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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사회학 — 연결된 시대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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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오래된 수수께끼

지하철 객차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출근길의 객차 안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서로의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서 있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낯선 이의 숨결이 있고, 누군가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옆 사람의 통화 내용이 들려옵니다. 물리적으로 이보다 더 가까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그 객차 안에서 자신이 깊이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 장면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면서도 끈질깁니다. 어떻게 사람은 수십 명에게 둘러싸인 채로 철저히 혼자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더 큰 질문이 뒤따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과, 가장 빠르게, 가장 자주 연결될 수 있게 된 이 시대에, 왜 외로움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의 화두가 되었을까요.

2023년 미국 공중보건국장(Surgeon General) 비벡 머시(Vivek Murthy)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에 관한 권고문을 발표하며 이를 일종의 사회적 비상사태로 규정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3년 사회적 연결을 위한 위원회(Commission on Social Connection)를 출범시켰습니다. 영국은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했고, 일본도 2021년 고독·고립 담당 장관직을 신설했습니다. 외로움은 더 이상 개인의 감상이나 나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정책으로 다루는 공적 의제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사회학의 렌즈로 들여다봅니다. 외로움이 정확히 무엇인지, 왜 현대에 들어 더 도드라지는지,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그리고 이 오래된 인간 조건과 우리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한 가지 미리 약속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은 외로움을 병으로 단정하거나, 혼자 있는 모든 시간을 문제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른 것이고, 고독에는 그 나름의 풍요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 정의의 문제부터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사회적 고립

우리는 일상에서 외로움, 고독, 고립이라는 말을 자주 뒤섞어 씁니다. 그러나 이들을 구분하는 것이 논의의 출발점입니다.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은 객관적인 상태입니다. 한 사람이 실제로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양과 빈도가 적은 상태를 말합니다. 혼자 사는지, 만나는 사람이 몇 명인지, 얼마나 자주 대화하는지처럼 바깥에서 셀 수 있는 지표입니다.

반면 외로움(loneliness)은 주관적인 경험입니다. 내가 원하는 관계와 실제로 가진 관계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감정입니다. 핵심은 바로 이 괴리에 있습니다. 친구가 백 명 있어도 외로울 수 있고, 친구가 한 명뿐이어도 충만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외로움은 관계의 개수가 아니라 관계의 질, 그리고 그 질에 대한 나의 기대치에서 비롯됩니다.

마지막으로 고독(solitude)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혼자 있음입니다. 산책길의 사색, 새벽의 글쓰기, 홀로 떠난 여행처럼, 고독은 회복과 창조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서 보낸 시간,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가 고독 속에서 길어 올린 통찰을 떠올려 보십시오. 같은 물리적 상태, 즉 혼자 있음이라도, 그것을 내가 선택했는가 강요당했는가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세 개념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혼자 있음의 두 얼굴

   강요된 혼자 있음           선택된 혼자 있음
   ─────────────────         ─────────────────
   사회적 고립 + 외로움        고독(solitude)
   고통스러움                  풍요로울 수 있음
   "나는 단절되었다"           "나는 충전 중이다"

        ↑                          ↑
   원하는 관계 > 가진 관계     원하는 관계 = 가진 관계
        (괴리 발생)              (괴리 없음)

두 종류의 외로움 — 사회적 외로움과 정서적 외로움

외로움 연구의 토대를 놓은 인물 중 한 명은 사회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로버트 와이스(Robert Weiss)입니다. 그는 1973년 저서에서 외로움이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 구분되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이 구분은 오늘날까지도 외로움을 이해하는 가장 유용한 틀 중 하나입니다.

첫째는 사회적 외로움(social loneliness)입니다. 이것은 소속될 집단, 함께 어울릴 사람들의 망이 부족할 때 생깁니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 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 학교를 졸업하고 동기들과 흩어졌을 때, 은퇴 후 매일 보던 동료들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그 휑한 감각입니다. 친밀한 한 사람이 있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속할 무리, 나를 알아보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정서적 외로움(emotional loneliness)입니다. 이것은 깊은 애착의 대상, 즉 나의 약한 부분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부재에서 옵니다. 파티장에 사람이 가득해도, 직장에서 매일 수십 명과 대화해도, 정작 진심을 나눌 사람이 없을 때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사회적 외로움이 넓이의 문제라면, 정서적 외로움은 깊이의 문제입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둘이 서로 다른 처방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외로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동호회나 모임, 새로운 공동체로의 연결이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정서적 외로움을 겪는 사람에게 더 많은 모임은 오히려 공허감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과의 깊은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을 막연히 "사람을 더 만나면 해결된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외로움은 신호다 — 진화의 관점

흥미로운 관점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외로움은 결함이 아니라 기능일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시카고 대학의 신경과학자 존 카치오포(John Cacioppo)는 외로움을 일종의 생물학적 경보 장치로 보았습니다. 배고픔이 음식을 찾으라는 신호이고 갈증이 물을 찾으라는 신호이듯, 외로움은 사회적 유대를 회복하라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진화적으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작은 무리를 이루어 생존했습니다. 무리에서 떨어진 개체는 포식자와 굶주림 앞에서 극도로 취약했습니다. 따라서 고립을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끼도록 진화한 개체일수록, 서둘러 무리로 돌아가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외로움이라는 불쾌한 감각은 우리 조상이 혼자 죽지 않도록 진화가 설치한 안전장치였던 셈입니다.

문제는 이 고대의 경보 장치가 현대 사회와 잘 맞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무리에서 떨어져도 굶거나 잡아먹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속의 경보 장치는 여전히 작동합니다. 그리고 때로 이 경보는 잘못 울리거나, 너무 오래 울려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왜 지금 외로움인가 — 현대를 만든 힘들

외로움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도, 중세의 은둔 수도사에게도, 19세기 낭만주의 시인에게도 외로움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로움이 "사회 전체의 문제"로 부상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몇 가지 거대한 힘이 맞물려 작동하고 있습니다.

도시화와 1인 가구의 부상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우리가 사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불과 한두 세기 전만 해도 인류 대다수는 농촌의 대가족 안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결혼하고 죽었으며, 이름을 아는 이웃과 평생을 함께했습니다. 관계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이 구조를 근본에서 뒤흔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들었고,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다시 핵가족은 1인 가구로 쪼개졌습니다. 오늘날 많은 선진국에서 1인 가구는 가장 흔한 가구 형태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1인 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빠르게 늘어왔습니다. 혼자 사는 것 자체가 외로움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연한 마주침과 일상의 대화가 사라지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도시는 역설의 공간입니다. 수백만 명이 모여 살지만,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이 당연해졌습니다. 밀도는 높아졌으나 친밀함은 옅어졌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19세기 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은 대도시의 사람들이 쏟아지는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심함이라는 태도를 발전시킨다고 보았습니다. 도시의 무관심은 냉정함이 아니라 일종의 생존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과 진심으로 연결될 수는 없으니,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을 풍경처럼 흘려보내는 법을 배웁니다.

공동체의 약화 — 볼링 혼자 치기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은 2000년 출간한 저서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인상적인 관찰을 제시했습니다. 미국에서 볼링을 치는 사람의 총수는 늘었지만, 볼링 리그에 가입해 함께 치는 사람의 수는 급감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여전히 볼링을 치지만, 점점 더 혼자 칩니다.

퍼트넘은 이 작은 관찰을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했습니다. 사회적 자본이란 사람들 사이의 신뢰, 호혜, 그리고 그들을 엮는 관계망의 총체입니다. 그는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교회, 노동조합, 학부모회, 친목 단체 같은 전통적 공동체 조직의 참여가 광범위하게 줄어들었다고 진단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덜 모이고, 덜 신뢰하고, 덜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으로 그는 텔레비전, 통근 시간, 세대 교체 등을 지목했습니다.

퍼트넘의 진단을 둘러싸고는 다양한 반론도 있습니다. 전통적 단체는 쇠퇴했지만 새로운 형태의 느슨한 연결이 그 자리를 채웠다는 견해, 사회적 자본의 측정 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를 우연히 한자리에 모아 주던 제도와 공간이 사라질 때, 관계는 점점 더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개인의 노력에 맡기는 사회는, 그 노력을 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외로움 속에 남겨 둡니다.

일과 이동성 — 뿌리 뽑힌 삶

현대인은 조상보다 훨씬 자주 움직입니다.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일자리,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도시를 옮기고 나라를 건너갑니다. 이동성은 분명 축복입니다. 태어난 곳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설계할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모든 이주에는 보이지 않는 비용이 따릅니다. 한 번 이사할 때마다 우리는 오랜 친구, 단골 가게의 주인, 매일 인사하던 이웃, 그동안 쌓아 온 관계망의 일부를 두고 떠납니다. 그리고 새 도시에서 그 망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합니다. 성인이 된 후의 친구 사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누구나 한 번쯤 절감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매일 같은 교실에 모이는 것만으로 친구가 생겼지만, 성인의 세계에는 그런 강제된 반복적 마주침의 장이 드뭅니다.

게다가 노동의 형태도 변했습니다.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잦은 이직과 프로젝트 단위의 일이 늘었습니다. 원격 근무와 하이브리드 근무는 통근의 고통을 덜어 주었지만, 동시에 탕비실에서의 잡담, 점심을 함께 먹으며 쌓이던 동료애 같은 우연한 사회적 접촉의 기회를 줄였습니다. 효율을 얻은 대신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을 내어 준 셈입니다.

외로움과 건강 — 연구가 말하는 것

여기서부터는 특별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영역입니다. 외로움과 건강의 관계에 관해서는 진지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지만, 동시에 과장과 오해도 많습니다. 우선 분명히 해 둘 것은, 외로움은 질병이 아니며, 외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곧 건강을 잃는다는 식의 단정은 옳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래에서 소개하는 것은 인구 집단 수준에서 관찰된 통계적 경향이지, 한 개인의 운명을 예측하는 진단이 아닙니다.

메타분석이 보여 준 상관관계

외로움과 건강을 잇는 연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물은 심리학자 줄리앤 홀트룬스타드(Julianne Holt-Lunstad)입니다. 그와 동료들은 수많은 개별 연구를 종합하는 메타분석을 통해, 사회적 연결의 정도와 사망률 사이에 의미 있는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고했습니다. 사회적 유대가 강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생존 가능성이 더 높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가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이 흡연이나 비만 같은 잘 알려진 건강 위험 요인에 견줄 만한 수준의 통계적 관련성을 보였다는 점 때문입니다. 다만 이 비교는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외로움이 담배만큼 해롭다는 단순한 등식이 아니라, 사회적 연결이 인구 집단의 건강과 통계적으로 그만큼 깊이 얽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함정

여기서 가장 흔한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두 가지가 함께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외로움과 건강 악화가 함께 관찰될 때, 그 관계는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외로움과 건강의 얽힘 — 가능한 경로들

  경로 A:  외로움  ──→  건강 악화
           (외로움이 건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경로 B:  건강 악화  ──→  외로움
           (아프면 활동이 줄어 고립될 수 있다)

  경로 C:  제3의 요인 ──→ 외로움
                      └──→ 건강 악화
           (가난·실직 등이 둘 다를 키울 수 있다)

  → 현실에서는 이 경로들이 서로 얽혀 작동한다

예컨대 몸이 아픈 사람은 외출과 모임이 어려워져 더 고립되기 쉽습니다. 이 경우 화살표는 건강에서 외로움으로 향합니다. 또 가난, 실직, 차별 같은 제3의 요인이 외로움과 건강 악화를 동시에 키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지한 연구자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통제하려 노력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변수를 완벽히 분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로우면 빨리 죽는다"는 식의 공포 조장 대신, "사회적 연결은 건강과 깊이 관련된 중요한 요소"라는 절제된 표현을 택해야 합니다.

외로움은 어떻게 몸에 닿는가 — 조심스러운 가설들

연구자들은 사회적 연결이 건강과 얽히는 몇 가지 경로를 가설로 제시합니다. 다만 이것들은 활발히 연구 중인 영역이며 확정된 의학적 결론이 아님을 거듭 강조합니다.

한 가지 가설은 행동 경로입니다. 곁에 누군가 있는 사람은 끼니를 잘 챙기고, 운동을 함께하고, 몸이 이상하면 병원에 가 보라는 권유를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계 자체가 일종의 안전망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설은 스트레스 경로입니다. 만성적인 외로움이 몸의 스트레스 반응을 지속적으로 자극할 수 있다는 추정입니다. 그러나 이 영역은 여전히 논쟁적이며, 개인차가 크고, 단순한 인과로 환원하기 어렵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좋은 관계는 삶의 좋은 토대가 됩니다. 그러나 외로움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의 건강을 함부로 진단하거나 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외로움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지, 낙인찍을 결함이 아닙니다.

디지털의 역설 — 더 연결될수록 더 외로운가

손안의 광장, 그러나

이 글의 가장 까다로운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연결 도구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친구와 실시간으로 영상 통화를 하고, 잊고 지내던 초등학교 동창과 다시 연결되며, 같은 취미를 가진 낯선 이들과 거대한 온라인 공동체를 이룹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디지털 기술은 외로움의 해독제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정반대의 경험을 보고합니다. 스크롤을 멈추고 화면에서 눈을 떼는 순간, 묘한 공허감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수백 명의 친구 목록, 수천 개의 좋아요, 끊임없이 도착하는 알림 속에서, 정작 새벽 세 시에 전화할 사람은 없다고 느끼는 역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디지털의 역설입니다.

양면을 모두 보기

여기서 균형이 중요합니다. 기술 자체를 악마로 모는 것도, 아무 문제 없다고 외면하는 것도 정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연구들은 대체로 한 가지 미묘한 결론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화면을 얼마나 오래 보느냐가 아니라, 그 화면으로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같은 도구, 다른 결과

  연결을 보완하는 사용              연결을 대체하는 사용
  ─────────────────────          ─────────────────────
  멀리 사는 친구와 통화            끝없는 무한 스크롤
  실제 만남 약속을 잡음            남의 삶을 구경만 함
  공동체에 적극 참여               댓글로만 존재함
  → 오프라인 관계를 강화           → 비교와 공허를 키움

화면 너머의 진짜 사람과 만날 약속을 잡는 데 도구를 쓴다면, 디지털은 관계를 보완합니다. 멀리 사는 가족, 거동이 어려운 사람,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이에게 온라인 공동체는 때로 유일한 숨구멍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 실제 만남을 대체해 버리고, 타인의 편집된 삶을 끝없이 구경하며 자신과 비교하는 데 쓴다면, 같은 도구가 공허감을 키울 수 있습니다.

특히 비교의 문제는 깊이 들여다볼 가치가 있습니다. 사회적 비교는 인간의 오랜 습성이지만, 과거에는 비교의 대상이 주변의 실제 이웃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빛나 보이는 순간들만 편집해 모은 영상을 하루 종일 들여다봅니다. 모두가 자신의 하이라이트만 전시하는 무대에서, 우리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과 남의 화려한 편집본을 비교하며 까닭 모를 결핍감에 시달립니다. 외로움은 종종 이 비교의 그늘에서 자라납니다.

약한 유대와 강한 유대

사회학에는 약한 유대(weak ties)와 강한 유대(strong ties)라는 유용한 구분이 있습니다. 강한 유대는 가족, 절친한 친구처럼 깊고 가까운 관계입니다. 약한 유대는 가끔 마주치는 동네 카페 주인, 헬스장에서 눈인사하는 사람, 단골 식당의 사장님처럼 느슨하지만 반복되는 관계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의 안녕감에는 강한 유대만큼이나 약한 유대도 중요합니다. 매일 마주치는 작은 인사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아는 사람들과의 가벼운 교류는 우리에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잔잔한 감각을 줍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편리함은 바로 이 약한 유대를 가장 먼저 지워 버립니다. 키오스크로 주문하고, 무인 계산대를 지나고, 배달 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우리는 하루에 단 한 마디도 낯선 이와 나누지 않은 채 잠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효율은 늘었지만, 그 효율이 지워 버린 자잘한 인간적 접촉의 빈자리를,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이름으로 뒤늦게 알아챕니다.

외로움의 지형 — 누가, 언제 외로운가

외로움을 노인의 문제로만 여기는 것은 흔한 오해입니다. 물론 배우자와 친구를 떠나보내고, 은퇴로 사회적 역할을 잃으며, 거동이 불편해지는 노년기에 외로움의 위험이 커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 여러 조사는 의외의 그림을 보여 줍니다. 청년층, 특히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의 외로움 보고가 상당히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여러 사회에서 관찰됩니다.

왜 그럴까요. 청년기는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이 몰려 있는 시기입니다. 학교를 떠나고, 낯선 도시로 이주하고, 첫 직장에 적응하고, 정체성을 다시 빚어 갑니다. 이 모든 전환은 기존의 관계망을 흔들고 새로운 망을 요구합니다. 게다가 청년 세대는 디지털 환경에서 자라며 끊임없는 사회적 비교에 가장 많이 노출된 세대이기도 합니다.

외로움은 생애 전체에 걸쳐 특정 전환점에서 솟구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곡선으로 그려 보면 흔히 두 개의 봉우리가 나타납니다.

   외로움 위험의 생애 곡선 (개념도)

  위험 ↑
  높음 │   ╭╮                        ╭╮
       │  ╱  ╲                      ╱  ╲
       │ ╱    ╲___      ___      __╱    ╲
       │╱         ╲___╱     ╲___╱
  낮음 └──────────────────────────────────→
        청년기   중년기 안정기    노년기
       (전환·이주)  (관계망 형성)  (상실·은퇴)

  → 외로움은 나이가 아니라 전환과 상실에서 솟구친다

여기서 얻을 교훈은, 외로움이 특정 연령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생의 전환기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손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사, 이직, 이별, 출산, 사별, 은퇴처럼 삶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는 순간마다 우리는 잠시 외로움에 노출됩니다. 이를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외로움이 내 인격의 결함이 아니라 전환기의 자연스러운 동반자임을 알면, 우리는 그것을 덜 부끄러워하고 더 차분히 다룰 수 있습니다.

문화마다 다른 외로움 — 같은 감정, 다른 무게

외로움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그것이 문화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고 다르게 해석된다는 점을 짚어야 합니다. 외로움은 보편적인 인간 감정이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할 일로 보느냐 자연스러운 일로 보느냐, 개인이 감당할 몫으로 보느냐 공동체가 함께 풀 일로 보느냐는 사회마다 사뭇 다릅니다.

흔히 사회과학에서는 개인주의 문화와 집단주의 문화를 대비합니다. 개인의 자율과 성취를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선택하지만 그만큼 관계를 스스로 만들고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집니다. 반면 가족과 공동체의 유대를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촘촘한 관계망이 안전망이 되어 주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나만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모두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외로움을 고백하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어떤 연구들은 직관과 반대되는 결과를 내놓기도 합니다. 가족 결속이 강하다고 알려진 사회에서 노년층의 외로움이 더 높게 보고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기대치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식과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홀로 남겨진 노인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의 노인보다 더 큰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외로움의 정의를 떠올려 보십시오. 외로움은 원하는 관계와 가진 관계의 괴리에서 옵니다. 기대치가 높을수록 괴리도 커질 수 있습니다. 같은 객관적 상황이라도, 문화가 빚어 놓은 기대의 높이에 따라 외로움의 무게는 달라집니다.

이 관점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칩니다. 외로움에 단 하나의 정답 처방은 없으며, 어떤 사회에서 효과적인 해법이 다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관점은 희망도 줍니다. 외로움이 문화적으로 빚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외로움을 바라보는 문화 자체를 바꾸어 갈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이 가장 닿기 쉬운 곳 — 취약함의 지도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문턱에 더 자주 노출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살피는 것은 누군가를 동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로움이 순전히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처지와 환경의 산물이기도 함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주민과 이방인을 떠올려 보십시오. 언어가 다르고 관습이 낯선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은, 오랜 관계망을 모두 두고 온 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같은 언어로 농담을 주고받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맥락을 공유하는 일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는, 그것을 잃어 본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돌봄을 떠맡은 사람도 외로움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아픈 가족이나 어린아이를 종일 돌보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늘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자신의 세계가 점점 좁아지는 고립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또래와의 접촉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가면을 쓴 채 살아갑니다. 가면을 쓴 연결은 아무리 많아도 정서적 외로움을 채우지 못합니다.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비슷한 위험에 놓입니다. 모임에 나가려면 돈과 기력과 이동 수단이 필요한데, 바로 그것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연결의 장에서 멀어지기 쉽습니다.

이 지도가 우리에게 일러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 더 노력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느냐"는 질책은 종종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어떤 이에게 연결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줄이려는 노력은, 개인을 다그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누구나 손쉽게 연결에 닿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잠깐 퀴즈 — 당신은 외로움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나요

본격적인 해법으로 넘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내용을 가볍게 점검해 보겠습니다. 머릿속으로 답을 떠올린 뒤 아래 해설과 맞춰 보십시오.

문제 1.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문제 2. 와이스가 구분한 두 종류의 외로움, 즉 사회적 외로움과 정서적 외로움 중, 친한 친구가 곁에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은 어느 쪽일까요.

문제 3. "외로운 사람일수록 일찍 사망한다"는 단정이 과학적으로 부정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제 4. 디지털 기술이 외로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가 가리키는 핵심 변수는 무엇일까요.

잠시 생각해 보셨나요. 이제 해설입니다.

해설 1. 사회적 고립은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관계의 양이고, 외로움은 원하는 관계와 가진 관계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주관적 감정입니다. 그래서 고립되어 있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고,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해설 2. 사회적 외로움입니다. 사회적 외로움은 소속될 집단과 어울릴 무리의 부재에서 오므로, 단 한 명의 친한 친구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정서적 외로움은 깊은 애착 대상의 부재에서 오므로, 많은 모임으로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해설 3.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독한 단정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움과 건강 악화가 함께 관찰되더라도, 아픈 사람이 고립되는 역방향의 경로나, 가난 같은 제3의 요인이 둘 다를 키우는 경우가 얽혀 있을 수 있습니다. 통계적 경향은 개인의 운명을 예측하지 않습니다.

해설 4. 사용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사용의 방식입니다. 같은 도구라도 실제 만남을 보완하는 데 쓰면 연결을 강화하고, 실제 만남을 대체하며 비교에 몰두하는 데 쓰면 공허를 키울 수 있습니다.

외로움의 역사 — 감정에도 역사가 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일부 역사학자와 언어학자는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의미의 외로움(loneliness)이 비교적 근대적인 개념이라고 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사람은 그리움과 단절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음을 본질적으로 고통스럽고 결핍된 상태로 보는 시선, 그리고 그것을 가리키는 정서적으로 무거운 단어는 비교적 근래에 또렷해졌다는 관찰입니다.

영어에서 loneliness라는 단어가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정서를 강하게 담게 된 것은 대략 근대 이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전에 혼자 있음을 가리키던 말들은 오히려 중립적이거나, 때로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수도자의 거룩한 고독처럼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종교적 세계관 안에서 인간은 결코 진정으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늘 함께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이 시사하는 바는 깊습니다. 외로움이 순전히 생물학적 보편 감정만은 아니며,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즉 문화와 신념의 틀에 의해 빚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촘촘하고 운명이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는, 외로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적었을지 모릅니다. 반대로 개인의 자유와 자기실현을 최고의 가치로 떠받드는 시대에는, 그 자유의 그림자로서 외로움이 더 짙게 드리울 수 있습니다. 외로움의 증가는 어쩌면 우리가 그만큼 더 자유롭고 개인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의 다른 얼굴인지도 모릅니다.

이 외로움이라는 개념과 사회의 관계를 시간 순으로 짚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로움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 (개략적 흐름)

  전근대 ── 대가족·마을 공동체. 관계는 주어진 것.
            혼자 있음은 흔히 거룩한 고독으로 이해됨.
  산업화 ── 도시로의 대이동.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낯선 이들 사이의 익명적 삶이 시작됨.
  20세기 ── 핵가족·교외화. 전통적 공동체 조직의 쇠퇴.
            "나 홀로 볼링"으로 상징되는 결속의 약화.
  디지털 ── 상시 접속과 1인 가구의 확산.
            연결은 늘었으나 깊이는 옅어졌다는 역설.
  현재 ── 외로움이 공적 의제로. 장관직 신설,
          공중보건 권고, 국제 위원회의 출범.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 개인과 사회의 해법

진단이 길었으니 이제 처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만 외로움에 만병통치약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외로움의 종류마다, 처한 상황마다 필요한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두 층위, 즉 개인이 할 수 있는 것과 사회가 해야 할 것을 나누어 살펴봅니다.

개인 차원 — 작은 실천들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외로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외로움은 인격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일부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부끄러워하지 않듯, 외롭다고 자신을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인식의 전환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외로움을 인정해야 비로소 그것에 대해 무언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의 외로움이 어느 종류인지 구분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소속될 무리가 그리운 사회적 외로움이라면, 정기적으로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활동, 즉 동호회나 자원봉사, 강좌처럼 반복적 마주침이 보장된 장에 자신을 놓아 보십시오. 깊은 한 사람이 그리운 정서적 외로움이라면, 더 많은 모임보다 기존 관계 하나를 깊게 가꾸는 데 마음을 쓰는 편이 낫습니다.

셋째, 약한 유대를 의식적으로 되살리는 것입니다. 키오스크 대신 가끔은 사람에게 주문하고, 단골 가게의 주인과 한두 마디 나누고,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 보십시오. 이런 자잘한 접촉이 쌓여 "나는 이 세상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의 바닥을 만듭니다.

넷째, 디지털 습관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화면을 완전히 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무한 스크롤로 남의 삶을 구경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 도구를 실제 만남의 약속을 잡는 데 더 쓰는 것입니다. 좋아요를 누르는 대신 안부 전화를 걸고, 타임라인을 내리는 대신 오랜 친구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는 작은 전환 말입니다.

다섯째, 베푸는 일의 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외로움을 덜어 주는 가장 효과적인 길 중 하나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돕고, 공동체에 기여하고,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느낄 때, 외로움은 종종 자리를 비켜 줍니다.

사회 차원 — 구조를 바꾸기

그러나 외로움을 순전히 개인의 노력 문제로 돌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마치 공기가 나쁜 도시에서 각자 알아서 숨을 잘 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외로움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함께 만든 환경의 산물이며, 따라서 함께 바꾸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도시 설계가 그 한 예입니다. 사람들이 우연히 마주치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 즉 공원, 광장, 도서관, 동네 카페, 보행 친화적 거리는 그 자체로 외로움을 막는 사회적 기반시설입니다. 모든 것을 자동차로 이동하고 모든 일을 집 안에서 해결하도록 설계된 도시는, 효율적일지언정 사람을 고립시킵니다. 반대로 걷고 싶은 거리, 앉고 싶은 벤치, 들르고 싶은 공공 공간이 많은 도시는 우연한 만남을 늘립니다.

공공 정책도 중요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영국과 일본은 외로움을 담당하는 정부 직책을 두었고, 여러 나라가 사회적 처방(social prescribing)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처방이란, 외로움이나 가벼운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약 대신 지역 동호회, 정원 가꾸기 모임, 합창단 같은 사회적 활동을 연결해 주는 제도입니다. 이는 외로움을 의료화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체의 자원으로 돌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일터의 문화 역시 외로움의 지형을 바꿉니다. 원격 근무의 효율을 누리되, 의도적으로 비공식적 교류의 장을 마련하는 조직, 신입에게 동료를 연결해 주는 조직, 사람을 부품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는 조직은 그렇지 않은 곳보다 구성원의 소속감을 키웁니다.

이 모든 노력을 한눈에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층위접근 방식구체적 예한계와 주의점
개인인식 전환외로움을 결함이 아닌 신호로 받아들이기의지만으로 해결 안 되는 경우가 많음
개인약한 유대 회복단골 가게 인사, 이웃과의 짧은 대화환경이 받쳐 주어야 가능
개인디지털 재조정비교성 소비를 줄이고 실제 만남에 도구 활용완전한 단절은 비현실적
공동체모임과 활동동호회, 자원봉사, 합창단, 정원 모임참여할 여유와 접근성이 전제
사회도시 설계공원, 광장, 도서관, 보행 친화 거리장기적 투자와 합의가 필요
사회공공 정책사회적 처방, 담당 부처, 캠페인낙인을 만들지 않도록 설계해야 함

표에서 보듯, 어느 한 층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노력은 그것을 받쳐 줄 환경이 있을 때 비로소 지속되고, 사회의 제도는 개인이 손을 내밀 때 비로소 작동합니다. 외로움은 개인과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매듭입니다.

고독을 위한 변호 — 혼자 있음의 다른 얼굴

여기까지 외로움의 어두운 면을 길게 다루었으니, 마지막으로 균형을 위해 반대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모든 혼자 있음이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잘 가꾼 고독은 삶의 가장 값진 자원 중 하나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류의 위대한 창조와 통찰 가운데 상당수는 고독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깊은 사색, 창작, 자기 성찰은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끊임없이 연결된 상태에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백이 생기지 않습니다. 알림이 쉼 없이 울리고 타인의 시선이 늘 곁에 있을 때, 우리는 정작 자기 자신을 만날 기회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혼자 있음 그 자체가 아니라, 원치 않는 단절로서의 외로움입니다. 고독을 견디는 능력, 나아가 고독을 즐기는 능력은 오히려 외로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풍요롭게 보낼 줄 아는 사람은 관계에 매달리지 않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건강한 관계를 맺습니다. 누군가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원해서 곁에 두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점을 알았습니다. 혼자 있을 줄 아는 능력은 성숙의 표지로 여겨졌습니다. 자기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은 타인과도 좋은 관계를 맺기 어렵습니다. 외로움의 해독제가 단순히 "더 많은 사람"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해독제는 의미 있는 연결과 충만한 고독 사이의 균형, 즉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을 모두 잘 살아내는 기술입니다.

나가며 — 다시 그 객차로

처음의 지하철 객차로 돌아가 봅시다.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선 수십 명의 낯선 사람들. 우리는 이제 그 장면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 객차 안의 외로움은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넘쳐 납니다. 부족한 것은 연결입니다. 물리적 근접과 심리적 친밀은 전혀 다른 것이며, 현대 사회는 전자를 극대화하면서 후자를 종종 방치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 곁에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적은 사람과 진실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비관으로 끝맺고 싶지 않습니다. 외로움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풀어 갈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외롭게 만든 도시 설계, 노동 방식, 디지털 습관, 공동체의 약화는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고, 따라서 인간이 다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거창한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늘 한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 일, 단골 가게에서 한마디를 건네는 일, 오랜 친구에게 만나자고 연락하는 일 같은 작은 손짓에서 시작됩니다.

연결된 시대의 고독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진실을 일깨웁니다. 연결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는 것. 신호의 세기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 우리를 잇는다는 것. 그 진실을 기억하는 한, 가장 외로워 보이는 객차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 거리

  • 당신이 최근 느낀 외로움은 사회적 외로움이었나요, 정서적 외로움이었나요. 그 구분이 필요한 처방을 어떻게 바꾸나요.
  • 당신의 하루에서 우연한 약한 유대의 접촉은 얼마나 남아 있나요. 편리함이 지워 버린 인간적 접촉은 무엇인가요.
  • 디지털 도구는 당신의 관계를 보완하고 있나요, 대체하고 있나요.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 있나요.
  • 외로움을 순전히 개인의 문제로 보는 시각과 사회 구조의 문제로 보는 시각 사이에서, 당신은 어디에 서 있나요. 둘은 정말 대립하나요.
  • 당신에게 고독은 어떤 의미인가요. 혼자 있는 시간을 풍요롭게 보내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 만약 하루 동안 모든 화면이 사라진다면, 당신의 하루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올 것 같나요.
  • 새로운 연결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사회가 똑같이 두려움과 기대로 갈렸다는 사실은, 오늘의 논쟁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각을 어떻게 바꾸나요.
  • 외로움에 관해 당신이 한때 믿었지만 지금은 의심하게 된 오해가 있나요. 그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외로웠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그때의 외로움은 사람이 없어서였나요, 연결이 없어서였나요.
  • 주변에 외로워 보이는 사람이 있나요.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을 무엇이 가로막고 있나요.
  • 사회가 외로움을 줄이기 위해 단 하나의 정책만 시행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고르겠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편지에서 전화까지 — 친밀함의 도구가 바뀔 때

조금 더 먼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 봅시다. 19세기의 어느 가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멀리 떠난 아들이 보낸 편지 한 통이 도착하면, 온 가족이 등불 아래 모여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편지는 며칠, 때로는 몇 주를 걸려 도착했고, 답장을 쓰는 데에도 다시 며칠이 걸렸습니다. 한 번의 왕복에 한 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느렸지만, 그래서 더 무거웠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담았고, 받은 편지는 닳도록 다시 읽혔으며, 서랍 깊은 곳에 평생 간직되었습니다.

그러다 전화가 등장했습니다. 처음 전화가 가정에 들어왔을 때, 많은 이들이 그것을 친밀함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당대의 어떤 평론가들은 전화가 직접 찾아가 얼굴을 보고 나누던 방문 문화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목소리만 오가는 대화가 어떻게 진짜 만남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정반대로, 전화가 멀리 사는 사람과도 즉각 연결해 주니 외로움을 끝장낼 기적의 도구라며 환호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 이 풍경은 묘하게 익숙합니다. 새로운 연결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사회는 똑같은 두 목소리로 갈렸습니다. 한쪽은 그것이 진짜 만남을 갉아먹는다고 두려워했고, 다른 쪽은 그것이 거리를 지우고 외로움을 없애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전화가 그랬고, 라디오가 그랬으며, 텔레비전이 그랬고, 이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그렇습니다. 매번 진실은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전화는 방문 문화를 완전히 죽이지도, 외로움을 완전히 없애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친밀함의 결과 질감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이 역사가 우리에게 일러 주는 교훈은 겸손과 균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을 두고 벌이는 논쟁, 즉 그것이 우리를 더 외롭게 하느냐 덜 외롭게 하느냐는 물음은, 사실 한 세기도 더 전에 우리 조상이 전화를 두고 던졌던 물음의 반복입니다. 도구는 거의 언제나 양날의 칼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손에 쥐느냐였습니다. 느린 편지에도 차가운 의무감만 담을 수 있고, 빠른 메시지에도 깊은 진심을 담을 수 있습니다. 결국 친밀함을 빚는 것은 매체의 속도가 아니라 마음의 정성이라는 오래된 진실은, 도구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외로움을 둘러싼 흔한 오해들

외로움에 관해서는 그럴듯하지만 실은 틀린 이야기들이 적지 않게 떠돕니다. 몇 가지 흔한 오해를 짚어 보면, 외로움을 더 정확하고 너그럽게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첫째 오해는 "외로움은 사람을 많이 만나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 정서적 외로움은 모임의 수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군중 속에서도 외로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양이 아니라 질, 그리고 그 질에 대한 기대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오해는 "외로운 사람은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종종 처지의 산물입니다. 이주, 사별, 돌봄, 질병, 가난처럼 사람이 통제하기 어려운 환경이 누구든 외로움의 문턱으로 밀어 넣을 수 있습니다. 외로움을 개인의 결함으로 환원하는 시선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잔인합니다.

셋째 오해는 "외로움은 오직 노인의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 조사가 보여 주듯, 청년층의 외로움 보고도 결코 낮지 않습니다. 외로움은 나이가 아니라 인생의 전환과 상실에서 솟구칩니다.

넷째 오해는 "혼자 있는 사람은 모두 외롭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독과 외로움을 뒤섞은 데서 오는 착각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혼자 있음은 회복과 창조의 시간일 수 있으며, 외로움과는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다섯째 오해는 "강한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사회적 유대를 회복하라는 보편적 신호입니다. 가장 단단해 보이는 사람도 전환기에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다만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입니다. 이 오해야말로 외로움을 부끄럽게 만들어 사람들을 더 깊은 고립으로 밀어 넣는, 가장 해로운 오해일지 모릅니다.

작은 사고 실험 — 만약 하루 동안 모든 화면이 사라진다면

마지막으로 짧은 사고 실험을 하나 제안하고 싶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내일 하루, 세상의 모든 화면이 작동을 멈춘다고 말입니다.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텔레비전도, 키오스크도, 무인 계산대도 전부 꺼집니다. 좋아요를 누를 곳도, 타임라인을 내릴 곳도, 메시지를 보낼 곳도 없습니다.

처음 몇 시간은 불안과 금단의 시간일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이 가고, 텅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허전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하루가 저물 무렵,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약속을 잡으려면 직접 찾아가거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길을 물으려면 낯선 이에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무료한 시간을 견디려면 옆 사람과 눈을 맞추거나, 책을 펼치거나, 그저 자기 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이 실험이 묻는 것은 단순합니다. 화면이 사라진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올 것인가. 화면은 분명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슬그머니 가져갔습니다. 낯선 이와의 짧은 대화,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시간, 어색한 침묵을 함께 견디는 경험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 사고 실험의 목적은 기술을 버리자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손에 쥐는 대가로 무엇을 내려놓았는지를 한 번쯤 또렷이 의식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 자각만으로도 우리는 도구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도구에 끌려가는 대신 말입니다.

생애 주기에 따른 외로움 — 같은 단어, 다른 얼굴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을 하나의 단일한 감정처럼 다룹니다. 그러나 외로움은 사람의 일생을 따라 모습을 바꾸며, 각 시기마다 전혀 다른 얼굴로 찾아옵니다. 같은 단어로 불리지만, 스무 살의 외로움과 여든 살의 외로움은 결코 같은 경험이 아닙니다.

청년기의 외로움은 흔히 과소평가됩니다. "친구도 많고 가능성도 무한한데 무엇이 외롭냐"는 시선이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회 조사는 오히려 청년층에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비율이 의외로 높게 나타난다는 점을 거듭 보여 줍니다. 정체성을 새로 빚어 가는 시기, 또래와 끊임없이 자신을 견주는 시기, 그리고 화면 속 타인의 화려한 삶과 자기 일상을 비교하기 쉬운 시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동시에 비교의 기준점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년기의 외로움은 다른 결을 띱니다. 가정과 일로 둘러싸여 늘 누군가와 함께 있지만, 정작 마음을 터놓을 깊은 관계는 줄어드는 시기입니다. 바쁨이 친밀함을 밀어내고,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은 "언제 한번 보자"는 인사로 미뤄집니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로 정서적으로 외로운, 앞서 살펴본 정서적 외로움의 전형이 이 시기에 자주 나타납니다.

노년기의 외로움은 또 다른 무게를 지닙니다. 은퇴로 일터의 관계가 사라지고, 친구와 배우자를 차례로 떠나보내며,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바깥세상과의 통로가 좁아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시선입니다. 흔히 "노인은 모두 외롭다"고 단정하지만, 많은 어르신은 오랜 세월 다져 온 관계와 단단한 자기 세계 덕분에 오히려 평온하게 혼자 있음을 누립니다. 외로움은 나이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나이에 어떤 연결의 토양이 남아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외로움을 생애 주기의 렌즈로 바라보면, 두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첫째, 외로움은 특정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마주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이라는 것. 둘째, 시기마다 필요한 처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청년에게 필요한 연결과 노인에게 필요한 연결은 같지 않으며, 한 가지 해법으로 모든 외로움을 풀려는 시도는 번번이 빗나갑니다. 외로움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같은 단어 아래 숨은 서로 다른 얼굴들을 알아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한 줄로 남기고 싶은 말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가장 단순한 진실을 한 줄로 남기고 싶습니다. 외로움은 부끄러운 결함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존재임을 알려 주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배고픔이 음식을 찾으라는 몸의 신호이듯, 외로움은 연결을 회복하라는 마음의 신호입니다. 그 신호를 부끄러워하며 감추는 순간, 우리는 정작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를 잃습니다.

그러니 다음에 외로움이 찾아오거든, 그것을 적이 아니라 전령으로 맞이해 보면 어떨까요. 그 전령은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잠시 화면을 내려놓고, 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외로움에서 빠져나오는 첫걸음은, 나의 외로움을 인정하는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외로움을 먼저 알아차리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