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thors

- Name
- Youngju Kim
- @fjvbn20031
- 케이크 한 조각에서 시작된 싸움
- "공평"이라는 말의 무게
- 공정의 다섯 얼굴
- 최후통첩 게임 — 인간은 손해를 보면서도 불공정을 응징한다
- 공정은 머릿속 어디에 사는가
- 솔로몬의 재판 — 가장 오래된 공정 이야기
-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정 —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
- 분배의 공정과 절차의 공정 — 사람은 무엇에 더 분노하는가
- 무지의 베일 —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규칙을 정한다면
- 능력주의 — 빛과 그림자를 함께
- 할당과 적극적 조치 — 결과를 직접 손볼 것인가
- 일상 속 공정 딜레마 — 다섯 얼굴이 부딪히는 순간들
- 공정과 친절은 다르다
- 문화마다 다른 공정의 무게중심
- 인류가 발명한 공정 장치들
- 세 갈래의 정의론 —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
- 운과 책임 — 공정의 가장 깊은 매듭
- 측정할 수 없는 것을 나누기
- 작은 퀴즈 — 당신은 어떤 얼굴을 고르나요
- 마치며 — 여러 관점을 공정하게 대하는 일
- 참고 자료
케이크 한 조각에서 시작된 싸움
어린 시절,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칼이 케이크 위에 놓이는 그 순간만큼 식탁에 긴장이 흐르는 때도 드뭅니다. 모두가 똑같은 크기를 원하지만, 누군가는 딸기가 올라간 조각을, 누군가는 더 큰 조각을 바랍니다. 그때 부모님이 내놓은 지혜로운 규칙을 기억하시는지요. "한 사람이 자르고, 다른 사람이 먼저 고른다."
이 단순한 규칙 안에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씨름해 온 거대한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무엇이 공평한가.
자르는 사람은 자기가 손해 보지 않으려고 최대한 똑같이 자르고, 고르는 사람은 그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누구도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지 않습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분할-선택(divide and choose)" 절차라고 부릅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설계만으로 공정함을 만들어 낸 우아한 사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면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만약 케이크를 나눠 가질 두 사람 중 한 명이 사흘을 굶었고, 다른 한 명은 방금 식사를 마쳤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정확히 반으로 자르는 것이 공평할까요. 혹은 케이크를 만드는 데 한 사람이 재료비를 다 대고 다른 한 사람은 구경만 했다면요. 똑같이 나누는 것이 정말 공정한 일일까요.
이 글은 바로 그 미궁으로 들어가는 안내서입니다. "공정"이라는 한 단어 안에는 사실 서로 다른, 때로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여러 얼굴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다섯 얼굴을 하나씩 만나 보고, 사고실험과 실제 심리학 실험을 통해 그것들이 어떻게 부딪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이 글은 "정답"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분이 다음에 "그건 불공평해"라고 말하고 싶어질 때, 자신이 정확히 어떤 의미로 그 말을 쓰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공평"이라는 말의 무게
본격적인 여정에 앞서, 우리가 다룰 단어들을 잠시 정리해 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공정", "공평", "정의"를 거의 같은 뜻처럼 섞어 씁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결이 조금씩 다릅니다.
"공평"은 대체로 나눔의 균형에 초점을 둡니다. 누가 얼마나 갖는가, 그 몫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는가. "공정"은 그보다 넓어서, 나눔의 결과뿐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는 절차와 대우까지 아우릅니다. "정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사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옳음의 질서 전체를 가리키는 가장 큰 말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 셋을 엄격히 구분하기보다 느슨하게 넘나들며 쓰되, 핵심은 "마땅한 몫과 마땅한 대우"라는 공통의 직관에 둡니다. 어린아이가 "그건 불공평해"라고 외칠 때 느끼는 그 본능적 감각,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는데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그 감각이 우리 탐구의 출발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감각이 인류의 거의 모든 언어와 문화에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표현은 달라도, "받을 만한 것을 받고 주어야 할 것을 준다"는 관념은 보편적입니다. 그만큼 공정은 인간이라는 종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깊이 의지해 온 토대인 셈입니다.
공정의 다섯 얼굴
먼저 지도를 펼쳐 보겠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공평"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다섯 가지 서로 다른 원리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각은 그럴듯하고, 각각은 어떤 상황에서 분명히 옳게 느껴집니다. 문제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자주 다투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공정성의 다섯 원리
평등(Equality) : 모두에게 똑같이
형평(Equity) : 필요와 처지에 맞게 다르게
필요(Need) : 가장 부족한 사람에게 먼저
절차(Procedure) : 규칙과 과정이 올바르면 결과를 받아들인다
기회(Opportunity): 출발선을 같게, 그다음은 각자의 몫
평등 — 똑같이 나누면 끝일까
가장 직관적인 얼굴은 평등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투표에서 한 사람이 한 표를 갖는 것, 시험에서 모두가 같은 문제를 푸는 것, 케이크를 정확히 N등분 하는 것. 평등은 측정하기 쉽고, 편들기 어렵고, 그래서 가장 깨끗해 보입니다.
하지만 평등은 곧잘 표면에서 미끄러집니다. 키가 다른 세 사람이 담장 너머 경기를 보려 한다고 상상해 봅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높이의 발판을 하나씩 준다면, 원래 키가 큰 사람은 여유롭게 보고 키가 작은 사람은 여전히 담장만 봅니다. "똑같이" 주었지만 결과는 전혀 같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충돌을 만납니다.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평 — 다르게 대하는 것이 공평할 때
그래서 등장하는 두 번째 얼굴이 형평입니다. 키 작은 사람에게는 발판 두 개를, 키 큰 사람에게는 하나도 주지 않는다면, 셋 모두가 경기를 볼 수 있습니다.
다르게 대우함으로써 같은 결과에 이르는 것. 이것이 형평의 핵심입니다. 평등이 "같은 것을 주는" 일이라면, 형평은 "같은 곳에 닿게 하는" 일입니다.
형평은 강력하지만 위험한 질문을 동반합니다. "누구의 처지가 더 어려운가"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는가.
발판의 비유에서는 키가 명확히 보이지만, 현실의 처지는 그렇게 깔끔하게 측정되지 않습니다. 형평을 실현하려면 누군가는 사람들의 사정을 들여다보고 판단해야 하고, 바로 그 판단의 권력이 새로운 불공정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필요 — 가장 배고픈 사람에게
세 번째 얼굴은 필요입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라는 유명한 구호가 이 원리의 가장 압축된 표현입니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받는 순서는 도착 순서나 지불 능력이 아니라 위급함, 곧 필요에 따라 정해집니다. 이것을 트리아지(triage)라고 부르며, 거의 모든 문화권이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는 필요 원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필요를 모든 곳에 적용하면 곤란해집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나는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어떻게 가려낼까요.
필요는 진실할 때 가장 인간적인 원리지만, 검증하기 어렵다는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누구의 필요가 더 절실한지를 가리는 일은, 종종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공정 문제를 낳습니다.
절차 — 결과가 아니라 게임의 규칙
네 번째 얼굴은 조금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절차적 공정은 결과가 어떻든, 규칙과 과정이 올바르게 지켜졌다면 그 결과를 공정하다고 받아들이는 관점입니다. 동전 던지기로 누가 먼저 할지 정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동전이 앞면이 나오든 뒷면이 나오든, 동전이 공정했다면 우리는 결과에 승복합니다.
법정, 선거, 스포츠 경기가 모두 이 원리 위에 서 있습니다. 심판의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규칙이 공정하고 일관되게 적용되었다면 우리는 패배를 받아들입니다.
절차적 공정의 매력은 결과의 옳고 그름이라는 끝없는 논쟁을 피해 간다는 데 있습니다. 약점은, 출발 조건 자체가 기울어져 있을 때 "공정한 절차"가 불공정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규칙이 아무리 깔끔하게 지켜져도, 그 규칙이 적용되는 운동장이 처음부터 기울어 있다면 공정한 절차는 기울어진 결과를 충실히 재생산할 뿐입니다.
기회 — 출발선을 맞추는 일
마지막 얼굴은 기회의 평등입니다. 결과를 똑같이 만들 수는 없어도, 적어도 출발선만은 같게 하자는 것. 달리기 경주에서 누군가는 100미터 앞에서 출발하고 누군가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뛴다면, 그 경주의 결과는 의미가 없습니다. 기회의 평등은 "노력과 재능이 결과를 가르게 하되, 그 외의 우연한 조건은 가르지 못하게 하자"는 이상입니다.
문제는 "출발선"을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 맞춰야 하는가입니다. 태어난 가정의 부, 받은 교육, 물려받은 건강, 심지어 타고난 재능까지 우연이라면, 진정으로 공정한 출발선은 거의 손에 잡히지 않는 지점까지 후퇴합니다.
그래서 기회의 평등은 매혹적인 동시에 끝없이 까다로운 이상입니다. 어디까지 맞추느냐에 따라, 그것은 온건한 개혁이 되기도 하고 급진적 재분배가 되기도 합니다.
최후통첩 게임 — 인간은 손해를 보면서도 불공정을 응징한다
이 다섯 얼굴이 머릿속 추상이 아니라 우리 몸에 새겨진 본능이라는 것을, 한 유명한 실험이 보여 줍니다. 1982년 경제학자 베르너 귀트(Werner Güth)와 동료들이 처음 설계한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입니다.
규칙은 단순합니다. 두 사람에게 일정한 돈, 예컨대 10만 원을 줍니다. 한 사람(제안자)이 그 돈을 어떻게 나눌지 제안하고, 다른 사람(응답자)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면 제안대로 나눠 갖고, 거절하면 둘 다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최후통첩 게임
10만 원이 주어진다
제안자: "나 7만 원, 너 3만 원" 같은 분배를 제안
응답자: 수락 → 제안대로 분배
거절 → 둘 다 0원
순수 계산: 1원이라도 받는 게 0원보다 낫다 → 무엇이든 수락해야
실제 결과: 너무 적은 제안은 거절당한다
순수하게 이익만 따지는 존재라면, 응답자는 1원을 제안받아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1원이라도 0원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런데 전 세계 수많은 실험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대략 전체 금액의 20퍼센트 미만, 그러니까 "너 2만 원, 나 8만 원" 같은 제안이 들어오면 상당수의 응답자가 분노하며 거절합니다. 자기 돈 2만 원을 포기하면서까지 불공정한 제안자를 빈손으로 만드는 쪽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 결과가 충격적인 이유는, 인간이 단지 이득을 좇는 존재가 아니라 공정함 그 자체에 강한 감정적 가치를 둔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공정을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응징하려 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이타적 처벌"이라 부릅니다. 이런 처벌 성향이 있기에, 무임승차자나 약속을 어기는 자가 함부로 활개 치지 못하고 협력의 질서가 유지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불공정에 분노하는 우리의 비합리는, 길게 보면 공동체를 지탱하는 합리일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점은 문화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류학자 조지프 헨릭(Joseph Henrich)을 비롯한 연구진이 여러 소규모 사회를 대상으로 같은 게임을 진행했을 때, 어떤 사회에서는 절반을 제안하는 것이 표준이었고, 또 다른 사회에서는 시장 교환이 활발할수록 더 후한 제안이 나타났습니다. 공정 감각은 보편적 본능인 동시에, 그 구체적 기준은 문화가 빚어낸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감각이 인간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의 잘 알려진 실험에서, 같은 일을 하고도 한 원숭이는 오이를, 옆의 원숭이는 더 맛있는 포도를 받자, 오이를 받은 원숭이가 그것을 실험자에게 집어 던지며 항의하는 모습이 관찰되었습니다. 불평등에 대한 거부감의 뿌리가 우리 생각보다 깊은 진화의 층에 닿아 있을지 모른다는 암시입니다. 다만 동물 실험의 해석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므로, 이를 "원숭이도 정의를 안다"는 단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공정에 대한 민감성의 기원이 흥미로운 열린 질문임을 보여 주는 사례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공정은 머릿속 어디에 사는가
불공정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그 욱하는 감정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여러 뇌과학 연구는 불공정한 제안을 받을 때 감정과 혐오에 관여하는 뇌 영역이 활성화되는 경향을 보고해 왔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불공정을 머리로 계산하기 전에 몸으로 먼저 느끼는 듯합니다.
이는 왜 사람들이 최후통첩 게임에서 손해를 무릅쓰고 거절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 순간 우리 안에서는 "1원이라도 챙기라"는 계산과 "이 불공정을 용납할 수 없다"는 감정이 다투고, 종종 감정이 이깁니다. 공정에 대한 반응이 차분한 이성보다 뜨거운 직관에 더 가깝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신경과학적 발견을 "그러니 우리의 도덕은 그저 뇌의 화학작용일 뿐"이라는 식으로 환원해서는 안 됩니다. 느낌의 기제를 안다고 해서 그 느낌이 가리키는 가치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공정은 인간에게 한가한 철학적 사치가 아니라, 생존과 협력을 위해 깊이 새겨진 본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통찰이 나옵니다. 본능이 강한 만큼, 그것은 쉽게 흥분하고 쉽게 편향됩니다. 내가 손해 보는 쪽의 불공정은 뜨겁게 느끼면서, 내가 이득 보는 쪽의 불공정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공정을 진지하게 추구하려면, 본능을 신뢰하는 동시에 그 본능을 한 발 물러서서 점검하는 이성의 작업이 함께 필요합니다.
솔로몬의 재판 — 가장 오래된 공정 이야기
공정에 관한 인류의 고민은 실험실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가 솔로몬 왕의 재판입니다.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자, 왕은 칼을 가져오게 해 아기를 반으로 갈라 나눠 가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한 여인은 "차라리 저 여인에게 주십시오"라며 포기했고, 다른 여인은 "공평하게 둘로 나누라"고 했습니다. 왕은 아이를 살리려 한 여인이 진짜 어머니라고 판결합니다.
이 이야기가 수천 년을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공정의 두 얼굴을 정면으로 충돌시키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반으로"라는 기계적 평등은 표면적으로는 더없이 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평등이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파괴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공정이라 부르기를 주저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평등의 외형이 아니라 그 이면의 진실, 곧 누가 진정으로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가를 꿰뚫어 본 데 있습니다. 같은 "반으로 나누기"가 케이크 앞에서는 공정의 모범이었다가 아기 앞에서는 잔혹이 되는 이 역전이, 공정이 결코 단순한 산수가 아님을 말해 줍니다.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정 —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
지금까지 본 공정의 무대에는 늘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정은 시간을 가로질러서도 작동합니다. 우리가 오늘 내리는 결정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좌우합니다. 환경, 국가 부채, 자원의 고갈 같은 문제는 모두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 사이의 공정"이라는 어려운 물음을 품고 있습니다.
여기서 곤란한 점은, 미래 세대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의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자기 몫을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최후통첩 게임의 응답자와 달리, 그들은 불공정한 제안을 거부할 힘이 없습니다. 앞서 본 롤스의 무지의 베일은 이 문제에도 흥미로운 빛을 던집니다. 만약 우리가 "어느 세대에 태어날지" 모른 채 규칙을 정한다면, 미래를 함부로 저당 잡히는 선택을 쉽게 할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현재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이 먼 미래의 풍요로운 후손을 위하는 일보다 시급하다고 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 예컨대 멸종이나 기후 임계점은 세대 간 공정의 절대적 한계선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공정이라는 저울이 눈앞의 상대를 넘어 시간 너머의 얼굴 없는 이들에게까지 닿는 순간,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이 한층 더 깊은 시험대에 오른다는 사실입니다. 거절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공정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성숙한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분배의 공정과 절차의 공정 — 사람은 무엇에 더 분노하는가
여기서 한 가지 미묘한 구분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공정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눕니다. 무엇이 분배되었는가에 관한 "분배적 공정(distributive justice)"과, 그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에 관한 "절차적 공정(procedural justice)"입니다.
직장에서 연봉 협상을 떠올려 봅니다. 기대보다 적은 인상률을 받았다고 합시다. 만약 그 결정이 비밀스럽게, 설명 없이, 일관성 없는 기준으로 내려졌다면 우리는 두 배로 분노합니다.
그런데 같은 결과라도 투명한 기준과 합당한 설명, 그리고 의견을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받아들이는 마음이 사뭇 달라집니다. 똑같은 액수인데도, 어떻게 정해졌느냐에 따라 그것은 모욕이 되기도 하고 납득이 되기도 합니다.
심리학자 톰 타일러(Tom Tyler)의 오랜 연구는, 사람들이 종종 결과 그 자체보다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공정했는지에 더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반영될 기회가 있었는가, 결정권자가 편향 없이 일관되게 행동했는가, 자신이 존중받았는가. 이런 절차적 요소들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불리한 결과조차 더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발견은 실용적 함의가 큽니다. 우리는 흔히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공동체의 신뢰는 결과보다 과정의 공정함 위에서 자랍니다.
진 팀이 심판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리그가 지속되고,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납득될 때 납세가 유지됩니다. 결과는 한 번의 사건이지만, 절차에 대한 신뢰는 오래 쌓이고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무지의 베일 —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규칙을 정한다면
공정을 사고실험으로 풀어낸 가장 유명한 장면은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가 1971년 저서 정의론에서 제시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입니다.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여러분이 사회의 규칙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세금은 어떻게 매길지, 부는 어떻게 나눌지, 약자는 어떻게 보호할지 모두 여러분 손에 달렸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규칙이 적용될 사회에서 여러분이 누구로 태어날지 전혀 모릅니다. 부자일 수도 가난뱅이일 수도, 건강할 수도 병약할 수도, 다수자일 수도 소수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 베일 뒤에서라면 우리는 어떤 규칙을 고를까요. 롤스는, 자기가 가장 불리한 처지에 떨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들이 "가장 못한 처지의 사람에게도 견딜 만한" 사회를 선택하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로부터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끌어냅니다. 모두에게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할 것, 그리고 불평등이 허용되더라도 그것이 가장 불리한 이들에게 이익이 될 때만 정당화될 것. 두 번째 원칙은 흔히 "차등의 원칙"이라 불립니다. 불평등을 무조건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닥에 있는 이들의 처지를 끌어올리는 한에서만 받아들이겠다는, 평등과 효율 사이의 절묘한 타협입니다.
무지의 베일은 강력한 직관 펌프입니다. "내가 그 입장이라면"이라는 상상을 강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롤스의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베일 뒤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더 큰 보상을 노리는 도박을 택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비판자들은,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사고하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지 의문을 던집니다.
무지의 베일은 답을 강요하기보다, 공정을 고민할 때 우리가 얼마나 자기 처지에 매여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고실험의 힘은 분명합니다. 어떤 규칙을 옹호하기 전에 "내가 그 규칙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어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 — 빛과 그림자를 함께
이제 가장 뜨거운 논쟁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봅니다. 능력주의(meritocracy)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이 원리는 현대 사회가 가장 널리 공유하는 공정 관념일 것입니다. 출신이나 신분이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 얼마나 매력적인 약속입니까.
능력주의의 빛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세습 귀족제와 정실 인사에 맞서 등장한 진보적 이상이었습니다. 시험으로 관리를 뽑는 제도, 실적으로 승진을 결정하는 직장, 기록으로 순위를 가리는 스포츠.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누구의 자식인가"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많은 이에게 이것은 공정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능력주의에는 자주 간과되는 그림자도 있습니다.
첫째, "능력"이 정말 순수하게 개인의 것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좋은 교육, 안정된 가정, 건강, 인맥, 심지어 타고난 재능까지 — 우리가 "실력"이라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행운에 빚지고 있습니다.
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이를 두고, 성공한 사람이 "이건 온전히 내가 이룬 것"이라 믿는 순간 능력주의는 오만으로 기운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논리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향한 사회의 시선에도 그늘을 드리웁니다.
둘째, 능력주의가 만들어 내는 심리적 효과입니다. 만약 성공이 순전히 능력의 결과라면, 실패 역시 순전히 무능의 결과가 됩니다. 이 논리는 뒤처진 사람에게서 변명의 여지뿐 아니라 존엄까지 앗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한 반론도 탄탄합니다.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보상이 능력과 무관해지면 노력할 유인이 사라지고 사회 전체의 활력이 꺾인다고 말합니다. 운의 영향이 있다 해도, 그렇다고 능력과 노력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더 공정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출발선의 운"을 줄이려는 노력과 "능력에 따른 보상"을 인정하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에게 기회를 더 열어 주는 일과, 일단 같은 무대에 선 뒤에는 실력으로 겨루게 하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핵심 쟁점은 능력주의를 버리느냐가 아니라, 그 능력의 운적 요소를 얼마나 보정할 것인가에 있는 셈입니다.
할당과 적극적 조치 — 결과를 직접 손볼 것인가
능력주의 논쟁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에 또 하나의 첨예한 주제가 있습니다. 할당제, 그리고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입니다. 특정 집단이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을 때, 그 결과를 직접 조정하는 정책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 주제는 입장이 강하게 갈리므로, 양쪽의 논리를 가능한 한 공정하게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적극적 조치를 둘러싼 두 관점
찬성 측 논리
- 형식적 평등만으로는 누적된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다
- 출발선이 이미 기울어져 있다면, 절차만 같게 해선 공정하지 않다
- 다양성 자체가 조직과 사회에 가치를 더한다
- 대표성의 부재는 다음 세대의 기회까지 좁힌다
반대 측 논리
- 집단을 기준으로 한 우대는 개인을 집단으로 환원한다
- 능력에 따른 평가라는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
- 수혜 집단에 "실력이 아니라 혜택"이라는 낙인을 남길 수 있다
- 불리함은 집단보다 개인의 처지(예: 경제적 형편)로 봐야 한다는 견해
찬성하는 쪽은 형평의 얼굴을 강조합니다. 수백 년에 걸쳐 쌓인 구조적 격차는 "이제부터 모두 똑같이 대하겠다"는 선언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오히려 기존의 격차를 고착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이 함께할 때 조직과 사회가 더 풍부한 시야를 얻는다는 실용적 논거도 제시합니다.
반대하는 쪽은 평등과 능력의 얼굴을 강조합니다. 한 개인을 그가 속한 집단으로 환원해 우대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능력에 따른 평가라는 원칙이 흔들리면 사회의 신뢰 기반이 약해질 수 있고,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의도치 않은 낙인이 따를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일부는 불리함을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실제 처지, 예컨대 경제적 형편을 기준으로 보정하는 편이 더 공정하다고 제안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입장 모두 "공정"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한쪽은 형평과 기회의 실질화를 공정으로, 다른 한쪽은 평등한 대우와 능력 평가를 공정으로 봅니다. 앞서 본 다섯 얼굴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현장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래서 이 논쟁은 "누가 옳은가"보다 "우리는 어떤 공정을 우선할 것인가"라는 가치 선택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이 글은 그 선택을 대신 내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양쪽 모두가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쥐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는 것이, 더 나은 대화의 출발점이라고 믿습니다.
일상 속 공정 딜레마 — 다섯 얼굴이 부딪히는 순간들
거창한 정책 논쟁만 공정의 무대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작은 공정의 딜레마를 마주합니다. 몇 장면을 함께 들여다봅니다.
식당에서 친구 넷이 식사를 마쳤습니다. 한 명은 비싼 스테이크를, 한 명은 샐러드만 먹었습니다. 계산서를 어떻게 나눌까요. 정확히 4등분(평등)할 수도, 각자 먹은 만큼(형평) 낼 수도 있습니다. 둘 다 "공평"하지만 가리키는 얼굴이 다릅니다.
회사에서 팀 프로젝트가 성공해 보너스가 나왔습니다. 똑같이 나눌까요, 기여도에 따라 나눌까요. 기여도를 누가 어떻게 측정할까요. 측정이 불가능에 가깝다면, 차라리 똑같이 나누는 평등이 절차적으로 더 공정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두 아이를 키웁니다. 한 아이는 공부에, 한 아이는 운동에 재능이 있습니다. 두 아이에게 똑같은 학원비를 쓰는 것이 공평할까요, 각자의 재능에 맞게 다르게 쓰는 것이 공평할까요. 그리고 만약 한 아이가 아프다면, 필요의 원리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지 않을까요.
이 장면들의 공통점은, 정답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걸린 응급실에서는 필요가, 게임에서는 절차가, 작은 모임에서는 평등이, 누적된 격차 앞에서는 형평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성숙한 공정 감각이란 한 원리를 모든 곳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어떤 얼굴을 부르는지 읽어 내는 안목에 가깝습니다.
공정과 친절은 다르다
공정을 이야기할 때 흔히 빠지는 혼동이 하나 있습니다. 공정과 친절, 혹은 공정과 관용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친절은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더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반면 공정은 마땅히 누구의 몫인가를 따지는 일입니다. 친절은 한 방향의 베풂이지만, 공정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저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만 베푸는 친절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공정으로 비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만 몰래 추가 점수를 준다면, 그것은 그 학생에게는 친절일지언정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불공정입니다. 반대로, 규칙을 모두에게 똑같이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차갑게 느껴져도 공정할 수 있습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종종 "좋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과 "공정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친절하기 위해 공정을 양보해야 하고, 때로는 공정을 지키기 위해 친절을 거두어야 합니다. 둘 다 미덕이지만, 같은 미덕은 아닙니다. 성숙한 윤리적 감각은 이 둘을 구별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있습니다.
문화마다 다른 공정의 무게중심
공정의 본능은 보편적이지만, 어떤 얼굴에 더 무게를 두느냐는 문화와 사회마다 사뭇 다릅니다.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각 공동체가 오랜 시간 다듬어 온 강조점의 차이입니다.
어떤 사회는 평등을 가장 앞세웁니다. 작은 차이도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공동체에서는, 누군가 두드러지게 더 갖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회는 절차와 계약의 정당성을 중시하여, 정당하게 얻은 결과라면 큰 격차도 비교적 수월하게 받아들입니다.
또 어떤 문화는 필요와 관계를 깊이 고려합니다. 가족이나 공동체 안에서는 "각자 기여한 만큼"보다 "각자 처한 사정대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지요. 같은 사람도 직장에서는 형평을, 가정에서는 필요를, 낯선 이와의 거래에서는 절차를 끌어다 쓰는 식으로, 관계의 종류에 따라 다른 공정의 잣대를 꺼내 듭니다.
이 다양성이 말해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공정"이라는 단어 하나로 전 세계가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가정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기 시작합니다. 국제 협상이든 다문화 사회의 일상이든, 갈등의 밑바닥에는 종종 "무엇을 공정으로 보는가"의 차이가 깔려 있습니다. 상대가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얼굴을 공정의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발명한 공정 장치들
흥미롭게도 인류는 공정을 그저 바라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제하는 영리한 장치들을 발명해 왔습니다. 앞서 본 "한 사람이 자르고 다른 사람이 고르는" 케이크 규칙이 그 원형입니다. 몇 가지 더 살펴보면, 공정이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첫째, 추첨입니다. 고대 아테네는 많은 공직자를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로 뽑았습니다. 누구나 통치할 자격이 있다는 평등의 이상을, 또한 매수와 파벌을 무력화하는 절차의 힘을 동시에 담은 장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배심원을 무작위로 선정하는 제도에 그 정신이 살아 있습니다.
둘째, 블라인드 심사입니다. 20세기 후반 여러 교향악단이 연주자 오디션에서 지원자와 심사위원 사이에 가림막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연주하는지 보이지 않게 한 것이지요. 그러자 평가에서 외모나 선입견의 영향이 줄고, 오직 소리만으로 평가받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정보를 일부러 가림으로써 공정을 높인다는 점에서, 이는 무지의 베일의 현실판이라 할 만합니다.
셋째, 줄 서기와 선착순입니다. 너무 평범해 보이지만, 줄은 "먼저 온 사람이 먼저"라는 단순하고 검증 가능한 절차로 희소한 것을 분배하는 강력한 사회적 발명입니다. 지불 능력이나 지위가 아니라 시간과 인내라는, 누구에게나 비교적 평등한 자원으로 순서를 정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공정함을 지닙니다.
공정을 강제하는 장치들
분할-선택 :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이 마지막에 고른다
추첨 : 무작위로 뽑아 매수와 편향을 차단
블라인드 : 정보를 가려 선입견을 제거
선착순 : 시간과 인내라는 평등한 자원으로 순서 결정
이 장치들의 공통점은, 사람의 선의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르는 사람이 정직하기를 바라는 대신, 정직할 수밖에 없도록 규칙을 짭니다. 공정이 마음가짐의 문제이기 이전에 설계의 문제라는 통찰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세 갈래의 정의론 —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
공정의 다섯 얼굴이 일상의 직관이라면, 철학에는 그 직관들을 체계로 빚어낸 큰 줄기들이 있습니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자주 대비되는 세 갈래를,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나란히 소개합니다.
첫째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이 입장은, 어떤 분배가 공정한가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전체 행복의 총량으로 판단합니다. 사회 전체의 후생을 가장 크게 하는 선택이 옳다는 것입니다. 명료하고 실용적이지만,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되어도 총량만 크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이 오랜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둘째는 평등주의 계열, 특히 앞서 본 롤스의 정의론입니다. 롤스는 총량보다 분배의 방식에 주목하며, 가장 불리한 사람의 처지를 개선하지 못하는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공리주의가 "합"을 본다면, 롤스는 "가장 낮은 자리"를 봅니다.
셋째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입니다.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으로 대표되는 이 입장은, 결과의 분배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정당한 과정을 거쳐 얻어졌는가에 주목합니다. 정당하게 취득하고 자발적으로 교환한 결과라면, 그 분배가 아무리 불평등해도 부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절차의 정당성이지 결과의 균등함이 아닙니다.
세 갈래 정의론의 초점 비교
공리주의 : 전체 행복의 총량 — 합을 최대로
평등주의 : 가장 불리한 자의 처지 — 바닥을 끌어올림
자유지상 : 취득과 교환의 정당성 — 과정이 옳으면 결과를 인정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입장이 앞서 본 다섯 얼굴과 느슨하게 짝을 이룬다는 점입니다. 공리주의는 때로 필요와, 평등주의는 형평과, 자유지상주의는 절차와 가까이 섭니다. 어느 이론도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 상황에 따라 이 셋 사이를 오갑니다. 응급실에서는 필요를, 시장에서는 절차를, 복지 정책에서는 형평을 직관적으로 끌어다 쓰는 것이지요. 이 비일관성은 우리의 결함이라기보다, 공정이 본래 여러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의 자연스러운 반영일지도 모릅니다.
운과 책임 — 공정의 가장 깊은 매듭
공정을 끝까지 파고들면 결국 하나의 거대한 매듭에 도달합니다. 운과 책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은 그의 몫으로 인정하고, 우연히 얻은 것에는 다른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런데 노력하는 성향 자체가, 끈기와 집중력이, 심지어 "노력을 즐기는 기질"마저 상당 부분 타고난 것이라면 어떨까요.
철학자들은 이를 "도덕적 운(moral luck)"의 문제라 부릅니다. 같은 부주의로 운전해도 누군가는 무사히 집에 가고, 누군가는 갑자기 뛰어든 아이를 치게 됩니다. 두 사람의 선택과 성격은 같았지만 결과는, 그리고 우리가 묻는 책임은 전혀 다릅니다. 순전한 우연이 도덕적 평가를 가르는 것입니다.
이 매듭에 대한 태도도 갈립니다. 한쪽 끝에는, 모든 것이 결국 운이라면 누구도 자신의 성공을 온전히 자랑할 수 없고 실패를 온전히 책망받을 수도 없다는 "운 평등주의"의 직관이 있습니다. 다른 쪽 끝에는, 그렇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책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지고 인간의 주체성이 사라진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책임 있는 존재로 대하는 일상의 도덕은, 어느 정도는 운의 영향을 괄호 친 채 성립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도 이 글은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다만 공정을 묻다 보면 결국 "어디까지가 나의 것이고 어디부터가 운인가"라는, 답하기 어렵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닿게 된다는 사실을 함께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 그것이 어쩌면 공정에 관한 가장 성숙한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을 나누기
공정의 또 다른 난점은 측정의 문제입니다. 무언가를 공정하게 나누려면 먼저 그 무언가를 잴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나 케이크처럼 단위가 분명한 것은 그래도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측정이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여도를 생각해 봅니다. 어떤 프로젝트에서 한 사람은 밤새 코드를 짰고, 다른 사람은 결정적인 아이디어 하나를 냈으며, 또 다른 사람은 팀의 분위기를 지탱했습니다. 누구의 기여가 더 컸을까요. 시간으로 재면 첫 번째 사람이, 결과에 미친 영향으로 재면 두 번째 사람이, 보이지 않는 헌신으로 재면 세 번째 사람이 앞섭니다. 측정의 잣대를 바꾸는 순간 "공정한 분배"의 정답도 바뀝니다.
고통이나 필요는 더욱 어렵습니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아픈지, 누가 더 절실한지를 객관적으로 잴 수 있을까요. 의료 현장의 트리아지조차 완벽한 측정이 아니라 최선의 추정에 기댑니다. 측정이 불완전한 곳에서는, 어떤 공정의 얼굴을 택하든 약간의 자의성이 스며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난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겸손을 가르칩니다. 완벽하게 공정한 분배란 종종 측정의 한계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의 공정은 "완벽한 정답을 찾는 일"이라기보다, "측정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모두가 그 과정에 납득할 수 있는 절차를 함께 만드는 일"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다시 절차적 공정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무엇이 옳은 결과인지 합의할 수 없을 때, 적어도 어떻게 결정할지에는 합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퀴즈 — 당신은 어떤 얼굴을 고르나요
잠시 책을 덮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어떤 직관을 가졌는지 비춰 보는 거울입니다.
질문 하나. 무인도에 표류한 다섯 사람에게 물 다섯 병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탈수로 곧 쓰러질 지경이고, 나머지는 멀쩡합니다. 물을 어떻게 나누시겠습니까. 똑같이 한 병씩(평등)인가요, 위급한 사람에게 더(필요)인가요.
질문 둘. 시험 시간에 한 학생이 손을 다쳐 글씨를 쓰기 어렵습니다. 그에게만 시간을 더 주는 것은 공정한가요, 불공정한가요. 다른 학생들은 "특혜"라 느낄까요, 아니면 "당연한 배려"라 느낄까요.
질문 셋. 두 사람이 같은 복권을 샀고, 한 사람만 당첨됐습니다. 노력도 능력도 같았는데 결과는 운이 갈랐습니다. 당첨자가 상금을 온전히 갖는 것은 공정한가요. 만약 공정하다면, 우리가 "운"이라 부르는 다른 것들(타고난 재능, 좋은 부모)에서 비롯된 결과는 왜 다르게 보아야 할까요.
질문 넷. 한 회사에서 두 직원이 똑같은 성과를 냈습니다. 한 사람은 타고난 재능으로 쉽게, 다른 사람은 몇 배의 노력으로 간신히 그 성과에 이르렀습니다. 둘에게 똑같은 보상을 주는 것이 공정한가요, 아니면 더 애쓴 사람에게 더 주어야 공정한가요. 우리는 결과를 보상해야 할까요, 노력을 보상해야 할까요.
질문 다섯.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 앞에, 누군가 더 급한 사정이 있다며 끼어들려 합니다. 그 사정이 진짜라면 양보가 옳을까요. 그런데 그 사정이 진짜인지 누가 어떻게 확인하나요. 필요의 원리와 선착순의 원리가 부딪히는 이 흔한 장면에서, 당신은 어느 쪽에 서겠습니까.
이 질문들에 즉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상입니다. 공정은 단일한 공식이 아니라, 상황마다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다면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질문마다 다른 얼굴을 고르게 된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공정의 다면성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치며 — 여러 관점을 공정하게 대하는 일
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처음의 케이크로 돌아옵니다. "무엇이 공평한가"라는 질문에 단 하나의 답을 기대했다면, 이 글은 다소 불친절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공정에 관한 가장 정직한 진실은, 그것이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여러 얼굴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평등과 형평이, 필요와 능력이, 절차와 결과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정당함을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상대주의에 빠져 "다 옳으니 아무래도 좋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정의 얼굴이 여럿이라는 깨달음은 오히려 더 섬세한 판단을 요구합니다.
어떤 상황이 어떤 원리를 부르는지 읽고,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무게를 다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다른 공정 관념을 가진 사람을 단순히 "불공정한 사람"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공정을 둘러싼 다툼의 상당수는 악의가 아니라 강조점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한 사람은 평등을, 다른 사람은 형평을 공정이라 부르며 같은 단어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온도는 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할 거리를 남깁니다. "여러 관점을 공정하게 제시한다"는 이 글의 태도 자체도 하나의 공정관입니다. 어떤 입장에도 부당하게 무게를 싣지 않으려는 절차적 공정의 표현이지요.
완벽하게 중립적인 시선이 가능한지, 그리고 모든 입장을 똑같이 다루는 것이 언제나 옳은지는 또 다른 질문입니다. 명백한 부정의 앞에서 "양쪽 다 일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라 회피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균형이라는 미덕에도 분별이 필요합니다.
공정을 고민하는 일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거울이 됩니다. 다음에 누군가 "그건 불공평해"라고 말할 때, 혹은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싶어질 때, 잠시 멈추어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나는 다섯 얼굴 중 어떤 얼굴을 부르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앞의 상대는 또 어떤 얼굴을 보고 있는가.
참고 자료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Justice": https://plato.stanford.edu/entries/justice/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istributive Justice": https://plato.stanford.edu/entries/justice-distributive/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qualit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equality/
- Encyclopaedia Britannica, "John Rawls":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ohn-Rawls
- Encyclopaedia Britannica, "A Theory of Justice": https://www.britannica.com/topic/A-Theory-of-Justice
- Encyclopaedia Britannica, "Meritocracy": https://www.britannica.com/topic/meritocracy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Robert Nozick": https://plato.stanford.edu/entries/nozick-political/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oral Luck": https://plato.stanford.edu/entries/moral-luck/
- Henrich, J. et al., "In Search of Homo Economicus" (Ultimatum Game across cultures), American Economic Review: https://www.aeaweb.org/articles?id=10.1257/aer.91.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