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thors

- Name
- Youngju Kim
- @fjvbn20031
- 들어가며: 케이크 자르는 사람의 딜레마
- 서로를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인 두 사람
- 정의라는 오래된 질문
- 롤스: 무지의 베일 뒤에서
- 노직: 정의는 역사다
-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기
- 한 걸음 더: 센의 역량 접근
- 샌델의 비판: 두 사람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
- 하나의 사례로 깊이 들어가기: 상속세 논쟁
- 잠깐,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 흔한 오해 바로잡기
- 짧은 정리 퀴즈
- 오늘의 불평등에 적용하기
- 마치며: 다시 케이크 앞에서
- 생각할 거리
- 왜 이 오래된 논쟁이 지금도 중요한가
- 참고 자료
들어가며: 케이크 자르는 사람의 딜레마
아이 둘이 케이크 한 조각을 두고 다툽니다. 부모는 오래된 지혜를 꺼냅니다. "한 사람이 케이크를 자르고, 다른 사람이 먼저 고르렴." 자, 케이크를 자르는 아이는 칼을 어떻게 댈까요. 자기가 어느 쪽을 받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아이는 가능한 한 똑같이 자르려 애씁니다. 한쪽을 크게 잘랐다가는 상대가 그 큰 쪽을 가져갈 테니까요.
놀랍게도 이 단순한 식탁의 장면 안에, 20세기 정치철학의 가장 위대한 사고실험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내가 어느 자리에 놓일지 모른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규칙에 합의하게 될까." 바로 이 질문에서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이 출발합니다.
이 케이크 자르기의 지혜에는 한 가지 더 미묘한 면이 있습니다. 칼을 쥔 아이가 공정해지는 까닭은 그 아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아이는 자기 몫을 최대한 키우고 싶어 합니다. 다만 자기가 어느 쪽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좇는 바로 그 마음이 결과적으로 공정한 분배를 낳는 것입니다. 롤스의 천재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억지로 이타적으로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기 이익을 좇는 평범한 사람들조차 공정한 규칙에 합의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설계하려 했습니다. 도덕을 강요하는 대신 공정을 낳는 구조를 짜는 것, 이것이 그의 접근법의 핵심입니다.
조금 더 큰 무대로 옮겨 봅시다. 당신은 곧 태어날 참이지만, 아직 누구로 태어날지 모릅니다. 부유한 집안의 자녀일지, 가난한 가정의 아이일지, 건강한 몸을 가질지, 장애를 안고 살아갈지, 재능이 넘칠지, 평범할지 —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한 가지 임무가 주어집니다. 앞으로 모두가 살아갈 사회의 규칙을 직접 설계하라는 것입니다. 케이크를 자르는 아이처럼, 당신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밑바닥의 삶이 그리 비참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니까요.
그런데 같은 시대, 한 동료 철학자가 정반대 방향에서 손을 듭니다. "잠깐, 그 케이크는 도대체 누가 구웠는데." 같은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반격입니다. 노직은 물었습니다. 정의를 결과의 분배로만 따지는 것이 과연 옳은가. 사람들이 정당하게 얻은 것을 두고, 누군가 그 몫을 다시 나누라고 명령할 권리가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두 사람의 대결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한쪽은 평등을, 다른 한쪽은 자유를 정의의 핵심에 놓습니다. 그리고 이 오래된 긴장은 오늘날 부의 격차를 마주한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를 결론짓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닙니다. 다만 두 입장을 가능한 한 공정하게 펼쳐 보이고, 마지막 판단은 읽는 분의 몫으로 남겨 두려 합니다.
이 질문이 왜 그토록 강력한지 잠시 음미해 봅시다. 보통 우리는 규칙을 정할 때 이미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습니다. 부자는 자기가 부자임을 알고,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가난함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의 감각은 늘 자기 자리의 무게에 끌려다닙니다. 그런데 케이크 자르기의 지혜는 이 끌림을 끊어 내는 단순하면서도 절묘한 방법을 보여 줍니다. 자기 몫을 정하는 순간에 자기가 어느 쪽을 받을지 모르게 만드는 것, 그 하나의 장치만으로 이기심은 공정함으로 탈바꿈합니다. 롤스가 평생을 바쳐 다듬은 이론은, 따지고 보면 이 식탁의 작은 지혜를 사회 전체로 확장한 것입니다.
미리 한 가지를 약속해 두겠습니다. 정의에 관한 글은 자칫 한쪽 편을 들어 다른 쪽을 비웃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이 글은 그 유혹을 피하려 합니다. 롤스의 평등도, 노직의 자유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도덕적 직관에서 나왔습니다. 한쪽을 어리석거나 비정한 것으로 그리는 순간, 우리는 그 입장이 붙들고 있는 진실의 한 조각을 놓치게 됩니다. 좋은 정치철학 공부란, 자신과 가장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동안, 두 입장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양쪽 모두가 되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서로를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인 두 사람
이 대결에는 작은 일화 하나가 따라다닙니다. 롤스와 노직은 단지 같은 시대를 산 것이 아니라, 같은 하버드 철학과의 동료였습니다. 한 사람이 "정의론"으로 평등을 향한 거대한 체계를 세우자, 바로 옆방의 동료가 3년 뒤 그 체계를 정면으로 겨냥한 책을 내놓은 것입니다. 노직은 자신의 책 머리말에서, 롤스의 "정의론" 이후로는 정치철학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책과 대결하거나, 아니면 왜 대결하지 않는지를 해명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적이라기보다 서로를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인 두 지성의 풍경입니다.
이 점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작은 교훈을 줍니다. 가장 날카롭게 맞서는 두 입장이, 사실은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한 두 사람 사이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노직이 롤스를 진지하게 반박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롤스를 누구보다 꼼꼼히 읽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반대는 상대를 희화화하는 데서 나오지 않고, 상대의 가장 강한 논증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데서 나옵니다. 두 사람의 대결이 반세기가 지나도록 빛바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입니다. 롤스는 평생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강의에서 자기 이론을 비판하는 학생에게 오히려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노직은 반대로 번뜩이는 재기와 자유로운 사고로 유명했으며, 평생 한 가지 주제에만 머물지 않고 인식론, 합리성, 삶의 의미 같은 폭넓은 물음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두 사람의 대결이 매력적인 까닭은, 서로를 깎아내리기 위한 다툼이 아니라, 같은 물음을 두고 끝까지 진지하게 갈라선 정직한 견해 차이였기 때문입니다. 좋은 논쟁이란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몸소 보여 주었습니다.
정의라는 오래된 질문
정의(justice)는 가장 오래된 철학적 물음 중 하나입니다. 멀리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은 정의를 두고 각자가 자기에게 합당한 몫과 역할을 갖는 상태로 그렸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것이 정의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비례에 맞게 대우하는 것, 즉 합당한 차이는 인정하되 부당한 차별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고대의 통찰은 오늘까지도 메아리칩니다. "같은 것은 같게"라는 원칙은 차별 금지의 뿌리가 되었고,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원칙은 약자에 대한 배려나 누진적 대우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식에는 결정적인 빈칸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 "합당한 차이"이고 무엇이 "부당한 차별"인가를, 그 공식 자체는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재능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는 것은 합당한가, 아니면 부당한가. 태어난 집안에 따라 출발선이 갈리는 것은 어떤가. 바로 이 빈칸을 채우려는 시도가 근대 이후 분배 정의의 역사이며, 롤스와 노직은 그 빈칸을 정반대 방향으로 메운 두 사람입니다.
근대로 오면서 이 질문은 한층 날카로워집니다. 사회가 만들어 낸 부와 기회를,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나누는 것이 정의로운가. 누가 무엇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바로 이 "분배 정의(distributive justice)"의 문제가 롤스와 노직이 맞붙는 무대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 같은 대학에 몸담았으면서도 이 물음에 거의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 대결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각자의 그림을 차분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분배 정의가 근대에 들어 특별히 절박해진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전통 사회에서는 사람의 처지가 대체로 태어날 때 정해졌고, 그것을 신의 뜻이나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근대 사회는 신분의 사슬을 끊고, 부와 지위가 원리상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새로운 물음이 피할 수 없이 떠오릅니다. 더 이상 출생이 모든 것을 정하지 않는다면, 누가 무엇을 가질지를 무엇이 정해야 하는가. 능력인가, 노력인가, 필요인가, 아니면 운인가. 분배 정의의 논쟁은 바로 이 근대적 질문의 한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롤스가 맞선 상대: 공리주의
롤스의 정의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무엇을 반박하려 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가 평생 겨냥한 상대는 바로 공리주의(utilitarianism)였습니다.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로 대표되는 이 사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과 정치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어떤 정책이 옳은가는, 그것이 사회 전체의 만족과 행복의 총합을 얼마나 키우는가로 따진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는 매력적입니다. 명료하고, 계산 가능하며, 누구의 행복도 다른 누구의 행복보다 더 무겁게 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평등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롤스는 여기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행복의 총합만을 따지다 보면, 다수의 큰 이익을 위해 소수의 권리가 희생되는 상황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소수 집단을 심하게 억압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 총량을 크게 늘린다면, 공리주의의 계산법으로는 그것이 "옳은" 일이 되어 버립니다.
롤스가 특히 문제 삼은 것은, 공리주의가 "사람들 사이의 구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라면, 우리는 더 큰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작은 고통을 견디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사는 것을, 마치 한 개인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는 것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행복 저장고처럼 다루지만, 롤스가 보기에 각 개인은 결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저장고가 아닙니다.
롤스의 유명한 한마디가 이 비판을 압축합니다. "각 개인은 사회 전체의 복지라는 이름으로도 침해될 수 없는 정의에 기초한 불가침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사람은 전체의 행복을 위한 계산의 항목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롤스에게 정의는 효용의 합산이 아니라, 누구도 함부로 짓밟히지 않도록 보장하는 원칙의 문제였습니다. 이 출발점을 기억해 두면, 그가 왜 그토록 "가장 약한 사람"에 집착했는지가 한결 또렷해집니다.
롤스: 무지의 베일 뒤에서
원초적 입장이라는 무대
롤스가 등장하기 전, 영미권의 철학은 주로 언어와 논리의 분석에 몰두하느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가" 같은 큰 물음에서 다소 멀어져 있었습니다. 정치철학은 한때 죽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롤스의 "정의론"은 바로 그 침묵을 깨뜨린 책이었습니다. 그는 정의라는 거대한 물음을, 엄밀하면서도 누구나 따라갈 수 있는 논증으로 되살려 냈습니다. 이 책 이후로 정치철학은 다시 한번 살아 있는 학문이 되었고, 노직의 반박을 비롯한 수많은 논쟁이 그 주위에서 피어났습니다.
존 롤스는 1971년에 출간한 대작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으로 잠들어 있던 정치철학을 다시 깨웠습니다. 그는 한 가지 거대한 질문에 답하려 했습니다. 공정한 사회의 기본 원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가 고안한 것이 바로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가상의 상황입니다.
원초적 입장이란, 사회의 규칙을 처음부터 정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일종의 가상 회의실입니다. 단, 이 회의실에는 특별한 조건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쓰고 있어, 자신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성별, 인종, 재산, 재능, 종교, 사회적 지위, 심지어 어떤 가치관과 인생 계획을 가지게 될지조차 모릅니다. 그저 인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왜 이런 기묘한 장치가 필요할까요. 롤스의 통찰은 명료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규칙을 정하기 마련입니다. 부자는 세금이 낮은 사회를, 가난한 사람은 재분배가 후한 사회를 바랍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료 보장에 무관심하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그것이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어느 쪽인지 모른다면, 나는 어느 한쪽에 치우친 규칙을 함부로 고를 수 없습니다. 케이크를 자르는 아이가 한쪽으로 치우치게 자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무지의 베일은 이렇게 사적인 이해관계를 차단함으로써, 누구도 자기 처지를 유리하게 끼워 넣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장치의 또 다른 미덕은, 그것이 편견과 자기기만까지 걸러 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이익을 공정한 원칙인 양 포장하는 데 능합니다. 세금을 낮추고 싶은 마음을 "근면에 대한 보상"이라는 그럴듯한 언어로 꾸미고, 재분배를 바라는 마음을 "연대"라는 말로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무지의 베일 뒤에서는 이런 포장이 소용없어집니다. 내가 어느 자리에 설지 모르는 한, 나는 어느 특정한 처지를 위한 변명을 만들 동기 자체를 잃기 때문입니다. 롤스는 바로 이 점에서, 무지의 베일이 단순한 사고 장치를 넘어 일종의 도덕적 정화 장치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만약 네가 누구든 될 수 있다면, 그래도 이 규칙을 옳다고 말하겠는가.
롤스는 이런 조건에서 합의된 원칙이라면 비로소 "공정하다"고 부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의의 원칙은 공정한 절차를 통해 도출될 때 정당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은 직관을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무지의 베일이 노리는 것은 "내 자리를 알기 전에 규칙을 정한다"는 순서의 전환입니다. 보통 우리는 자기 처지를 안 뒤에 그에 맞는 규칙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롤스는 그 순서를 뒤집습니다. 자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규칙을 먼저 정하고, 그다음에 비로소 자리가 정해진다면, 우리는 어느 자리에 떨어져도 받아들일 만한 규칙을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케이크를 자르는 아이가 칼을 대기 전에는 자기 몫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 바로 그 "아직 모름"이 그 아이를 공정하게 만듭니다. 롤스의 천재성은 이 식탁의 지혜를 사회 전체의 설계 원리로 끌어올린 데 있습니다.
정의의 두 원칙
그렇다면 베일 뒤의 사람들은 어떤 원칙에 합의하게 될까요. 롤스는 그들이 다음 두 가지 원칙을 선택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첫째,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원칙"입니다. 모든 사람은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정치 참여의 자유, 투표권 같은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누려야 하며, 이 자유는 다른 무엇과도 함부로 맞바꿀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이자 가장 우선하는 원칙입니다. 풍요를 위해 자유를 거래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둘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할 때에만 허용됩니다. 하나는 "공정한 기회균등"입니다. 좋은 자리나 직책은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단지 형식적으로 문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재능과 의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출신 배경과 무관하게 비슷한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가 그 유명한 "차등원칙(difference principle)"입니다.
여기서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의 차이를 짚어 둘 만합니다. 어떤 사회가 "누구나 시험만 통과하면 이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선언한다면, 형식적으로는 기회가 평등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 아이는 좋은 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 되어 그 시험을 준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면, 그 평등은 종이 위의 평등일 뿐입니다. 롤스가 말하는 "공정한 기회균등"은 이 종이 위의 평등을 넘어섭니다. 그는 사람들이 실제로 경쟁의 출발선에 함께 설 수 있도록, 교육과 같은 조건을 사회가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형식의 평등에서 실질의 평등으로 나아가려는 이 한 걸음이, 롤스의 두 번째 원칙을 단순한 기회 개방보다 훨씬 묵직한 것으로 만듭니다.
롤스의 원칙들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분명한 우선순위를 가집니다. 아래는 그 구조를 정리한 것입니다.
제1원칙: 평등한 기본적 자유 (최우선)
제2원칙:
(a) 공정한 기회균등
(b) 차등원칙 — 불평등은 최약자에게 이익이 될 때만 허용
우선순위: 자유 > 기회 > 차등
이 우선순위는 중요합니다. 롤스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기본적 자유를 희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유가 먼저이고, 그다음이 기회의 평등이며, 분배의 불평등 문제는 그 뒤에 옵니다.
이 순서는 흔히 오해되는 또 하나의 지점입니다. 롤스를 두고 "빵을 위해 자유를 양보하자는 사상가"로 그리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롤스는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은 빵을 주는 대가로 그의 투표권이나 표현의 자유를 빼앗는 거래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워진다 해도, 기본적 자유가 흔들리는 사회는 그가 보기에 정의롭지 않습니다. 평등을 강조하는 사상가가 동시에 자유를 가장 앞자리에 놓았다는 사실은, 그의 이론을 단순한 평등주의로 환원할 수 없게 만듭니다.
차등원칙의 진짜 의미
차등원칙은 흔히 오해받습니다. 롤스는 "모두가 똑같이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불평등을 허용합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불평등이 정당화되려면, 그 불평등이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뛰어난 의사에게 높은 보수를 주는 제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분명 불평등을 낳습니다. 하지만 그 보상이 더 많은 유능한 사람을 의학의 길로 이끌고, 결과적으로 가난한 환자도 더 나은 치료를 받게 된다면, 이 불평등은 차등원칙의 시험을 통과합니다. 반대로 어떤 불평등이 오직 부자만을 더 부유하게 만들고 밑바닥의 삶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롤스의 관심은 언제나 "꼭대기"가 아니라 "바닥"에 있었습니다.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가장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불운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가입니다.
이 발상에는 한 가지 더 깊은 통찰이 깔려 있습니다. 롤스는 개인의 재능마저도 어떤 의미에서 "공동의 자산"으로 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니 조심스럽게 풀어 봅시다. 롤스가 말하려는 것은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서 그 재능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어떤 재능을 타고났는지는 순전히 운의 결과이므로, 그 운으로 얻은 열매를 온전히 나 혼자만의 몫으로 여기는 것은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롤스는, 재능 있는 사람이 자기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되 그 결실의 일부가 가장 불리한 사람들에게도 흘러가는 방식으로 사회를 설계하자고 제안합니다. 재능 있는 사람도 더 잘살고, 동시에 가장 약한 사람도 함께 나아지는 구조, 그것이 차등원칙이 그리는 그림입니다.
왜 가장 약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가
차등원칙의 밑바닥에는 흥미로운 선택의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 내가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떨어질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합리적 인간이라면, 어떤 도박을 하겠습니까.
롤스는 사람들이 "최악을 최선으로 만드는" 전략을 택하리라고 보았습니다. 영어로는 "맥시민(maximin)"이라 불리는 이 사고방식은, 여러 선택지가 있을 때 각 선택의 가장 나쁜 결과들을 비교하여, 그중 가장 덜 나쁜 것을 고르는 방식입니다. 어차피 내가 어느 처지로 떨어질지 모른다면, 최악의 자리가 그나마 견딜 만한 사회를 고르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전략이 합리적인 까닭은, 무지의 베일 뒤에서는 평범한 도박과 달리 한 가지 특별한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도박에서는 잃어도 다음 판이 있고, 손실을 만회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되는 것은 단 한 번뿐인 내 인생 전체입니다. 만약 내가 가장 낮은 자리에 떨어진다면, 그 삶을 다른 누군가와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돌이킬 수 없고 단 한 번뿐인 선택 앞에서는, 평균적인 기대값을 좇기보다 최악의 경우를 견딜 만하게 만드는 신중함이 더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잃어도 그만인 작은 내기와, 내 평생을 거는 단 한 번의 선택은 같은 무게로 다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이 논리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더 큰 평균적 풍요를 택하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롤스가 받은 대표적인 비판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판자들은 묻습니다. 왜 베일 뒤의 사람이 그토록 위험을 꺼리는 보수적 선택을 한다고 가정하는가. 어떤 합리적인 사람은 최악의 자리에 떨어질 확률이 낮다고 보고, 평균적으로 더 풍요로운 사회에 기꺼이 베팅할 수도 있지 않은가. 롤스의 맥시민 논증이 성립하려면, 사람들이 위험에 대해 상당히 신중하다는 특정한 가정이 필요합니다. 이 가정이 얼마나 정당한가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이 지점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롤스의 핵심은, 운으로 주어진 출발선의 차이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직관에 있습니다. 내가 어떤 재능을 타고날지,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날지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롤스는 이 우연의 산물을 "도덕적 관점에서 자의적인 것"이라 부르며, 사회가 그 우연의 불운을 어느 정도 보정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타고난 행운으로 얻은 몫을 전부 개인의 정당한 소유로만 돌리는 것은, 롤스가 보기에 도덕적으로 설득력이 약합니다.
노직: 정의는 역사다
"케이크를 누가 구웠나"
롤스의 정의론이 출간되고 3년 뒤인 1974년, 같은 하버드의 동료 로버트 노직은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라는 책으로 정면 반박합니다. 노직의 출발점은 롤스와 정반대입니다. 그는 정의를 결과의 "분배 상태"로 평가하는 발상 자체에 의문을 던집니다.
노직이 보기에,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지 아닌지는 부가 어떻게 "나뉘어 있는가"라는 최종 상태를 보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재산이 골고루 퍼진 두 사회가 있어도, 하나는 정당한 거래와 노동으로 그렇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약탈과 강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둘은 결코 같은 정의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분배 모양"이 아니라 "그 분배에 이르게 된 역사적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케이크가 어떻게 잘렸느냐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케이크를 누가 구웠고 누가 재료를 댔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노직의 "소유권리론(entitlement theory)" 혹은 절차적 정의관의 핵심입니다.
노직은 자신과 같은 정의관을 "역사적(historical)" 원리라 부르고, 롤스처럼 분배의 최종 모양을 보고 판단하는 정의관을 "정형적(patterned)" 원리라 불러 구분합니다. 정형적 원리란, "각자에게 그의 필요에 따라" 혹은 "각자에게 그의 공헌에 따라"처럼, 어떤 특정한 기준에 맞추어 분배의 모양을 정해 두는 원리를 말합니다. 노직이 보기에 이런 원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한 그 정해진 모양은 끊임없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그 모양을 유지하려면 자유에 끊임없이 손을 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역사적 원리는 분배의 모양을 미리 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각 단계가 정당했는지만 묻고, 그 결과로 어떤 모양이 나오든 받아들입니다. 이 구분은 노직의 비판이 단지 롤스 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분배의 모양을 정해 두려는 모든 정의관을 향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소유권리의 세 원칙
노직은 정당한 소유를 판단하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간결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취득의 정의 :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을 처음에 정당하게 손에 넣었는가
2. 이전의 정의 : 정당하게 소유한 것을 자발적 거래나 증여로 정당하게 옮겼는가
3. 교정의 정의 : 과거의 부당한 취득이나 강제 이전은 바로잡아야 한다
첫째, "취득의 정의"입니다.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을 처음으로 정당하게 손에 넣는 방식에 관한 원칙입니다. 둘째, "이전의 정의"입니다. 정당하게 소유한 것을 자발적인 거래나 증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방식에 관한 원칙입니다. 셋째, "교정의 정의"입니다. 만약 과거에 부당한 취득이나 강제적 이전이 있었다면, 그 잘못을 바로잡는 방식에 관한 원칙입니다.
세 번째 원칙인 교정의 정의는, 흔히 노직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놓치기 쉬운 강력한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현실의 어떤 사회도 그 부의 역사가 완벽하게 깨끗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정복, 약탈, 강제 수용, 불공정한 제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노직의 논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이 과거의 부정의가 현재의 소유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한, 교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자유지상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노직의 이론이, 과거의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광범위한 재분배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노직 자신도 이 점을 인정하며, 교정의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이 세 원칙이 결론으로 말하는 바는 간결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취득과 정당한 이전을 거쳐 무언가를 손에 넣었다면, 그는 그것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리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분배는, 그 모양이 아무리 불평등해 보일지라도 정의롭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평등해 보이는 분배라도 그 과정에 부당함이 끼어 있었다면 정의롭지 않습니다.
첫 번째 원칙인 취득의 정의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물음을 품고 있습니다.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닌 자연의 일부를 처음으로 내 것이라 선언하는 일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노직은 여기서 영국 철학자 존 로크의 발상을 끌어옵니다. 로크는 사람이 자연에 자기 노동을 섞으면 그것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단서를 달았는데, 흔히 "로크적 단서(Lockean proviso)"라 불립니다. 무언가를 처음 가질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그리고 좋은 것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즉, 내가 무언가를 차지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처지가 더 나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노직은 이 단서를 자기 방식으로 다듬어 받아들였습니다. 이 단서가 중요한 까닭은, 노직의 이론조차 무한정한 사적 취득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취득이 다른 이들의 삶을 명백히 더 나쁘게 만든다면, 그 취득의 정당성은 흔들립니다.
윌트 체임벌린 논증
노직의 가장 유명한 사고실험은 농구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이 논증은 추상적인 분배 원리를 단숨에 구체적인 장면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에서 특히 힘이 있습니다. 노직은 당대 최고의 농구 스타를 예로 들어 이렇게 묻습니다.
처음에 당신이 가장 정의롭다고 믿는 어떤 분배 상태가 있다고 합시다.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가진 완벽한 평등의 상태여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이 농구 스타의 경기를 보고 싶어 합니다. 입장권을 살 때마다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약간의 돈을 따로 떼어 그 선수에게 건넵니다. 한 시즌이 끝나면 수많은 관객의 작은 동전들이 모여, 그 선수는 다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돈을 손에 쥐게 됩니다.
자, 이제 처음의 완벽한 평등은 깨졌습니다. 노직은 묻습니다. 이 새로운 불평등은 부당한가. 만약 부당하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관객들이 자기 돈을 자발적으로 그 선수에게 건넨 행위를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기가 정당하게 가진 돈을 자기가 원하는 곳에 쓰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노직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어떤 특정한 분배 모양을 계속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사람들의 자발적 거래에 개입하고 그 결과를 되돌려야 한다. 정형화된 분배 원칙은 결국 자유에 대한 지속적인 간섭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논증의 힘은, 그것이 평등을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노직은 평등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어떤 평등한 상태에서 출발하더라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한 그 평등은 곧 흐트러진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평등을 계속 붙들어 두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돈을 자기 뜻대로 쓰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노직은 묻습니다. 그것이 과연 우리가 치르고 싶은 대가인가. 물론 롤스의 편에 선 사람은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 관객들이 애초에 어떻게 그 돈을 갖게 되었는가, 출발선 자체가 공정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만약 출발선이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면, 그 위에서 이루어진 "자발적" 거래도 온전히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반박은 농구 선수 논증을 무너뜨리지는 못하지만, 그 논증이 전제하는 "깨끗한 출발선"이 현실에서 얼마나 드문지를 일깨워 줍니다.
재분배와 강제 노동
노직은 한발 더 나아가 도발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는 노동의 결과를 세금으로 거두어 재분배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강제 노동과 닮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한 시간을 일해 번 돈의 일부를 국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거두어 간다면, 그것은 내 한 시간의 노동을 타인을 위해 강제로 징발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이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고, 노직 자신도 훗날 자신의 초기 입장 가운데 일부를 누그러뜨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직관은 강력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 노동의 결과에 대해 일차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 그리고 그 권리를 좋은 목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노직에게 개인은 결코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국가의 역할도 최소한으로 좁힙니다. 국가는 폭력과 절도, 사기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계약의 이행을 돕는 데 그쳐야 하며, 그 이상으로 부를 재분배하려 드는 순간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최소국가" 구상입니다.
자기 소유라는 출발점
노직의 모든 주장은 하나의 깊은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바로 "자기 소유(self-ownership)"라는 생각입니다. 사람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자기 몸과 재능, 그리고 그것으로 일군 노동의 성과에 대해 일차적이고 강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 내 노동의 결과를 내 동의 없이 거두어 가는 일은 곧 나의 일부를 거두어 가는 일처럼 무겁게 다가옵니다.
노직이 칸트의 한 통찰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만합니다. 칸트는 사람을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대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목적 그 자체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노직은 이 정신을 정치에 적용합니다. 누군가의 권리를 더 큰 사회적 선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시키는 것은, 그 사람을 타인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환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지점에서 노직과 롤스는 뜻밖의 공통점을 가집니다. 두 사람 모두 공리주의를 거부하며, 개인이 전체의 행복을 위한 계산 항목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 불가침성을 지키는 방식에서 두 사람은 정반대 길로 갈라집니다. 롤스는 공정한 분배 구조로, 노직은 침해되지 않는 개인의 권리로 그 존엄을 지키려 했습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기
이제 두 입장의 차이를 한눈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래 표는 롤스와 노직의 핵심을 마주 세운 것입니다.
| 쟁점 | 롤스 | 노직 |
|---|---|---|
| 정의의 초점 | 분배의 결과와 구조 | 소유에 이르는 과정과 절차 |
| 핵심 가치 | 공정과 평등 | 개인의 자유와 권리 |
| 대표 장치 | 무지의 베일, 원초적 입장 | 소유권리론, 농구 선수 논증 |
| 불평등을 보는 눈 | 가장 약한 자에게 이로울 때만 허용 | 과정이 정당하면 결과가 불평등해도 허용 |
| 국가의 역할 | 재분배를 통한 공정 보장 | 최소국가, 권리 보호에 한정 |
| 세금 재분배 | 정의가 요구하는 것 | 강제 노동에 가까운 것 |
| 운에 대한 태도 | 우연한 불운은 사회가 보정해야 함 | 정당히 얻은 것은 운이라도 본인 몫 |
| 출간된 대표작 | 정의론, 1971 |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 1974 |
이 표를 보면 두 사람이 같은 단어 "정의"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롤스에게 정의란 결과가 충분히 공정한 상태이고, 노직에게 정의란 과정이 충분히 정당한 흐름입니다. 한쪽은 사회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 구조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묻고, 다른 한쪽은 개인의 어깨 위에서 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았는지를 묻습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롤스의 정의는 한 폭의 풍경화를 평가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그 구도가 조화로운지, 어두운 구석이 너무 비참하지는 않은지를 따집니다. 반면 노직의 정의는 그 그림을 그린 붓질 하나하나를 추적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각 붓질이 정당한 손에서 나왔는지를 묻고, 모든 붓질이 정당했다면 그 결과로 어떤 그림이 나오든 받아들입니다. 완성된 그림을 보느냐, 붓질의 역사를 보느냐. 같은 캔버스를 두고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곳에 눈을 둡니다.
결국 두 사람의 대결은 가치의 우선순위 다툼입니다. 롤스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노직은 "자유로서의 정의"를 말합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는 이 글이 답할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두 직관이 모두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약자가 방치되는 것도 불편해하고, 정당하게 번 것을 함부로 빼앗기는 것도 부당하게 느낍니다. 정의에 관한 논쟁이 이토록 오래 이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덧붙일 점은, 두 사람이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의 무게가 사뭇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노직에게 자유는 무엇보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 즉 내 권리의 영역에 누구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자유입니다. 반면 롤스에게도 자유는 소중하지만, 그는 형식적인 자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롤스는 자유가 실제로 의미를 가지려면, 그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단어를 두고도 두 사람이 다른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알아 두면, 두 이론이 왜 끝내 만나지 못하는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한 걸음 더: 센의 역량 접근
롤스와 노직의 대결을 지켜본 또 다른 중요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그는 롤스를 깊이 존경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지점에서 그를 넘어서려 했습니다.
센의 출발점은 한 가지 단순한 관찰입니다. 우리가 자원을 원하는 것은 자원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그 자체로는 종잇조각이지만, 그것으로 음식을 사고 병을 고치고 배움을 얻을 수 있기에 가치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정의가 정말로 신경 써야 할 것은 사람들이 손에 쥔 자원의 양이 아니라, 그 자원이 실제로 열어 주는 삶의 가능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센은 바로 이 지점에서 롤스를 넘어서려 합니다.
센은 묻습니다. 롤스가 분배하려는 것이 과연 옳은 대상인가. 롤스는 "기본재(primary goods)" — 소득, 부, 기회, 권리처럼 누구나 자기 인생 계획을 위해 필요로 하는 자원 — 가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센은 여기에 빈틈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양의 자원이라도, 사람마다 그것을 실제 삶의 가치로 바꾸는 능력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똑같은 양의 식량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도, 한 사람은 건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중병을 앓고 있다면, 같은 식량이 두 사람에게 같은 영양과 삶의 질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똑같은 자전거를 주어도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그것으로 이동의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센은 "자원을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그의 "역량 접근(capability approach)"입니다.
이 관점은 우리가 흔히 놓치는 불평등의 한 형태를 드러냅니다. 두 사람에게 똑같은 것을 주는 것이 늘 공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자원으로 같은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장애, 질병, 차별, 혹은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환경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라면, 단지 똑같이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마다 다른 조건을 헤아려 실제로 비슷한 삶의 가능성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센의 역량 접근은 "형식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 평등"으로 나아가려는 또 하나의 길을 보여 줍니다.
역량 접근은 정의의 평가 기준을 자원의 분배에서 실질적 자유의 분배로 옮겨 놓습니다. 좋은 사회란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 — 건강하게 지내고, 교육받고, 공동체에 참여하고, 존엄을 지킬 능력 — 을 폭넓게 보장하는 사회입니다. 센의 이 발상은 훗날 유엔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에 영향을 주었고,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었습니다. 롤스가 열어 놓은 길 위에서, 정의 논의가 어떻게 한 걸음 더 나아갔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센의 관점이 흥미로운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롤스와 노직의 대립 구도를 살짝 비껴가기 때문입니다. 센은 "결과냐 과정이냐"라는 익숙한 갈림길에 서는 대신, 아예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진짜로 신경 써야 할 것은 사람들이 가진 자원의 양도, 그 자원을 얻은 절차도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누리는 삶의 가능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추상적인 분배 논쟁이 한층 구체적인 인간의 삶으로 내려옵니다. 어떤 사람이 형식적으로는 많은 권리와 약간의 소득을 가졌어도, 병이나 차별이나 무지 때문에 그 무엇도 실제로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회를 정의롭다 부르기 어렵습니다. 센의 목소리는 정의의 무대에 "실제 삶의 결"이라는 차원을 더해 줍니다.
샌델의 비판: 두 사람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
흥미롭게도, 롤스와 노직의 대결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며 양쪽 모두에 의문을 제기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입니다. 그의 강의를 묶은 책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는 전 세계에서 널리 읽혔고,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샌델은 롤스를 깊이 존중하면서도 중요한 비판을 던집니다. 그가 보기에, 무지의 베일 뒤에 선 인간은 자신의 모든 구체적 정체성을 벗어던진, 이를테면 "부담을 지지 않은 자아"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가족, 공동체, 역사,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존재입니다. 나의 가치관과 책임은 내가 속한 공동체와 떼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정의를 논하면서 그 모든 구체적 정체성을 일부러 비워 둔다면, 그렇게 도출된 원칙은 실제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노직에게도 묻습니다. 정말로 "내 재능은 온전히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뛰어난 운동선수의 재능은 그가 노력해 갈고닦은 부분도 있지만, 우연히 타고난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재능을 값지게 만들어 주는 사회가 있기에 비로소 가치를 가집니다. 농구가 인기 없는 사회에서라면 같은 재능도 큰 보상을 낳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상을 온전히 개인 몫으로만 돌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것이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문제 제기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드러납니다. 재능이 사회 덕분에 비로소 값어치를 가진다는 이 통찰은, 사실 롤스와도 노직과도 미묘하게 어긋납니다. 롤스는 재능을 운의 산물로 보아 그 열매를 어느 정도 공유하자고 했지만, 샌델이 강조하는 것은 운보다 공동체입니다. 즉 내 재능이 빛나는 것은 그것을 알아보고 값을 매겨 주는 특정한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나는 그 공동체에 일정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직처럼 "내 재능은 온전히 내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그 재능의 값어치 자체가 이미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샌델의 이 지적은, 우리가 흔히 "순전히 내 힘으로 이루었다"고 믿는 성취조차, 알고 보면 무수한 사회적 조건의 도움 위에 서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부담을 지지 않은 자아"라는 표현을 조금 더 풀어 봅시다. 샌델이 보기에 우리는 백지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 추상적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어떤 나라의 시민이며, 특정한 종교나 전통의 상속자입니다. 이런 소속은 단지 우리에게 우연히 붙은 장식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루는 본질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무지의 베일은 바로 이 소속과 정체성을 모두 벗겨 낸 자아를 상상하라고 요구합니다. 샌델은 묻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벗겨 낸 자아가 과연 진짜 인간일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가상의 인간이 합의한 원칙이, 구체적인 소속 속에서 살아가는 실제 인간에게 정말로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는가.
샌델의 더 근본적인 비판은 롤스와 노직이 공유하는 한 가지 전제를 겨냥합니다. 두 사람 모두 정의를 논할 때, 사람들이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 여기는지에 관한 판단을 일부러 비워 둡니다. 롤스의 무지의 베일은 각자의 가치관을 가린 채 원칙을 정하게 하고, 노직의 절차적 정의 또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든 그 거래만 자발적이면 정당하다고 봅니다. 두 사람 모두 "좋음(the good)"에 관한 판단을 옆으로 밀어 두고 "옳음(the right)"의 틀만 짜려 한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정의가 결국 좋은 삶에 관한 공동체의 논의, 그리고 미덕과 공동선에 관한 물음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롤스의 옹호자들은 반론을 폅니다. 다원적인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좋은 삶에 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의의 원칙은 특정한 가치관에 기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좋은 삶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어느 쪽 손을 들어 줄지는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샌델의 질문이 정의 논쟁의 무대를 한층 넓혀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샌델의 비판은 정의를 보는 시야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롤스와 노직이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혹은 "어떤 권리를 지킬 것인가"를 물었다면, 샌델은 그 앞에 "우리는 함께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 여기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을 놓습니다. 그에게 정의는 차가운 분배의 공식이 아니라, 한 공동체가 무엇을 명예롭게 여기고 무엇에 보상해야 하는지를 함께 토론하는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민들이 서로의 가치관에 관해 진지하게 대화하기를 피하는 사회는 정의에 가까워지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입장에는 늘 따라오는 위험이 있습니다. 누구의 좋은 삶을 공동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그리고 소수의 가치관이 다수의 이름으로 짓눌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샌델은 이 위험을 모르지 않으며, 바로 그렇기에 그가 강조하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대화 그 자체입니다.
하나의 사례로 깊이 들어가기: 상속세 논쟁
추상적인 두 이론을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 위에 나란히 올려놓으면, 그 차이가 한층 또렷해집니다. 오랫동안 뜨겁게 논쟁되어 온 주제 하나를 골라 봅시다. 바로 상속세입니다. 한 사람이 평생 모은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줄 때, 국가가 그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는 것은 정의로운가. 양쪽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공정하게 들어 봅시다.
먼저 무지의 베일 뒤에 선 롤스의 시선입니다. 베일을 쓴 당신은 자신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집안의 자녀로 태어날지,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할 집안의 자녀로 태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이 무지의 상태에서 당신은 어떤 상속 규칙에 합의하겠습니까. 롤스의 논리를 따르면, 부모의 부가 자녀의 출발선을 통째로 결정짓는 사회는 "공정한 기회균등"이라는 두 번째 원칙과 충돌합니다. 비슷한 재능과 의욕을 가진 두 아이가, 단지 누구의 자녀로 태어났는가 때문에 전혀 다른 출발선에 선다면, 기회는 형식적으로만 평등할 뿐 실질적으로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롤스적 관점은 상속세를, 출발선의 격차를 어느 정도 완화하고 그 재원으로 모두의 기회를 넓히는 정당한 장치로 봅니다. 다만 롤스 자신도 자유를 앞세웠으므로, 상속세가 가족의 기본적 자유를 짓밟는 수준까지 가도 좋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노직의 시선으로 같은 장면을 봅시다. 부모의 재산이 정당한 취득과 정당한 거래의 사슬을 거쳐 쌓인 것이라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것은 부모의 정당한 소유물입니다. 자기 소유물을 누구에게 줄지는 소유자가 자유롭게 정할 권리입니다. 부모가 그 재산을 자녀에게 증여하는 것은 노직의 "이전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 자발적 이전입니다. 그렇다면 국가가 그 이전에 끼어들어 일부를 세금으로 거두는 것은, 정당한 소유권과 자발적 증여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됩니다. 노직의 농구 선수 논증이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합니다. 자유로운 사람들의 자발적 이전을 막거나 되돌리지 않고서는, 평등한 출발선이라는 분배 모양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직의 틀 안에서도 한 가지 까다로운 물음이 남습니다. 그 재산은 정말로 깨끗한 절차로만 쌓인 것일까요. 만약 과거 어딘가에 부당한 강제나 불공정한 제도가 끼어 있었다면, 노직 자신의 "교정의 정의"가 작동하여 그 부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립니다. 그리고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녀는 스스로 아무런 취득이나 노동을 하지 않은 채 막대한 부를 손에 넣습니다. 노직의 이론은 "정당하게 받은 것"에 대한 권리를 강하게 옹호하지만, 받는 쪽이 그 부에 대해 어떤 도덕적 기여를 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두 직관이 가장 날카롭게 갈리는 곳입니다.
이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은, 어느 한쪽이 명백히 옳다는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대부분이 두 직관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고 정당하게 느낍니다. 동시에, 태어난 집안만으로 인생의 출발선이 통째로 갈리는 사회를 공정하다고 부르기도 망설입니다. 좋은 제도란 어쩌면 이 두 마음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상속세를 두고도 그 안에서 다시 무수한 선택지가 갈린다는 점입니다. 작은 유산까지 모두 과세할 것인가, 일정 규모를 넘는 큰 부에만 과세할 것인가. 거둔 세금을 단순히 국고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아이의 교육이나 출발 자금처럼 기회를 넓히는 데 쓸 것인가. 롤스의 직관은 후자 — 큰 부에 대한 과세, 그리고 그 재원을 기회 확대에 쓰는 방향 — 와 더 잘 어울립니다. 그래야 그 세금이 단지 부를 거두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약한 사람의 출발선을 실제로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반면 노직의 직관에 충실하려는 사람이라도, 과거의 부가 모두 깨끗한 절차로 쌓였는지를 진지하게 묻는다면, 일률적인 거부보다 더 섬세한 입장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구체적 정책을 깊이 들여다보면, 추상적인 두 이론이 현실의 무수한 설계 선택으로 번역되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잠깐,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본격적인 정리에 앞서, 가볍게 자신의 직관을 시험해 봅시다. 정답이 정해진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각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 당신이 어느 직관에 더 기대고 있는지를 비춰 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미리 일러둘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첫 질문에서는 롤스 쪽에, 다음 질문에서는 노직 쪽에 마음이 기우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두 직관이 모두 살아 있으며, 어느 직관이 깨어나는가는 어떤 장면을 떠올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관된 답을 억지로 짜내려 하기보다, 어떤 질문에서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정직하게 살펴보십시오.
[ 직관 점검 ]
질문 1. 무지의 베일을 쓴 당신은, 상위 소수가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에 선뜻 합의하겠습니까?
질문 2. 자발적으로 돈을 건넨 관객들 덕분에 부자가 된 농구 선수에게
세금을 매기는 것은, 정의로운 재분배일까요, 자유의 침해일까요?
질문 3. 내 재능과 노력의 열매는 온전히 내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와 운에 일부 빚진 것일까요?
질문 1에서 선뜻 합의하기 망설여진다면, 당신 안에는 롤스적 직관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질문 2에서 그 세금이 자유의 침해처럼 느껴진다면, 노직적 직관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질문 3에서 잠시 멈칫했다면, 샌델이 던진 물음이 당신에게도 닿은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사람이라도 자기가 처한 상황을 바꾸어 상상하면 답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막대한 재산을 정직하게 일군 사업가라면, 질문 2의 세금이 한층 더 부당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반대로 당신이 큰 병을 앓아 본 적이 있거나 가까운 이의 가난을 지켜본 적이 있다면, 질문 1에서 더 깊이 망설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정의 감각은 추상적인 원리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구체적인 삶의 결에서도 길어 올려집니다. 바로 그렇기에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이 더욱 값집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잠시 자기 삶의 자리를 벗어나 다른 누구의 자리에서도 생각해 보라고 권하기 때문입니다.
흔한 오해 바로잡기
정의론은 강의실 바깥에서 자주 단순화되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오해가 굳어집니다. 가장 흔한 것들을 짚어 두면, 두 이론을 한층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롤스는 모두가 똑같이 가지는 평등한 사회를 주장했다"는 오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롤스는 불평등을 분명히 허용합니다. 다만 그 불평등이 가장 약한 사람에게도 이로울 때에만 허용한다는 조건을 달 뿐입니다. 그의 목표는 똑같은 결과가 아니라,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의 기준입니다.
둘째, "노직은 약자에게 무관심한 냉정한 사상가다"라는 오해입니다. 노직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발적인 기부와 연대를 존중했고, 오히려 권장했습니다. 그가 거부한 것은 국가가 강제로 거두어 재분배하는 방식이지, 도움 그 자체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약자를 도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도울 것인가"에 더 가깝습니다.
셋째, "무지의 베일은 실제로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상황이다"라는 오해입니다. 원초적 입장은 역사 속에 실재했던 사건이 아니라, 정의의 원칙을 시험하기 위한 사고실험입니다. 롤스가 묻는 것은 "지금 당장 회의장을 열자"가 아니라, "공정한 조건에서라면 우리가 어떤 원칙에 합의할 것인가"라는 가정적인 물음입니다.
넷째, "노직의 이론은 어떤 부의 격차든 무조건 정당화한다"는 오해입니다. 노직의 정의는 과정의 정당성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그 부가 약탈, 사기, 부당한 강제를 통해 형성되었다면, "교정의 정의"에 따라 그것은 정당하지 않으며 바로잡혀야 합니다. 노직의 틀은 현실의 부가 정말 깨끗한 절차로만 쌓였는지를 따져 묻는 무거운 과제를 오히려 우리에게 안깁니다.
다섯째, "롤스와 노직은 서로 으르렁대는 적이었다"는 오해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인 동료였습니다. 노직은 롤스의 책을 정치철학의 한 분수령으로 인정하며 그것과의 대결을 자기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두 이론의 가치는 한쪽이 다른 쪽을 이겼다는 데 있지 않고, 둘이 함께 정의라는 물음의 두 극단을 또렷하게 밝혀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 두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됩니다.
짧은 정리 퀴즈
이번에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점검해 봅시다. 아래 일곱 문제를 먼저 스스로 답해 본 뒤, 그 아래의 풀이를 확인해 보십시오.
[ 정의론 퀴즈 ]
문제 1. 무지의 베일 뒤에 있는 사람은 자신에 관해 무엇을 모르는가?
문제 2. 롤스의 차등원칙은 불평등을 어떤 조건에서 허용하는가?
문제 3. 노직의 소유권리론에서 분배의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결과인가, 과정인가?
문제 4. 노직의 농구 선수 논증이 보여주려는 핵심 주장은 무엇인가?
문제 5. 마이클 샌델은 롤스와 노직이 공유하는 어떤 전제를
비판하는가?
문제 6. 롤스가 평생에 걸쳐 반박하려 한 사상은 무엇이며,
그가 그것을 거부한 핵심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 7. 아마르티아 센의 역량 접근은 롤스의 어떤 점을
넘어서려 했는가?
이제 풀이를 보겠습니다. 각 답을 확인하면서, 단지 정답을 맞혔는지보다 그 답의 이유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이유를 말로 풀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개념이 내 것이 됩니다.
문제 1의 답. 자신의 성별, 인종, 재산, 재능, 사회적 지위, 심지어 자신이 어떤 가치관과 인생 계획을 가지게 될지조차 모릅니다. 다만 인간 사회의 일반적 작동 방식에 관한 지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 2의 답. 차등원칙은 불평등이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갈 때에만 그 불평등을 허용합니다. 단순히 전체 평균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문제 3의 답. 과정입니다. 노직은 현재 분배의 모양이 아니라, 그 분배에 이르기까지의 취득과 이전이 정당했는지를 봅니다. 절차가 정당하면 결과가 불평등해도 정의롭다고 봅니다.
문제 4의 답.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거래하는 한, 어떤 평등한 분배도 결국 불평등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분배 모양을 계속 유지하려면 자유로운 거래에 끊임없이 간섭해야 하며, 이는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주장입니다.
문제 5의 답. 두 사람 모두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관한 판단을 정의 논의에서 비워 둔다는 전제입니다. 샌델은 정의가 미덕과 공동선에 관한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문제 6의 답. 공리주의입니다. 롤스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좇다 보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권리가 희생될 수 있다고 보았고, 사람은 전체의 행복을 위한 계산 항목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문제 7의 답. 센은 롤스가 분배하려는 대상인 자원(기본재)에 주목하기보다, 사람이 그 자원으로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즉 실질적 자유와 역량에 주목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자원이라도 사람마다 그것을 삶의 가치로 바꾸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일곱 문제를 모두 자신 있게 풀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현대 정의론의 큰 줄기를 손에 쥔 셈입니다. 공리주의에 대한 롤스의 비판에서 출발해, 무지의 베일과 두 원칙, 노직의 소유권리론과 농구 선수 논증, 샌델의 공동체주의적 반론, 그리고 센의 역량 접근까지 — 이것들은 정의를 둘러싼 현대의 대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좌표들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좌표들을 들고 현실의 구체적인 물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불평등에 적용하기
이 추상적인 논쟁은 책장 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회가 부의 격차 확대라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상위 소수가 사회 전체 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자산 가격이 노동 소득보다 빠르게 오르며, 출발선의 차이가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는 양상이 여러 나라에서 관찰됩니다. 이 현실 앞에서 롤스와 노직은 전혀 다른 진단을 내놓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둘 점이 있습니다. 두 이론은 같은 현실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애초에 다른 답에 이르게 됩니다. 롤스는 "이 결과는 누구에게 이로운가"를 묻고, 노직은 "이 결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통계를 보고도 정반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상위 소수에게 부가 집중된 현실을 두고, 롤스는 그것이 바닥의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부당하다고 보고, 노직은 그 부가 정당한 과정을 거쳤다면 결과의 모양만으로는 부당하다 할 수 없다고 봅니다. 같은 현실을 다른 렌즈로 본다는 사실을 잊으면, 두 사람의 대화는 영영 어긋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일은, 어느 렌즈가 옳은지를 성급히 정하기보다, 각 렌즈가 무엇을 또렷이 보여 주고 무엇을 흐릿하게 만드는지를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롤스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지금의 불평등이 가장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이로운가. 만약 격차가 벌어지는데도 밑바닥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면, 차등원칙은 이 불평등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때 롤스적 사고는 재분배, 기회의 실질적 평등, 교육과 사회 안전망에 관한 정책적 관심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롤스의 틀을 적용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차등원칙은 "불평등이 크다"는 사실 자체를 곧바로 부정의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그 불평등이 가장 약한 사람의 처지를 실제로 끌어올리고 있는가입니다. 만약 어떤 격차가 혁신과 생산을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바닥의 삶까지 끌어올린다면, 롤스도 그 격차를 용인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격차가 아무리 작아도 그것이 바닥을 더 짓누르는 방식이라면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롤스적 분석의 진짜 물음은 "얼마나 평등한가"가 아니라 "가장 약한 사람이 이 구조 덕분에 더 나아졌는가"입니다.
노직의 눈으로 보면, 질문은 달라집니다. 그 부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만약 누군가의 재산이 정당한 취득과 자발적 거래의 긴 사슬을 거쳐 쌓인 것이라면, 그 결과가 불평등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강제로 재분배하는 것은 권리의 침해가 됩니다. 다만 여기서 노직 자신의 "교정의 정의"가 중요한 단서를 답니다. 만약 과거의 부의 축적에 부당한 강제나 약탈, 불공정한 제도가 끼어 있었다면, 그 부는 처음부터 정당하지 않으며 교정의 대상이 됩니다. 현실의 역사가 과연 깨끗한 절차로만 이루어졌는지를 따져 묻는 일은, 노직의 틀 안에서도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같은 현실을 두고도 두 사람이 갈라서는 까닭은, 결국 그들이 정의의 무게중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롤스는 "그래서 가장 약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를 끝까지 놓지 않고, 노직은 "그 과정에 부당한 강제가 없었는가"를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두 물음 모두 정당하며, 어느 하나만으로는 정의의 전모를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현실의 정책 논의는 이 두 물음을 함께 들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쟁점으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 누진세 논쟁: 고소득자에게 더 높은 세율을 매기는 것은 롤스의 차등원칙과 통하는 발상이고, 노직은 그것을 자유에 대한 침해로 우려합니다.
- 기본소득 논의: 모두에게 일정 소득을 보장하자는 발상은 최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직관과 맞닿아 있지만,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두고 자유의 직관과 부딪칩니다.
- 상속과 출발선: 부모의 부가 자녀의 출발선을 크게 좌우한다면, 롤스가 말한 "공정한 기회균등"은 어디까지 실현될 수 있을까요.
- 능력주의의 그늘: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한다는 믿음은, 출발선의 불평등을 가릴 위험이 있다고 샌델은 경고합니다.
이 네 가지 쟁점에는 한 가지 공통된 구조가 있습니다. 모두가 "개인이 정당하게 가진 것"과 "사회가 함께 떠받쳐야 할 것" 사이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 경계를 개인 쪽으로 멀리 밀면 노직의 세계에 가까워지고, 사회 쪽으로 당기면 롤스의 세계에 가까워집니다. 어느 사회도 그 경계를 한쪽 끝에 완전히 붙여 두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매번 다투는 것은, 사실 그 경계선을 조금 이쪽으로 옮길지 저쪽으로 옮길지의 문제입니다.
의료 접근성의 문제는 이 긴장을 특히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 당신은 자신이 건강하게 태어날지, 중병을 안고 태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 무지의 상태라면, 당신은 아픈 사람도 치료에서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고를 가능성이 큽니다. 최악의 자리가 그나마 견딜 만하기를 바라는 마음, 곧 차등원칙의 직관입니다. 센의 역량 접근까지 끌어오면 이 직관은 더 또렷해집니다. 건강은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근본적인 역량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노직의 시선에서는, 의료를 보장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의 소득을 강제로 거두는 일이 권리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자발적 자선과 상호부조를 더 정당한 길로 봅니다. 같은 병상 앞에서, 한쪽은 "누구도 치료에서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다른 한쪽은 "도움은 강제가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와야 한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둘 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도덕적 목소리입니다.
이렇게 보면 두 입장은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키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모두 진지합니다. 우리는 결과의 공정함을 얼마나 중시해야 하는가.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정당한 노력의 몫을 얼마나 존중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부가 쌓여 온 과정은 과연 정당했는가. 어느 입장도 만능은 아닙니다. 롤스의 재분배는 자칫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약화시킬 수 있고, 노직의 자유는 자칫 약자를 방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현실의 좋은 정책은 이 질문들 사이의 어딘가에서, 양쪽의 통찰을 함께 끌어안는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현실의 많은 사회가 실제로 그런 절충 위에 서 있습니다. 시장의 자유로운 거래를 폭넓게 허용하면서도, 누진세와 사회보험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을 떠받치는 구조는 어느 한 이론의 순수한 적용이 아니라 두 직관의 타협에 가깝습니다. 노직의 순수한 최소국가도, 롤스의 원칙을 글자 그대로 구현한 사회도 현실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두 이론이 무용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가 어디쯤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지를 비춰 보는 두 개의 좌표축이 되어 줍니다. 어떤 정책을 두고 다툴 때 "이것은 결과의 공정함을 위한 것인가, 과정의 자유를 위한 것인가"를 물어보면, 그 정책이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주는지가 한결 또렷해집니다.
마치며: 다시 케이크 앞에서
처음의 케이크로 돌아가 봅시다. 롤스는 누가 어느 조각을 받을지 모른 채 케이크를 자르라고 말합니다. 노직은 그 케이크를 누가 구웠고 누가 재료를 댔는지부터 보라고 말합니다. 샌델은 그 모든 논의 이전에, 그 케이크가 누구의 부엌에서 어떤 손길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식탁을 좋은 식탁이라 부를지부터 함께 이야기하자고 청합니다. 센이라면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탤 것입니다. 케이크가 아무리 공정하게 잘렸어도, 누군가는 그것을 삼킬 수 없는 처지라면 그 공정함이 무슨 소용이냐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각자가 그 케이크로 실제로 무엇을 누릴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네 사람의 목소리를 나란히 놓고 보면, 이 작은 식탁의 장면이 얼마나 많은 물음을 품고 있는지 새삼 놀랍습니다. 어떻게 나눌 것인가, 누가 만들었는가, 무엇을 좋은 식탁이라 부를 것인가, 그리고 각자가 그것을 실제로 누릴 수 있는가. 이 네 물음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의 온전한 정의를 이루기 위해 함께 물어야 할, 서로 다른 네 개의 각도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사람 중 누구도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한 이의 삶이 비참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정직하게 노력해 얻은 것이 함부로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등을 향한 마음과 자유를 향한 마음은 우리 안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정의에 관한 논쟁이 이토록 오래, 이토록 뜨겁게 이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덮은 뒤에도, 부디 어느 한 사람의 이름표를 자신에게 붙이고 끝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롤스파다" "나는 노직파다"라고 못 박는 순간, 우리는 다른 입장이 붙들고 있는 진실의 조각을 더는 보려 하지 않게 됩니다. 차라리 매번의 구체적인 물음 앞에서, 그때그때 어느 직관이 더 무겁게 다가오는지를 정직하게 저울질하는 편이 낫습니다. 정의는 한 번 고르면 끝나는 진영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 묻고 다시 다는 저울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정의에 관한 가장 정직한 태도는, 이 긴장을 억지로 해소하려 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평등과 자유는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며, 둘은 종종 서로를 잡아당깁니다. 한쪽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다른 쪽이 다칩니다. 그래서 현실의 정치는 늘 이 둘 사이에서 줄을 타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균형점을 옮겨 갑니다. 정답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사회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정의를 어디에 둘지를 두고 끝없이 토론할 수 있다는 것, 그 토론이 닫히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건강한 사회의 가장 든든한 증거입니다.
이 글은 어느 한 사람의 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의도된 것입니다. 정의에 관한 물음에서 정답을 외부의 권위에서 받아 드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두 거장과 한 비판자, 그리고 센이라는 또 한 사람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공정하게 들려드리려 했습니다. 정의란 어쩌면 하나의 완성된 답이 아니라, 이 목소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묻고 조율하는 과정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베일을 쓰고 자기 사회의 규칙을 정할 차례는 당신입니다.
덧붙여, 이 글이 네 사람의 목소리를 끌어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롤스와 노직만으로는 정의의 지형도가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샌델은 두 사람이 함께 비워 둔 "좋은 삶"의 자리를 채워 넣었고, 센은 두 사람이 주목한 자원 너머의 "실제 삶의 가능성"을 가리켰습니다. 네 사람을 함께 놓고 보아야, 정의라는 물음이 얼마나 여러 각도를 가진 입체적인 것인지가 비로소 드러납니다. 어느 한 사람의 답에 안주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글이 권하는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입니다. 이 논쟁을 공부하는 일의 진짜 가치는, 자신이 어느 편인지를 빨리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직관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데 있습니다. 내가 공정한 결과에 더 끌리는가, 정당한 과정에 더 끌리는가. 그 끌림은 내가 살아온 자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만약 내 처지가 달랐다면, 나는 다른 직관을 가졌을까. 이런 물음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사람은, 정의에 관해 한층 겸손하고 너그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그 겸손함이야말로,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값진 선물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할 거리
첫째, 만약 당신이 정말로 무지의 베일 뒤에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더 큰 평균적 풍요를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최악의 자리가 그나마 견딜 만한 안전한 사회를 택하겠습니까. 그 선택은 당신의 무엇을 드러냅니까.
둘째, 노직의 농구 선수 논증은 정말로 모든 재분배를 부당하게 만드는 강력한 논증일까요. 아니면 거기에 숨은 빈틈이 있을까요. 자발적 거래의 출발선이 이미 불평등했다면, 그 거래는 여전히 온전히 자유로운 것일까요.
셋째, 부의 격차를 마주한 우리 사회에서, 결과의 공정함과 과정의 정당함 중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두 질문을 동시에 끌어안는 길은 가능할까요.
넷째, 샌델의 말처럼 정의가 좋은 삶에 관한 판단과 분리될 수 없다면, 다원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의 좋은 삶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그 합의는 가능할까요.
다섯째, 내가 지지하는 정의관은, 혹시 내가 지금 사회의 어느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무지의 베일을 다시 써 본다면, 나의 생각은 달라질까요.
여섯째, 롤스와 노직은 모두 공리주의를 거부하며 개인의 불가침성을 지키려 했지만, 정반대의 길로 갔습니다. 만약 당신이 "사람은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는 직관에 공감한다면, 그 직관은 당신을 어느 쪽으로 이끄나요. 공정한 분배 구조인가요, 침해되지 않는 개인의 권리인가요.
일곱째, 센의 말처럼 정의의 기준을 "자원을 얼마나 가졌는가"에서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옮긴다면,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가 새롭게 보일까요. 자원은 충분히 주어졌지만 그것을 삶의 가치로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여덟째, 만약 노직의 "교정의 정의"를 우리 사회의 역사에 진지하게 적용한다면, 무엇이 보일까요. 오늘의 부 가운데 과거의 부당함에 빚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가려내고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 물음은 자유를 앞세우는 사람에게도, 평등을 앞세우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왜 이 오래된 논쟁이 지금도 중요한가
어떤 사람은 물을지 모릅니다. 반세기 전 두 철학자의 대결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냐고. 그러나 롤스와 노직의 언어는 사실 우리가 매일 나누는 대화 속에 이미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건 불공평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결과의 공정함을 문제 삼는 롤스의 편에 서고, "내가 정당하게 번 건데 왜 빼앗기느냐"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과정의 정당함을 앞세우는 노직의 편에 섭니다. 세금, 복지, 교육, 의료, 상속 — 우리가 정책을 두고 다툴 때, 그 다툼의 밑바닥에는 거의 언제나 이 두 직관의 충돌이 자리합니다.
두 이론을 알아 두는 진짜 이점은, 어느 한쪽을 정답으로 고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도덕적 직관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읽어 내는 데 있습니다. 재분배를 반대하는 사람이 반드시 약자에게 무관심한 것은 아니며, 재분배를 지지하는 사람이 반드시 개인의 자유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가치를 더 무겁게 저울에 올렸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정의를 둘러싼 대화는 비난의 주고받음에서 벗어나 진짜 토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일이 단지 지식을 쌓는 데 그치지 않는 이유입니다. 롤스와 노직을 읽고 나면, 뉴스의 한 줄짜리 헤드라인이나 식탁의 짧은 말다툼 뒤에 숨은 더 깊은 가치의 지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금을 올려야 한다"와 "세금을 내려야 한다"는 단순한 손익 계산처럼 들리지만, 그 밑에는 공정한 결과와 정당한 과정 가운데 무엇을 더 무겁게 여기느냐는 철학적 선택이 깔려 있습니다. 그 지층을 읽어 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서로를 적이 아니라 다른 가치를 우선하는 동료 시민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함께 균형점을 찾는 일이 시작됩니다.
참고 자료
- John Rawls,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 Robert Nozick,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 Basic Books, 1974.
- Michael Sandel,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Farrar, Straus and Giroux, 2009.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Original Position": https://plato.stanford.edu/entries/original-position/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istributive Justice": https://plato.stanford.edu/entries/justice-distributive/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Robert Nozick's Political Philosoph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nozick-political/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John Rawl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rawls/
- Encyclopaedia Britannica, "John Rawls":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ohn-Rawls
- Encyclopaedia Britannica, "Robert Nozick":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Robert-Noz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