나) 부, 건강, 명예, 평판 (다) 침묵, 인내, 복종, 체념

정답을 확인해 봅시다. 1번은 (다)입니다. 날씨와 타인의 평가는 우리 손 밖에 있지만, 나의 태도와 노력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2번은 (나)입니다. 부정적 시각화는 비관이 아니라 감사와 대비를 위한 훈련입니다. 3번은 (나)입니다. 바로 이 오해를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바로잡아 보겠습니다. 4번은 (나)입니다. 키티온의 제논이 기원전 300년 무렵 아테네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스토아"라는 이름은 그들이 모이던 채색된 주랑에서 유래했습니다. 5번은 (가)입니다. 부와 건강은 덕목이 아니라 "선호되는 무관한 것"에 해당합니다.

가장 큰 오해: 스토아주의는 감정을 없애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글머리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왜 "스토아적"이라는 말이 "냉정하고 무감정한"이라는 뜻으로 굳어졌을까요?

여기에는 번역과 시간의 장난이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파테이아(apatheia)라는 상태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영어로 옮기면 apathy, 우리말로는 무관심이나 냉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원래의 아파테이아는 "감정이 아예 없는 상태"가 아니라, "파괴적인 격정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경계한 것은 파토스, 즉 우리를 집어삼키고 판단을 흐리는 격렬한 충동이었습니다. 통제 불능의 분노, 질투에 눈먼 마음, 두려움에 떠는 공황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들은 이런 격정을 잘못된 판단에서 생겨난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그들은 좋은 감정의 존재도 인정했습니다. 기쁨, 신중한 조심, 합리적인 바람 같은 것들은 오히려 현자에게 어울리는 감정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스토아주의의 목표는 감정의 제거가 아니라 감정의 정련입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브레이크를 떼어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잘 듣는 브레이크를 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슬픔을 느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나를 절벽 아래로 끌고 가지 않도록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세네카 자신이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는 편지를 남겼다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보여 줍니다. 진짜 스토아 철학자는 돌처럼 굳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 느끼되 그 느낌에 휩쓸려 무너지지 않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현대와의 만남: 인지행동치료라는 다리

스토아주의가 21세기에 다시 주목받게 된 데에는, 현대 심리학과의 뜻밖의 연결이 큰 몫을 했습니다. 그 다리가 바로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입니다.

인지행동치료의 핵심 아이디어는 놀랍도록 스토아적입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비를 두고 누군가는 망친 소풍을 떠올려 우울해하고, 누군가는 메마른 정원이 살아난다며 반가워합니다. 비는 같았는데 마음은 달랐습니다.

이 발상은 사실 에픽테토스가 거의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사람을 흔드는 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인지행동치료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앨버트 엘리스는 자신의 치료법이 스토아 철학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직접 밝혔다고 전해집니다. 즉, 현대 심리치료의 한 갈래가 2000년 전 노예 철학자의 통찰 위에 세워졌다고도 말할 수 있는 셈입니다.

다만 여기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지의 재구성이 도움이 된다고 느끼며, 연구들도 인지행동치료가 여러 상황에서 효과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철학적 실천과 임상 치료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깊은 우울이나 불안을 겪고 있다면, 좋은 책 한 권보다 자격을 갖춘 전문가의 도움이 먼저입니다. 스토아주의는 마음을 단련하는 훌륭한 도구일 수 있지만, 모든 마음의 병을 혼자 다스리는 처방으로 과장해서는 곤란합니다.

오늘의 삶에 대어 보기: 회복력에서 소셜미디어까지

스토아주의가 현대에 다시 읽히는 이유는, 그 개념들이 오늘의 구체적인 고민에 의외로 잘 들어맞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단정은 삼가고, "많은 이가 그렇게 느낀다", "일부는 이렇게 본다"는 정도로 조심스럽게 짚어 보려 합니다.

먼저 회복력입니다. 부정적 시각화와 통제의 이분법은,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흔들림을 줄여 준다고 여겨집니다. 결과가 아니라 노력에 마음을 두는 태도는, 실패를 자기 전체에 대한 판결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도록 돕습니다. 운동선수와 기업가들이 스토아주의를 자주 입에 올리는 것도 이 지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슬픔과 상실 앞에서도 스토아주의는 종종 위로의 언어가 됩니다. 다만 앞서 보았듯 그것은 슬픔을 느끼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했던 이를 잃는 일이 인간 조건의 일부임을 미리 받아들이되, 그가 곁에 있던 시간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선물로 누렸던 것으로 기억하라는 권유에 가깝습니다.

소셜미디어 시대에도 통제의 이분법은 흥미로운 거울이 됩니다. 타인의 좋아요와 평가는 본질적으로 내 손 밖의 일이건만, 우리는 거기에 마음의 무게중심을 옮겨 두곤 합니다. 스토아적 시선은 묻습니다. 너의 평온이 정말로 낯선 이들의 손가락질 한 번에 달려 있어야 하느냐고.

소비주의에 대한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호되는 무관한 것"이라는 개념은, 물건이 나쁘다는 금욕적 단죄가 아니라, 그것이 내 행복을 결정짓지는 못한다는 거리 두기를 권합니다. 새 물건의 설렘이 얼마나 빨리 식는지를 아는 사람에게, 이 거리 두기는 꽤 실용적인 지혜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리더십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잡으려 애쓴 황제의 일기는, 권한이 클수록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오래된 교훈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 모든 적용은 어디까지나 참고일 뿐, 만능 해법으로 과장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덧붙여 둡니다.

신화와 실제: 짧게 가려내기

흔히 떠도는 인상과 원전 사이의 간극을, 몇 가지 짤막한 대비로 다시 정리해 봅니다.

  • 신화: 스토아 철학자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실제: 그들은 깊이 느끼되 격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 신화: 스토아주의는 세상을 등진 은둔 사상이다. 실제: 정의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핵심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 신화: 무슨 일이든 그저 참고 견디라는 가르침이다. 실제: 바꿀 수 있는 것은 용기를 내어 바꾸라고 권합니다.
  • 신화: 스토아주의는 한 사람이 만든 완성된 교리다. 실제: 제논에서 마르쿠스까지 수백 년에 걸쳐 다듬어진 학파입니다.
  • 신화: 부와 즐거움을 죄악으로 여긴다. 실제: 선호되는 무관한 것으로 보아, 누리되 종속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 지금 다시 스토아인가

한 가지 자연스러운 물음이 떠오릅니다. 수많은 옛 철학 가운데, 어째서 하필 스토아주의가 21세기에 이토록 널리 되살아났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그럴듯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배경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 흔들리는 경제,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 속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가르라"는 단순한 지침은 묘하게 든든한 닻이 됩니다. 복잡한 형이상학 없이도 당장 오늘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입니다.

둘째, 실천 지향성입니다. 스토아주의는 추상적 사변보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합니다. 구체적인 정신 수련법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바쁜 현대인에게 곧바로 손에 쥐어지는 도구처럼 다가옵니다.

셋째, 앞서 본 심리학과의 연결입니다. 인지행동치료라는 과학적 외피가 스토아의 직관에 신뢰를 더해 주었습니다. 옛 철학이지만 막연한 옛이야기는 아니라는 인상을 준 것입니다.

다만 이 유행에는 그늘도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스토아주의가 본래의 깊이를 잃은 채, 성공과 생산성을 위한 자기관리 기법으로만 얄팍하게 소비된다고 우려합니다. 평정과 절제가 단지 더 많이 일하기 위한 도구로 쪼그라든다면, 그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꿈꾼 좋은 삶과는 사뭇 다른 그림일 것입니다. 유행의 물결을 타되, 그 뿌리에 놓인 윤리적 물음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오래된 철학을 얄팍하게 만들지 않는 길일 듯합니다.

비교로 정리하기: 흔한 오해와 실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표 하나로 정리해 봅시다. 왼쪽은 우리가 흔히 가진 인상이고, 오른쪽은 원전을 읽었을 때 드러나는 결입니다.

흔한 오해스토아 원전에 가까운 이해
감정을 모두 억누른다파괴적 격정만 다스리고 건강한 감정은 인정한다
세상일에 무관심하라결과에 집착하지 않되 의무에는 성실히 임하라
모든 것을 그냥 참아라바꿀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바꾸라
부와 즐거움을 죄악시한다선호되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되 종속되지 말라
혼자 도를 닦는 은둔 사상공동체와 타인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다
차갑고 비관적이다감사와 평정을 통한 단단한 낙관에 가깝다

이 표가 보여 주듯, 스토아주의는 흔한 인상보다 훨씬 따뜻하고 능동적인 철학입니다.

세 사람을 한눈에: 비교표

앞서 만난 세 인물의 차이와 공통점을 표 하나로 정리해 봅니다. 같은 철학이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스며들었는지가 한눈에 보입니다.

구분에픽테토스세네카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회적 신분노예 출신, 훗날 자유인이자 교사부유한 정치가이자 극작가로마 황제
남긴 글강의록과 핸드북 (제자가 받아 적음)편지와 도덕 에세이자신에게 쓴 일기, 명상록
문체의 결단호하고 직설적인 비유유려하고 사색적인 산문담담한 자기 다짐
강조한 주제통제의 이분법, 의지의 자유시간, 평정, 죽음에 대한 대비덧없음, 의무, 공동체

세 사람의 출발점은 이토록 달랐지만, 도착한 결론은 놀랍도록 가깝습니다. 신분도 시대도 다른 이들이 같은 지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야말로, 스토아주의의 보편성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증거일 것입니다.

짧은 연표로 보는 스토아주의의 여정

스토아주의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한눈에 보기 위해, 대략적인 흐름을 적어 봅니다. 정확한 연도보다 큰 줄기를 느끼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스토아주의의 큰 흐름 (대략적인 시간 순서)

  기원전 3세기 무렵   키티온의 제논이 아테네의 주랑에서 가르치기 시작
                       -> '스토아'(주랑)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
  그 이후 수 세기      크리시포스 등이 사상을 체계화 (초기 스토아)
  기원후 1세기 무렵    세네카, 로마 정치 한복판에서 활동
  기원후 1~2세기       에픽테토스, 노예에서 철학 교사로
  기원후 2세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이자 철학자
  중세~근대            기독교 사상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영향
  현대                 인지행동치료에 영감, 대중적 재유행

이 흐름에서 눈여겨볼 점은, 스토아주의가 한 시대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다시 읽히고 변형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시대마다 새 옷을 갈아입으며 살아남은 사상인 셈입니다.

오랜 메아리: 후대에 남긴 흔적

스토아주의가 로마 제국과 함께 저물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영향은 여러 갈래로 오래 이어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 가운데 일부는 스토아의 윤리적 언어와 자기 절제의 이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양심, 의무, 보편적 인류애 같은 개념들이 스토아적 토양에서 자라나 후대의 도덕 담론에 스며들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고대 문헌이 다시 발굴되고 읽히면서, 세네카의 편지와 에픽테토스의 핸드북이 교양인의 필독서로 떠올랐습니다. 이 시기의 한 흐름은 스토아주의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시도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신스토아주의라 부르기도 합니다. 평정, 운명에 대한 의연함, 절제 같은 덕목이 당대의 문학과 정치 사상에 깊은 자취를 남겼습니다.

근대로 오면, 스토아의 통찰은 다양한 사상가들의 언어에 직간접으로 메아리쳤습니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 20세기에 이르러 인지행동치료라는 임상적 통로를 통해 다시 한번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한 고대 철학이 신학과 문학을 거쳐 끝내 심리치료실에까지 닿았다는 사실은, 이 사상이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다시 들여다보는 개념 하나: 선호되는 무관한 것

앞에서 스치듯 언급한 "선호되는 무관한 것"이라는 개념은, 스토아주의를 오해 없이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하므로 한 번 더 짚어 두려 합니다. 이 개념은 자칫 모순처럼 들립니다. 무관하다면서 선호된다니, 어느 쪽이란 말인가 싶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답은 이렇습니다. 행복, 곧 잘 사는 것은 오직 덕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이나 부 같은 외적 조건은 우리의 근본적인 행복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도 우리는 덕을 통해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건강과 질병이, 부와 가난이 똑같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이성적인 사람은 당연히 건강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선호되는" 무관한 것입니다.

이 구분이 주는 실천적 교훈은 미묘하면서도 강력합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좋은 일을 위해 부지런히 애써도 좋습니다. 다만 그 결과가 끝내 내 뜻과 다르게 흘러도,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근본 가치를 무너뜨리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영혼을 저당 잡히지 않는 태도, 이것이 선호되는 무관한 것이라는 개념의 핵심입니다.

일상에서의 작은 실험들

거창한 결심 없이도 스토아주의를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가벼운 실험을 소개합니다.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이니, 자신에게 맞는 것만 골라 보셔도 좋습니다.

첫째, 아침의 한 문장입니다. 마르쿠스가 그랬듯, 하루를 시작하며 오늘 마주칠 수 있는 어려움을 미리 한 줄로 적어 봅니다. "오늘 회의에서 답답한 순간이 올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침착함을 택하겠다." 이렇게 미리 그려 둔 어려움은 실제로 닥쳤을 때 한결 가볍게 느껴집니다.

둘째, 통제 점검입니다. 어떤 일로 마음이 무거울 때,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이건 내게 달려 있는 일인가, 아닌가?" 만약 달려 있지 않다면, 거기 쏟던 에너지를 달려 있는 쪽으로 옮겨 봅니다.

셋째, 저녁의 회고입니다. 세네카는 잠들기 전 하루를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고칠지 물었다고 전해집니다. 자책이 아니라 점검입니다. 재판관이 아니라 다정한 코치의 눈으로 하루를 되짚어 봅니다.

넷째, 감사의 시선 바꾸기입니다. 늘 곁에 있어 당연해진 것 하나를 골라, 그것이 없는 하루를 잠깐 상상해 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평범한 것이 조금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다섯째, 위에서 내려다보기의 축소판입니다. 사소한 일로 속이 부글거릴 때, 잠시 눈을 감고 시점을 끌어올려 봅니다. 이 도시 전체, 이 나라 전체, 나아가 이 지구 전체에서 지금 내 고민이 차지하는 자리를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고민이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그 크기는 조금 알맞게 줄어들 것입니다.

여섯째, 한 호흡의 멈춤입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한 번의 숨을 끼워 넣는 연습입니다. 누군가 무례한 말을 던졌을 때, 곧바로 받아치는 대신 한 호흡을 들이쉬며 묻습니다. "지금 화를 내는 것이 정말 내게 달려 있는 선택인가, 아니면 그저 휘둘리는 반응인가." 이 짧은 틈이 종종 후회할 말을 막아 줍니다.

작은 용어 사전: 스토아의 낱말들

스토아주의를 더 깊이 읽고 싶은 분을 위해, 자주 마주치는 낱말 몇 개를 짧게 풀어 둡니다.

  • 아레테: 흔히 덕으로 옮기는 말로, 인간으로서의 탁월함, 자기 기능을 잘 발휘함을 뜻합니다.
  • 아파테이아: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파괴적인 격정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 에우다이모니아: 잘 사는 것, 곧 번영하는 삶을 뜻하며 흔히 행복으로 옮기지만 단순한 기분 좋음보다 넓은 개념입니다.
  • 로고스: 우주를 꿰뚫는 이성이자 질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 프로하이레시스: 우리의 의지, 곧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판단할지를 정하는 능력으로, 에픽테토스가 특히 강조했습니다.
  • 오이케이오시스: 자기 자신에서 출발해 가족, 이웃, 마침내 모든 인류로 관심의 동심원을 넓혀 가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이 낱말들을 알아 두면, 원전을 읽을 때 번역의 안개 너머로 본래의 결을 조금 더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물음들

스토아주의를 처음 만난 분들이 흔히 던지는 물음 몇 가지에, 조심스럽게 답해 봅니다.

스토아주의는 종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토아주의는 신앙이 아니라 철학입니다. 다만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를 관통하는 이성적 질서를 상정했고, 어떤 이들은 거기서 종교적 색채를 읽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그 형이상학을 빼고 윤리적 실천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습니다.

스토아주의를 따르면 야망을 버려야 하나요. 아닙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의무에 성실히 임하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다만 결과에 영혼을 저당 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되, 그 결과가 끝내 내 뜻과 달라도 무너지지 않는 태도를 권합니다.

스토아주의와 불교는 같은 것인가요. 비슷한 통찰이 있지만 같지는 않습니다. 둘 다 집착에서 오는 괴로움을 다루지만, 출발한 문화와 형이상학, 목표하는 바가 서로 다릅니다. 닮음과 다름을 함께 보는 것이 두 전통 모두에 대한 예의일 것입니다.

오늘 당장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거창한 결심보다, 앞에서 소개한 작은 실험 하나를 골라 일주일만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를테면 아침의 한 문장이나 통제 점검 한 가지면 충분합니다. 철학은 머리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길드는 습관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한계: 공정하게 바라보기

어떤 사상도 만능은 아닙니다. 스토아주의에도 진지하게 새겨들을 만한 비판들이 있습니다. 한쪽 손을 들어 주기 전에, 양쪽 이야기를 모두 들어 보는 것이 공정한 태도일 것입니다.

첫째, 통제의 이분법이 자칫 수동성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이건 내가 바꿀 수 없어"라는 말이, 마땅히 바꿔야 할 부조리 앞에서 체념의 핑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불의 앞에서 평정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회피일 수 있습니다. 다만 스토아 철학자들 자신은 정의를 핵심 덕목으로 꼽았으니, 이 비판은 스토아주의의 본뜻보다 그 게으른 적용을 겨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둘째, 감정에 대한 입장이 너무 이상적이라는 지적입니다. 격정을 판단의 문제로만 보는 시각은, 트라우마처럼 의지로 다스리기 어려운 마음의 영역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마음이 생각만으로 통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압니다.

셋째, 세네카의 사례가 보여 주듯, 말과 삶 사이의 간극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간극은 스토아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이상을 좇는 인간이 안고 가는 보편적 숙제이기도 합니다.

넷째, 특권의 문제입니다. 일부 비판자들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이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결 쉬운 조언이라고 지적합니다. 황제와 부유한 정치가가 평정을 설파하는 것과,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같은 평정을 권하는 것은 무게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픽테토스가 노예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이 비판에 대한 흥미로운 반례이기도 합니다.

다섯째, 분리와 초연함에 대한 비판입니다. 어떤 사상가들은,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라는 권유가 자칫 차가운 무심함이나 관계의 빈곤으로 흐를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격정을 다스리라는 이상이 분노가 정당한 동력이 되는 순간, 이를테면 불의에 맞서는 정당한 분노까지 무디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페미니즘 계열의 일부 논의는, 감정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이 돌봄과 연결의 가치를 충분히 담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런 논의들이 옳은지 그른지를 여기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사상을 건강하게 사용하려면, 이런 반대편의 목소리도 함께 들어 두는 편이 좋습니다.

여섯째, 부정적 시각화가 비관으로 기울 위험입니다. 같은 훈련이 어떤 이에게는 감사를 주지만, 불안이 높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걱정을 키울 수 있습니다. 도구는 쓰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므로, 누구에게나 같은 처방이 듣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비판들을 안다고 해서 스토아주의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계를 알고 쓸 때, 한 사상은 맹신의 대상이 아니라 쓸모 있는 도구가 됩니다.

마치며: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기

다시 처음의 두 사람, 노예와 황제에게로 돌아갑니다. 한 사람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고, 한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둘은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삶의 무게중심을 바깥이 아니라 안에 두라는 것. 바꿀 수 없는 것 앞에서는 평정을, 바꿀 수 있는 것 앞에서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

스토아주의는 우리에게 슬픔도 기쁨도 느끼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대신,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라고 권합니다.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2000년을 견딘 이 철학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단단한 선물일지 모릅니다.

더 읽고 싶다면: 첫걸음을 위한 안내

스토아주의에 마음이 끌렸다면, 어디서부터 읽기 시작할지 막막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길잡이를 적어 둡니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제안일 뿐이니, 자신의 취향대로 골라 보셔도 좋습니다.

가장 부담 없는 출발점은 에픽테토스의 핸드북, 곧 엔케이리디온입니다. 분량이 짧고 문장이 단호하여, 한 번에 통독한 뒤 곁에 두고 자주 들춰 보기에 좋습니다. 통제의 이분법이라는 핵심 개념을 가장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사색적인 글을 원한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좋습니다. 다만 이 책은 본래 자기 자신에게 건넨 메모인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기보다 아무 데나 펼쳐 한두 단락씩 음미하는 방식이 더 어울립니다.

문학적인 산문을 좋아한다면 세네카의 편지와 짧은 글들이 잘 맞습니다. 인생의 짧음에 관한 글은 특히 시간과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명문으로 꼽힙니다.

원전이 부담스럽다면, 신뢰할 만한 백과사전 항목이나 입문 해설서로 큰 그림을 먼저 잡은 뒤 원전으로 넘어가는 방법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독이 아니라, 한 구절이라도 자기 삶에 대어 보며 천천히 곱씹는 일입니다.

생각할 거리

  • 지금 당신을 가장 무겁게 누르는 고민 하나를 떠올려 보세요. 그중 진짜로 당신에게 달려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일까요?
  • 통제의 이분법과 삼분법 가운데, 당신의 삶에는 어느 쪽이 더 잘 맞는다고 느끼시나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부정적 시각화가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를 주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불안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시나요?
  • 세네카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렸던 인물을, 우리는 위선자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노력하는 인간으로 보아야 할까요?
  • 만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오늘의 스마트폰과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마주했다면, 그는 자신의 일기에 무엇이라고 적었을까요?
  • 네 가지 핵심 덕목 가운데, 지금 당신의 삶에서 가장 길러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키티온의 제논이 난파를 두고 "좋은 항해"였다고 말했듯, 당신의 삶에서 잃음이 새로운 길의 문이 되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 "선호되는 무관한 것"이라는 개념은 당신이 지금 좇고 있는 목표 하나를 어떻게 다시 보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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