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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윤리 — 용서는 의무인가 선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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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풀려나는 사람은 누구인가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두 명의 수도승이 길을 가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한 젊은 여인이 물을 건너지 못해 곤란해하고 있었습니다.

형 수도승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여인을 업어 강을 건너 줍니다. 그런데 이 수도승들에게는 여인의 몸에 손대지 말라는 계율이 있었습니다.

동생 수도승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강을 건넌 뒤에도 몇 시간 동안 마음속으로 형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계율을 어길 수 있단 말인가. 형은 정말 수행자가 맞는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따져 묻자, 형이 말합니다. "나는 그 여인을 강가에 내려놓고 떠났네. 그런데 자네는 아직도 그 여인을 업고 있군."

이 일화는 용서의 한 가지 진실을 건드립니다. 누군가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을 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은 종종 잘못한 그 사람이 아니라 원한을 품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용서는 가해자가 아니라 나 자신을 풀어 주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듣기에 따뜻하고, 어딘가 지혜로운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면 너무 쉽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모든 것을 용서해야 할까요? 용서가 의무라면, 끔찍한 일을 당한 피해자에게도 우리는 용서를 요구할 수 있을까요?

용서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 결함일까요, 아니면 정당한 권리일까요? 그리고 도대체 누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 용서하는 것일까요?

이 글은 용서라는, 따뜻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까다로운 개념을 조심스럽게 풀어 봅니다.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 않고, 여러 입장을 신중하게 펼쳐 보이려 합니다. 결론을 내려 드리기보다, 함께 생각할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미리 한 가지를 밝혀 두고 싶습니다. 이 글은 누구에게도 "용서하라"고 권하지 않으며, 반대로 "용서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옳고 그름을 쉽게 가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상처와 다른 시간 위에서 내려지는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결정을 조금 더 또렷한 눈으로 내릴 수 있도록, 용서를 둘러싼 개념의 지도를 함께 그려 보려 합니다. 지도가 길을 대신 걸어 주지는 못하지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니까요.


용서란 무엇인가 — 원한을 내려놓는다는 것

잊는 것도, 봐주는 것도 아니다

먼저 용서가 '아닌 것'부터 정리하면 개념이 또렷해집니다. 무엇이 용서가 아닌지를 하나씩 지워 나가다 보면, 남는 것이 용서의 윤곽입니다.

용서는 망각이 아닙니다. 잊어버리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깊은 상처일수록 잊히지 않습니다. "용서하고 잊어라(forgive and forget)"라는 말이 흔하지만, 이 둘은 별개입니다.

용서는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또렷이 기억하되, 그 기억이 오늘의 나를 더는 베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묵인이나 변명도 아닙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은 애초에 용서가 필요 없는 상황입니다.

용서는 오히려 "당신은 분명히 잘못했다"는 판단을 전제로 합니다. 잘못이 없다면 용서할 것도 없으니까요. 역설적이지만, 용서는 잘못을 가장 분명하게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처벌의 포기와도 다릅니다. 법정에서 죗값을 치르게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할 수 있고, 반대로 처벌을 면해 주면서도 원한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용서는 잊는 일도, 봐주는 일도, 벌을 거두는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좀 더 내밀한 무엇입니다.

감정의 전환으로서의 용서

현대 철학자들이 자주 채택하는 정의에 따르면, 용서란 정당한 분노(원한, resentment)를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조지프 버틀러(Joseph Butler)는 그의 유명한 설교집에서 이 '분노'를 깊이 분석했습니다. 그는 부당한 일에 대한 분노 자체는 자연스럽고 때로 정당한 감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분노는 우리에게 부당함을 알리는 일종의 경보입니다. 누군가 나를 해쳤을 때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기 존엄에 대한 무감각일지 모릅니다.

다만 버틀러는, 그 분노가 복수심으로 굳어지고 한 사람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분노는 신호일 수는 있어도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버틀러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신선하게 들립니다. 그는 분노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지도, 무조건 정당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분노에는 두 얼굴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부당함에 즉각 반응하는 순간적 분노입니다. 누가 나를 밀치면 욱하는, 거의 반사적인 감정입니다. 다른 하나는 곰곰이 곱씹은 끝에 자리 잡는 정착된 원한입니다. 이쪽이 더 오래가고, 더 위험합니다.

버틀러가 경계한 것은 주로 후자였습니다. 정착된 원한이 한 사람의 일상을 갉아먹고, 복수의 상상을 끝없이 되감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는 정의의 감각이 아니라 마음을 가두는 감옥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 용서란 그 정당한 분노를 자발적으로 누그러뜨리는 마음의 작업입니다. 분노가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충분히 인정한 다음 그것을 놓아 주는 것입니다.

핵심은 '자발성'입니다. 강요당한 용서, 억지로 짜낸 용서는 진짜 용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기만이거나 억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명령하기 어렵습니다. "용서하라"는 말은 "사랑하라"는 말만큼이나, 옳을지언정 강제하기 곤란한 요구입니다. 누군가 칼끝을 들이대며 "지금 진심으로 용서하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은 용서의 흉내일 뿐입니다.

용서가 아닌 것들
  망각      — 기억이 사라짐 (의지 밖)
  묵인/변명 — 잘못이 없었다고 봄 (용서 불필요)
  처벌 포기 — 외적 결과의 면제 (감정과 별개)
용서인 것
  정당한 분노를,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자발적으로 내려놓음

작은 사고 실험 — 사과 없는 용서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사과를 받지 못했는데도 용서가 가능할까요?

많은 철학자는 "그렇다"고 답합니다. 용서는 가해자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피해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사과는 용서를 쉽게 만들지만, 용서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사과 없는 용서는 어딘가 공허하다"고 봅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잘못 자체를 가볍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이 작은 사고 실험만으로도, 용서가 얼마나 다층적인 개념인지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절들에서 이 결들을 하나씩 풀어 보겠습니다.

용서의 세 가지 얼굴

조금 더 정리해 보면, 우리가 '용서'라는 한 단어로 부르는 것 안에는 사실 서로 다른 얼굴이 섞여 있습니다.

첫째는 감정의 용서입니다. 가슴속에서 원한이 누그러지고, 그 사람을 떠올릴 때 더는 칼날 같은 분노가 일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가장 내밀하고, 가장 강요하기 어려운 차원입니다.

둘째는 의지의 용서입니다. 아직 감정은 따라오지 못했더라도, "나는 더는 복수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차원입니다. 마음은 여전히 아프지만, 그 아픔을 행동의 동력으로 삼지 않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표현의 용서입니다. 상대에게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로 전하는 차원입니다. 이것은 관계의 신호이며, 종종 화해의 문을 여는 첫걸음이 됩니다.

이 셋은 함께 가기도 하지만, 어긋나기도 합니다. 말로는 용서했다고 했지만 마음은 아직 아릴 수 있고, 마음으로는 놓았지만 굳이 말로 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했는가"라는 물음은, 사실 "어느 차원에서 용서했는가"라는 더 섬세한 물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 — 닮았지만 다른 두 길

혼자 할 수 있는가, 둘이 해야 하는가

용서와 화해(reconciliation)는 자주 혼동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는 종종 엉뚱한 것을 서로에게 요구하게 됩니다.

용서는 원칙적으로 혼자서도 가능합니다. 가해자가 사과하지 않아도,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났더라도, 피해자는 마음속에서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반면 화해는 둘 이상이 함께해야 합니다. 화해는 깨진 관계를 다시 잇는 일이며, 신뢰의 회복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신뢰는 한쪽의 노력만으로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가해자의 진정한 뉘우침, 책임의 인정, 변화의 약속이 필요합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화해는 양쪽의 일입니다.

이 구분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종종 "용서했으면 다시 예전처럼 지내야 한다"고 압박합니다. 마치 용서가 자동으로 관계의 복원을 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용서하면서도, 그를 다시 신뢰하거나 가까이 두지 않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반복적으로 해를 끼치는 사람을 용서할 수는 있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용서가 마음의 평화라면, 화해는 관계의 재건이고, 둘은 별개의 결정입니다. 마음으로는 원한을 놓았지만 문은 닫아 두는 것 — 이것은 충분히 일관된 태도일 수 있습니다.

용서화해
필요한 사람한 명(피해자)둘 이상
핵심원한을 내려놓음신뢰를 회복함
가해자의 사과없어도 가능대체로 필요
결과마음의 변화관계의 재건

화해가 어려운 이유 — 신뢰는 느리게 자란다

신뢰가 한 번 깨지면 회복이 더딘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뢰란 본질적으로 미래에 대한 베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이 사람이 앞으로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에 나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 예측이 한 번 배신당하면, 우리는 합리적으로 더 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화해에는 시간과 증거가 필요합니다. 한 번의 사과가 아니라, 달라진 행동이 꾸준히 쌓여야 비로소 깨진 신뢰가 다시 자랍니다. 말로 짓는 것이 사과라면, 행동으로 짓는 것이 신뢰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용서했는데 왜 아직도 거리를 두느냐"는 채근이 얼마나 성급한지 보입니다. 용서는 순간에 일어날 수 있어도, 화해는 좀처럼 그렇지 못합니다.

한 장면 — 오래 끌어온 두 친구

가까웠던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뢰를 크게 저버린 일이 있었고, 둘은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잘못을 한 쪽이 먼저 연락을 합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목조목 인정하고, 그동안 상대가 겪었을 마음을 헤아렸다고 말합니다.

상처를 입었던 쪽은 그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마음속의 원한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예전처럼 가까운 친구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신뢰가 쌓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화해의 시작입니다.

이 장면이 보여 주듯, 용서는 한 번의 결심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화해는 여러 계절을 건너는 일입니다. 그리고 용서가 화해로 반드시 이어져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용서만으로 충분하고, 관계는 정중한 거리로 남는 편이 더 건강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 — 한계에 관한 물음

누가 용서할 자격을 가지는가

가장 무거운 질문은 이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일도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누가 용서할 권리를 가지는가?

20세기의 한 사상가는 이 문제를 날카롭게 제기했습니다. 그는 오직 피해를 직접 당한 사람만이 그 가해를 용서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제3자가, 심지어 선의로라도, 다른 사람이 입은 피해를 대신 용서하는 것은 월권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을 대신해 누가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정작 용서할 유일한 당사자는 이미 침묵 속에 있습니다.

이 논점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에게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이, 겪은 사람에게 용서를 종용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권유할 수 있을지언정 강요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당사자의 몫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대신 정산해 줄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용서할 자격의 사고 실험

이 '자격' 문제를 좀 더 밀고 가 봅시다. 어떤 잘못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상처를 남깁니다.

예컨대 어떤 부당함이 한 집단 전체를 겨냥했다고 합시다. 이때 그 집단의 한 사람이 "나는 용서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집단 전체를 대신한 용서일까요, 아니면 오직 자기 자신의 몫만을 내려놓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려 깊은 답은 후자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상처만을 용서할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상처까지 대신 처분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는 위임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닙니다.

이 사고 실험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용서는 본질적으로 일인칭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나는 용서한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우리 모두를 대신해 용서한다"고는 함부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란 정말 존재할까요? 어떤 철학자는, 너무 쉽게 용서되는 잘못이라면 애초에 용서라는 말이 무겁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바로 그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것' 앞에서야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야말로 용서가 가장 빛나는 자리이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그것을 용서하라고 요구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용서가 위대해 보이는 것은, 바로 그것이 결코 강요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

여기서 균형을 위해 반대 방향의 관점도 들어 봅시다. 일부 철학자와 심리학자는 용서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문화를 경계합니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용서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권하는 것이, 자칫 피해자에게 또 하나의 부담을 지우고 정당한 분노를 억누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옹호합니다. 어떤 분노는 자기 존엄을 지키는 신호이며, 부당함에 대한 정당한 항의입니다.

모든 것을 너무 빨리 용서해 버리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용서가 늘 성숙의 표시인 것은 아니며, 때로는 부당함에 맞설 힘이 없어 미리 항복해 버리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용서는 미덕일 수 있지만, 결코 의무는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기로 한 선택 또한 존중받아야 할 도덕적 입장입니다.

물론 정반대 전통도 있습니다. 무조건적 용서를 더 높은 이상으로 보는 종교적·철학적 관점입니다. 어떤 사랑은 자격을 따지지 않고 베풀어질 때 가장 빛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손쉬운 정답은 없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상처와 가치 앞에서 내릴 결정이며, 어느 쪽도 함부로 우열을 매길 수 없습니다.


정의와 용서 — 충돌하는가, 함께 가는가

용서하면 정의는 사라지는가

흔한 오해 하나는 "용서는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용서와 처벌이 같은 저울 위에 있어서,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이 내려간다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용서는 감정의 문제이고 처벌은 제도의 문제입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마음으로 용서하더라도, 사회는 여전히 정의를 세우기 위해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용서가 곧 사회적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진정한 용서가 정의를 전제한다고 봅니다. 잘못이 잘못으로 분명히 명명되고, 책임이 인정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흐지부지 덮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회피입니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자리에서의 '용서'는, 종종 가해자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피해자의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회복적 정의라는 실험

이 긴장을 다루는 흥미로운 시도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입니다. 그것은 처벌과 용서를 대립시키는 대신, 둘을 한 과정 안에 엮으려는 시도입니다.

전통적 형사 정의가 "어떤 법을 어겼고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회복적 정의는 "누가 어떤 피해를 입었고 그것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질문의 중심이 '법'에서 '사람'으로, '처벌'에서 '회복'으로 옮겨 갑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접 마주 앉아 대화하고, 가해자가 책임을 인정하며, 공동체가 함께 회복을 모색하는 방식입니다.

역사적으로 큰 갈등을 겪은 일부 사회에서는, 처벌과 보복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모색하는 공적 절차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시도는 "정의 없는 용서는 값싸고, 용서 없는 정의는 끝없는 복수가 된다"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진실을 먼저 드러내고, 그 위에서 회복의 길을 함께 찾자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접근에도 비판은 있습니다. 충분한 처벌 없이 화해를 서두르면 피해자의 정당한 분노가 묻힐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용서하는 것이 옳다"는 분위기가 강해지면, 그것은 또 하나의 압력이 됩니다. 자유로워야 할 용서가 의무로 둔갑하는 순간, 회복적 정의는 본래의 취지를 잃을 수 있습니다. 용서와 정의의 균형은 여전히 열린 과제입니다.

응보와 회복 사이에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정의관을 마주합니다. 하나는 응보적 정의로, 잘못에는 합당한 대가가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하나는 회복적 정의로, 깨진 것을 다시 잇는 일을 우선합니다.

이 둘은 흔히 대립하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책임을 묻는 일과 회복을 모색하는 일은 한 과정 안에서 공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도 피해자를 도구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응보가 복수로 타락하지 않도록, 회복이 강요된 용서로 변질되지 않도록 — 그 사이의 좁은 길을 걷는 일이 정의의 어려움입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용서는 사적인 영역의 선택이지만, 정의는 공적인 책임의 문제입니다. 피해자가 개인적으로 어떤 마음을 먹든, 사회가 잘못을 잘못으로 기록하고 재발을 막을 책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용서했으니 사건은 끝났다"는 식의 논리는 위험합니다. 그것은 사적인 용서를 공적인 면죄로 슬쩍 바꿔치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마음의 일이고, 책임은 제도의 일이라는 구분은 끝까지 지켜져야 합니다.


마음에 미치는 영향 — 연구가 말해 주는 것

짐을 내려놓을 때 몸도 가벼워진다

심리학은 용서를 도덕적 명령으로서가 아니라 '관찰 가능한 마음의 작용'으로 연구해 왔습니다. 좋다 나쁘다를 판정하기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피는 접근입니다.

여러 연구가 만성적인 원한과 분노가 스트레스, 수면 문제, 심혈관 건강과 관련될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분노를 오래 품는 일은 마음뿐 아니라 몸에도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는 듯합니다.

반대로 용서에 이른 사람들에게서 불안과 우울이 줄고 정서적 안녕이 높아지는 경향이 관찰되었습니다. 강가에 짐을 내려놓을 때,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은 비유만은 아닐지 모릅니다.

다만 여기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이런 연구들은 상관관계를 보여 주는 경우가 많고, "용서하면 반드시 건강해진다"는 식의 단정은 과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위험합니다.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더 건강한 사람이 더 쉽게 용서에 이르는 것인지, 용서가 건강을 이끄는 것인지, 아니면 제3의 요인이 둘 다에 영향을 주는 것인지 — 연구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건강을 위해 억지로 용서를 짜내는 것은 앞서 말한 '강요된 용서'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건강해지려면 용서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자칫 피해자에게 또 하나의 의무를 지우는 일이 됩니다.

깊은 외상을 겪은 사람에게 섣불리 용서를 권하는 것은 오히려 해로울 수 있어, 전문가들은 개인의 속도와 안전을 우선하라고 조언합니다. 용서는 처방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자기 속도로 다가갈 여정입니다.

용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

심리학 연구가 공통적으로 시사하는 한 가지는, 용서가 한순간의 결심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분노를 충분히 인정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점차 그것을 다른 감정으로 바꾸어 가는 여정입니다. 마치 상처가 아무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마음의 회복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서했다"고 선언한다고 곧바로 마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어떤 날은 용서한 것 같다가도, 어떤 날은 다시 분노가 솟구칩니다.

진짜 변화는 대개 더 느리고, 더 들쭉날쭉하며, 더 인간적입니다. 한 걸음 나아갔다 반걸음 물러서기를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 그것이 용서의 실제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왜 아직도 용서하지 못했느냐"는 자책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자주 인용되는 경향신중한 단서
만성 분노는 스트레스와 관련될 수 있음상관관계이며 인과 단정 곤란
용서는 정서적 안녕과 연관될 수 있음개인차가 크고 강요는 역효과
용서는 과정이며 시간이 걸림외상 사례는 전문적 도움 권장

자기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

여기서 자주 빠지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용서의 대상은 늘 타인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가장 용서하기 어려워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지난 잘못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끝없이 단죄하는 일은, 타인을 향한 원한만큼이나 무겁습니다. 자기 용서란 자신의 잘못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을 진 다음, 그 무게에 영원히 짓눌리지는 않기로 하는 일입니다.

다만 자기 용서에도 같은 단서가 붙습니다. 너무 빠른 자기 용서는 책임 회피로, 너무 더딘 자기 용서는 자기 학대로 기울 수 있습니다. 그 사이의 균형은, 타인을 용서하는 일만큼이나 섬세한 작업입니다.


종교와 철학의 관점들

여러 전통이 그리는 용서의 풍경

용서는 거의 모든 문화와 종교가 깊이 사유해 온 주제입니다. 인류는 오래도록 '어떻게 상처를 다룰 것인가'를 물어 왔고, 용서는 그 물음에 대한 가장 오래된 답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전통은 용서를 신적인 자비의 본받음으로, 무조건적이고 관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봅니다. 여기서 용서는 자격을 따지지 않는 베풂이며, 인간이 신을 닮아 가는 통로입니다.

또 어떤 전통은 진정한 뉘우침과 보상을 용서의 전제 조건으로 강조하며, 정의 없는 손쉬운 용서를 경계합니다. 잘못한 자가 먼저 돌이키고 바로잡으려 애쓸 때, 비로소 용서가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양의 일부 사상은 원한 자체가 마음의 독이라고 보아, 집착에서 벗어나는 내면의 자유로서 용서에 가까운 태도를 권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상대를 면죄하는 일이 아니라, 원한이라는 짐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일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출발점이 다른 전통들이 종종 비슷한 결론에 가닿습니다. 무조건적 사랑을 강조하는 쪽도, 뉘우침을 전제하는 쪽도, 집착의 내려놓음을 말하는 쪽도, 결국은 "원한에 사로잡힌 채로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동의가 곧 "그러니 빨리 용서하라"는 처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전통은 그 자유에 이르는 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 길을 재촉해서는 안 됨을 함께 가르칩니다.

미덕인가, 위험인가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용서의 위상은 갈립니다. 같은 행위를 두고도 평가가 정반대로 엇갈립니다.

누군가는 용서를 자비와 관대함의 미덕으로 칭송합니다. 분노의 사슬을 끊고 더 너른 마음으로 나아가는 일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군가는 정당한 분노를 너무 쉽게 버리는 것이 자기 존중의 결여라고 경계합니다. 부당함 앞에서 마땅히 화내야 할 때 화내지 않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양한 목소리들이 하나같이 한 가지에는 동의한다는 점입니다. 용서는 가볍게 다룰 주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잘못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덮어 버리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눈을 뜨고 똑바로 본 다음에야, 용서든 불용서든 비로소 진실한 선택이 됩니다.


스스로 점검하는 작은 퀴즈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의미로, 가볍게 스스로 답해 볼 만한 물음 몇 가지를 골라 보았습니다. 정답이 정해진 시험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또렷이 해 보는 거울이라고 여겨 주십시오.

물음 1. 다음 중 이 글에서 말하는 '용서'에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요?

  • (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끗이 잊는 것
  • (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
  • (다) 잘못을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정당한 분노를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것
  • (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모두 면제해 주는 것

생각해 볼 점. 이 글의 정의에 따르면 답은 (다)에 가깝습니다. 용서는 망각(가)도, 묵인(나)도, 처벌 포기(라)도 아니며, 잘못을 직시한 채로 원한을 놓는 내면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물음 2. "나는 그를 용서했지만, 다시 가까이 지내지는 않겠다." 이 말은 모순일까요?

생각해 볼 점. 용서와 화해를 구분하는 관점에서 보면 모순이 아닙니다. 용서는 마음의 평화(혼자 가능)이고, 화해는 신뢰의 회복(둘이 필요)이므로,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를 보류하는 것은 충분히 일관됩니다.

물음 3.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가해자를 "대신 용서"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볼 점. 정답은 없지만, 많은 사려 깊은 견해는 "용서는 일인칭의 행위"라고 봅니다. 한 사람은 자기 상처만을 용서할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의 상처를 대신 처분할 권한은 없다는 것입니다.

물음 4. "건강해지려면 용서하라"는 조언의 위험은 무엇일까요?

생각해 볼 점. 그것은 자유로워야 할 용서를 또 하나의 의무로 바꾸고,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섣부른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물음들에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 자신이 어디서 망설이는지를 알아채는 일이 더 값집니다. 망설임이 있는 자리야말로, 용서가 정말로 어려운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며 — 강가에 내려놓는 연습

다시 처음의 두 수도승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형 수도승이 옳았던 것은 잘못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그 일을 강가에 내려놓았을 뿐입니다. 무엇이 옳았는지, 무엇이 계율이었는지를 또렷이 알면서도, 그것을 계속 업고 가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용서란 어쩌면 그렇게,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계속 업고 가지 않기로 하는 연습인지도 모릅니다. 기억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기억의 무게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거듭 강조했듯, 용서는 누구에게도 강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미덕일 수 있으나 의무는 아니며, 위로일 수 있으나 처방은 아닙니다.

용서할 것인가, 한다면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는 결국 상처를 입은 당사자가 자신의 시간과 존엄 안에서 내릴 결정입니다. 누구도 그 결정의 시계를 대신 돌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어느 쪽이든,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용서하기로 한 사람의 너그러움도, 용서하지 않기로 한 사람의 정당함도 모두 인간의 깊이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일은, 상대의 짐을 대신 내려놓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속도로 그 짐을 다룰 수 있도록 곁에서 기다려 주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글에서 우리는 줄곧 '용서하는 사람'의 자리에서 이야기해 왔지만, 누구나 살아가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자리에도 서게 됩니다. 그 자리에 섰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대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과는 용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달라지려 애쓸 뿐, 용서할지 말지는 온전히 상대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 어쩌면 용서의 윤리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은, 용서를 베푸는 일이 아니라 용서를 기다릴 줄 아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강가에 짐을 내려놓는 일에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빨리 내려놓고, 누군가는 평생 안고 갑니다. 그리고 그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강가에서 각자의 속도를 존중하는 일뿐입니다.

그러니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결론이 아니라 물음이어야 마땅합니다. 당신의 강가에는 지금 무엇이 놓여 있나요.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을지 말지는, 오롯이 당신의 몫입니다.

생각할 거리

  • 용서와 화해를 구분한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용서했지만 다시 가까이하지는 않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제3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아니면 월권일까요?
  • 용서가 건강에 좋다는 연구가 있더라도, "건강을 위해 용서하라"는 권유에는 어떤 위험이 있을까요?
  • 사과 없는 용서와 사과 뒤의 용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요, 아니면 같은 것일까요?
  • "용서하지 않을 권리"라는 표현에 당신은 동의하시나요? 그 권리에도 한계가 있을까요?
  • 당신이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상대가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있나요? 자기 용서와 타인의 용서는 어떻게 다를까요?
  • 진정한 사과가 "용서를 요구하지 않는 사과"라는 말에 동의하시나요?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