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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ju Kim
- @fjvbn20031
- 들어가며: 케이크 자르는 사람의 딜레마
- 정의라는 오래된 질문
- 롤스: 무지의 베일 뒤에서
- 노직: 정의는 역사다
-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기
- 한 걸음 더: 센의 역량 접근
- 샌델의 비판: 두 사람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
- 잠깐,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 짧은 정리 퀴즈
- 오늘의 불평등에 적용하기
- 마치며: 다시 케이크 앞에서
- 생각할 거리
- 참고 자료
들어가며: 케이크 자르는 사람의 딜레마
아이 둘이 케이크 한 조각을 두고 다툽니다. 부모는 오래된 지혜를 꺼냅니다. "한 사람이 케이크를 자르고, 다른 사람이 먼저 고르렴." 자, 케이크를 자르는 아이는 칼을 어떻게 댈까요. 자기가 어느 쪽을 받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아이는 가능한 한 똑같이 자르려 애씁니다. 한쪽을 크게 잘랐다가는 상대가 그 큰 쪽을 가져갈 테니까요.
놀랍게도 이 단순한 식탁의 장면 안에, 20세기 정치철학의 가장 위대한 사고실험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내가 어느 자리에 놓일지 모른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규칙에 합의하게 될까." 바로 이 질문에서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이 출발합니다.
조금 더 큰 무대로 옮겨 봅시다. 당신은 곧 태어날 참이지만, 아직 누구로 태어날지 모릅니다. 부유한 집안의 자녀일지, 가난한 가정의 아이일지, 건강한 몸을 가질지, 장애를 안고 살아갈지, 재능이 넘칠지, 평범할지 —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한 가지 임무가 주어집니다. 앞으로 모두가 살아갈 사회의 규칙을 직접 설계하라는 것입니다. 케이크를 자르는 아이처럼, 당신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밑바닥의 삶이 그리 비참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니까요.
그런데 같은 시대, 한 동료 철학자가 정반대 방향에서 손을 듭니다. "잠깐, 그 케이크는 도대체 누가 구웠는데." 같은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반격입니다. 노직은 물었습니다. 정의를 결과의 분배로만 따지는 것이 과연 옳은가. 사람들이 정당하게 얻은 것을 두고, 누군가 그 몫을 다시 나누라고 명령할 권리가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두 사람의 대결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한쪽은 평등을, 다른 한쪽은 자유를 정의의 핵심에 놓습니다. 그리고 이 오래된 긴장은 오늘날 부의 격차를 마주한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입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를 결론짓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닙니다. 다만 두 입장을 가능한 한 공정하게 펼쳐 보이고, 마지막 판단은 읽는 분의 몫으로 남겨 두려 합니다.
정의라는 오래된 질문
정의(justice)는 가장 오래된 철학적 물음 중 하나입니다. 멀리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은 정의를 두고 각자가 자기에게 합당한 몫과 역할을 갖는 상태로 그렸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것이 정의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비례에 맞게 대우하는 것, 즉 합당한 차이는 인정하되 부당한 차별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근대로 오면서 이 질문은 한층 날카로워집니다. 사회가 만들어 낸 부와 기회를,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나누는 것이 정의로운가. 누가 무엇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바로 이 "분배 정의(distributive justice)"의 문제가 롤스와 노직이 맞붙는 무대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 같은 대학에 몸담았으면서도 이 물음에 거의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 대결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각자의 그림을 차분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롤스가 맞선 상대: 공리주의
롤스의 정의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무엇을 반박하려 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가 평생 겨냥한 상대는 바로 공리주의(utilitarianism)였습니다.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로 대표되는 이 사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과 정치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어떤 정책이 옳은가는, 그것이 사회 전체의 만족과 행복의 총합을 얼마나 키우는가로 따진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는 매력적입니다. 명료하고, 계산 가능하며, 누구의 행복도 다른 누구의 행복보다 더 무겁게 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평등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롤스는 여기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행복의 총합만을 따지다 보면, 다수의 큰 이익을 위해 소수의 권리가 희생되는 상황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소수 집단을 심하게 억압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 총량을 크게 늘린다면, 공리주의의 계산법으로는 그것이 "옳은" 일이 되어 버립니다.
롤스의 유명한 한마디가 이 비판을 압축합니다. "각 개인은 사회 전체의 복지라는 이름으로도 침해될 수 없는 정의에 기초한 불가침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사람은 전체의 행복을 위한 계산의 항목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롤스에게 정의는 효용의 합산이 아니라, 누구도 함부로 짓밟히지 않도록 보장하는 원칙의 문제였습니다. 이 출발점을 기억해 두면, 그가 왜 그토록 "가장 약한 사람"에 집착했는지가 한결 또렷해집니다.
롤스: 무지의 베일 뒤에서
원초적 입장이라는 무대
존 롤스는 1971년에 출간한 대작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으로 잠들어 있던 정치철학을 다시 깨웠습니다. 그는 한 가지 거대한 질문에 답하려 했습니다. 공정한 사회의 기본 원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가 고안한 것이 바로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가상의 상황입니다.
원초적 입장이란, 사회의 규칙을 처음부터 정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일종의 가상 회의실입니다. 단, 이 회의실에는 특별한 조건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쓰고 있어, 자신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성별, 인종, 재산, 재능, 종교, 사회적 지위, 심지어 어떤 가치관과 인생 계획을 가지게 될지조차 모릅니다. 그저 인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왜 이런 기묘한 장치가 필요할까요. 롤스의 통찰은 명료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규칙을 정하기 마련입니다. 부자는 세금이 낮은 사회를, 가난한 사람은 재분배가 후한 사회를 바랍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료 보장에 무관심하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그것이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어느 쪽인지 모른다면, 나는 어느 한쪽에 치우친 규칙을 함부로 고를 수 없습니다. 케이크를 자르는 아이가 한쪽으로 치우치게 자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무지의 베일은 이렇게 사적인 이해관계를 차단함으로써, 누구도 자기 처지를 유리하게 끼워 넣지 못하게 만듭니다.
롤스는 이런 조건에서 합의된 원칙이라면 비로소 "공정하다"고 부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의의 원칙은 공정한 절차를 통해 도출될 때 정당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두 원칙
그렇다면 베일 뒤의 사람들은 어떤 원칙에 합의하게 될까요. 롤스는 그들이 다음 두 가지 원칙을 선택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첫째,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원칙"입니다. 모든 사람은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정치 참여의 자유, 투표권 같은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누려야 하며, 이 자유는 다른 무엇과도 함부로 맞바꿀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이자 가장 우선하는 원칙입니다. 풍요를 위해 자유를 거래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둘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할 때에만 허용됩니다. 하나는 "공정한 기회균등"입니다. 좋은 자리나 직책은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단지 형식적으로 문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재능과 의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출신 배경과 무관하게 비슷한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가 그 유명한 "차등원칙(difference principle)"입니다.
롤스의 원칙들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분명한 우선순위를 가집니다. 아래는 그 구조를 정리한 것입니다.
제1원칙: 평등한 기본적 자유 (최우선)
제2원칙:
(a) 공정한 기회균등
(b) 차등원칙 — 불평등은 최약자에게 이익이 될 때만 허용
우선순위: 자유 > 기회 > 차등
이 우선순위는 중요합니다. 롤스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기본적 자유를 희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유가 먼저이고, 그다음이 기회의 평등이며, 분배의 불평등 문제는 그 뒤에 옵니다.
차등원칙의 진짜 의미
차등원칙은 흔히 오해받습니다. 롤스는 "모두가 똑같이 가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불평등을 허용합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불평등이 정당화되려면, 그 불평등이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뛰어난 의사에게 높은 보수를 주는 제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분명 불평등을 낳습니다. 하지만 그 보상이 더 많은 유능한 사람을 의학의 길로 이끌고, 결과적으로 가난한 환자도 더 나은 치료를 받게 된다면, 이 불평등은 차등원칙의 시험을 통과합니다. 반대로 어떤 불평등이 오직 부자만을 더 부유하게 만들고 밑바닥의 삶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롤스의 관심은 언제나 "꼭대기"가 아니라 "바닥"에 있었습니다.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가장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불운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가입니다.
왜 가장 약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가
차등원칙의 밑바닥에는 흥미로운 선택의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 내가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떨어질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합리적 인간이라면, 어떤 도박을 하겠습니까.
롤스는 사람들이 "최악을 최선으로 만드는" 전략을 택하리라고 보았습니다. 영어로는 "맥시민(maximin)"이라 불리는 이 사고방식은, 여러 선택지가 있을 때 각 선택의 가장 나쁜 결과들을 비교하여, 그중 가장 덜 나쁜 것을 고르는 방식입니다. 어차피 내가 어느 처지로 떨어질지 모른다면, 최악의 자리가 그나마 견딜 만한 사회를 고르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이 논리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더 큰 평균적 풍요를 택하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롤스의 핵심은, 운으로 주어진 출발선의 차이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직관에 있습니다. 내가 어떤 재능을 타고날지,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날지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롤스는 이 우연의 산물을 "도덕적 관점에서 자의적인 것"이라 부르며, 사회가 그 우연의 불운을 어느 정도 보정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타고난 행운으로 얻은 몫을 전부 개인의 정당한 소유로만 돌리는 것은, 롤스가 보기에 도덕적으로 설득력이 약합니다.
노직: 정의는 역사다
"케이크를 누가 구웠나"
롤스의 정의론이 출간되고 3년 뒤인 1974년, 같은 하버드의 동료 로버트 노직은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라는 책으로 정면 반박합니다. 노직의 출발점은 롤스와 정반대입니다. 그는 정의를 결과의 "분배 상태"로 평가하는 발상 자체에 의문을 던집니다.
노직이 보기에,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지 아닌지는 부가 어떻게 "나뉘어 있는가"라는 최종 상태를 보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재산이 골고루 퍼진 두 사회가 있어도, 하나는 정당한 거래와 노동으로 그렇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약탈과 강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둘은 결코 같은 정의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분배 모양"이 아니라 "그 분배에 이르게 된 역사적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케이크가 어떻게 잘렸느냐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케이크를 누가 구웠고 누가 재료를 댔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노직의 "소유권리론(entitlement theory)" 혹은 절차적 정의관의 핵심입니다.
소유권리의 세 원칙
노직은 정당한 소유를 판단하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간결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취득의 정의 :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을 처음에 정당하게 손에 넣었는가
2. 이전의 정의 : 정당하게 소유한 것을 자발적 거래나 증여로 정당하게 옮겼는가
3. 교정의 정의 : 과거의 부당한 취득이나 강제 이전은 바로잡아야 한다
첫째, "취득의 정의"입니다.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을 처음으로 정당하게 손에 넣는 방식에 관한 원칙입니다. 둘째, "이전의 정의"입니다. 정당하게 소유한 것을 자발적인 거래나 증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방식에 관한 원칙입니다. 셋째, "교정의 정의"입니다. 만약 과거에 부당한 취득이나 강제적 이전이 있었다면, 그 잘못을 바로잡는 방식에 관한 원칙입니다.
이 세 원칙이 결론으로 말하는 바는 간결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취득과 정당한 이전을 거쳐 무언가를 손에 넣었다면, 그는 그것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리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분배는, 그 모양이 아무리 불평등해 보일지라도 정의롭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평등해 보이는 분배라도 그 과정에 부당함이 끼어 있었다면 정의롭지 않습니다.
윌트 체임벌린 논증
노직의 가장 유명한 사고실험은 농구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노직은 당대 최고의 농구 스타를 예로 들어 이렇게 묻습니다.
처음에 당신이 가장 정의롭다고 믿는 어떤 분배 상태가 있다고 합시다.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가진 완벽한 평등의 상태여도 좋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이 농구 스타의 경기를 보고 싶어 합니다. 입장권을 살 때마다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약간의 돈을 따로 떼어 그 선수에게 건넵니다. 한 시즌이 끝나면 수많은 관객의 작은 동전들이 모여, 그 선수는 다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돈을 손에 쥐게 됩니다.
자, 이제 처음의 완벽한 평등은 깨졌습니다. 노직은 묻습니다. 이 새로운 불평등은 부당한가. 만약 부당하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관객들이 자기 돈을 자발적으로 그 선수에게 건넨 행위를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기가 정당하게 가진 돈을 자기가 원하는 곳에 쓰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노직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어떤 특정한 분배 모양을 계속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사람들의 자발적 거래에 개입하고 그 결과를 되돌려야 한다. 정형화된 분배 원칙은 결국 자유에 대한 지속적인 간섭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분배와 강제 노동
노직은 한발 더 나아가 도발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는 노동의 결과를 세금으로 거두어 재분배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강제 노동과 닮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한 시간을 일해 번 돈의 일부를 국가가 다른 사람을 위해 거두어 간다면, 그것은 내 한 시간의 노동을 타인을 위해 강제로 징발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이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고, 노직 자신도 훗날 자신의 초기 입장 가운데 일부를 누그러뜨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직관은 강력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기 노동의 결과에 대해 일차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 그리고 그 권리를 좋은 목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노직에게 개인은 결코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국가의 역할도 최소한으로 좁힙니다. 국가는 폭력과 절도, 사기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계약의 이행을 돕는 데 그쳐야 하며, 그 이상으로 부를 재분배하려 드는 순간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최소국가" 구상입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기
이제 두 입장의 차이를 한눈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래 표는 롤스와 노직의 핵심을 마주 세운 것입니다.
| 쟁점 | 롤스 | 노직 |
|---|---|---|
| 정의의 초점 | 분배의 결과와 구조 | 소유에 이르는 과정과 절차 |
| 핵심 가치 | 공정과 평등 | 개인의 자유와 권리 |
| 대표 장치 | 무지의 베일, 원초적 입장 | 소유권리론, 농구 선수 논증 |
| 불평등을 보는 눈 | 가장 약한 자에게 이로울 때만 허용 | 과정이 정당하면 결과가 불평등해도 허용 |
| 국가의 역할 | 재분배를 통한 공정 보장 | 최소국가, 권리 보호에 한정 |
| 세금 재분배 | 정의가 요구하는 것 | 강제 노동에 가까운 것 |
| 운에 대한 태도 | 우연한 불운은 사회가 보정해야 함 | 정당히 얻은 것은 운이라도 본인 몫 |
| 출간된 대표작 | 정의론, 1971 |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 1974 |
이 표를 보면 두 사람이 같은 단어 "정의"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롤스에게 정의란 결과가 충분히 공정한 상태이고, 노직에게 정의란 과정이 충분히 정당한 흐름입니다. 한쪽은 사회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 구조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묻고, 다른 한쪽은 개인의 어깨 위에서 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았는지를 묻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대결은 가치의 우선순위 다툼입니다. 롤스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노직은 "자유로서의 정의"를 말합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는 이 글이 답할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두 직관이 모두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약자가 방치되는 것도 불편해하고, 정당하게 번 것을 함부로 빼앗기는 것도 부당하게 느낍니다. 정의에 관한 논쟁이 이토록 오래 이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 걸음 더: 센의 역량 접근
롤스와 노직의 대결을 지켜본 또 다른 중요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그는 롤스를 깊이 존경했지만, 한 가지 중요한 지점에서 그를 넘어서려 했습니다.
센은 묻습니다. 롤스가 분배하려는 것이 과연 옳은 대상인가. 롤스는 "기본재(primary goods)" — 소득, 부, 기회, 권리처럼 누구나 자기 인생 계획을 위해 필요로 하는 자원 — 가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센은 여기에 빈틈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양의 자원이라도, 사람마다 그것을 실제 삶의 가치로 바꾸는 능력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똑같은 양의 식량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도, 한 사람은 건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중병을 앓고 있다면, 같은 식량이 두 사람에게 같은 영양과 삶의 질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똑같은 자전거를 주어도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그것으로 이동의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센은 "자원을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그의 "역량 접근(capability approach)"입니다.
역량 접근은 정의의 평가 기준을 자원의 분배에서 실질적 자유의 분배로 옮겨 놓습니다. 좋은 사회란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 — 건강하게 지내고, 교육받고, 공동체에 참여하고, 존엄을 지킬 능력 — 을 폭넓게 보장하는 사회입니다. 센의 이 발상은 훗날 유엔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에 영향을 주었고,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었습니다. 롤스가 열어 놓은 길 위에서, 정의 논의가 어떻게 한 걸음 더 나아갔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샌델의 비판: 두 사람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
흥미롭게도, 롤스와 노직의 대결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며 양쪽 모두에 의문을 제기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입니다. 그의 강의를 묶은 책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는 전 세계에서 널리 읽혔고,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샌델은 롤스를 깊이 존중하면서도 중요한 비판을 던집니다. 그가 보기에, 무지의 베일 뒤에 선 인간은 자신의 모든 구체적 정체성을 벗어던진, 이를테면 "부담을 지지 않은 자아"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가족, 공동체, 역사,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존재입니다. 나의 가치관과 책임은 내가 속한 공동체와 떼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정의를 논하면서 그 모든 구체적 정체성을 일부러 비워 둔다면, 그렇게 도출된 원칙은 실제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노직에게도 묻습니다. 정말로 "내 재능은 온전히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뛰어난 운동선수의 재능은 그가 노력해 갈고닦은 부분도 있지만, 우연히 타고난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재능을 값지게 만들어 주는 사회가 있기에 비로소 가치를 가집니다. 농구가 인기 없는 사회에서라면 같은 재능도 큰 보상을 낳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상을 온전히 개인 몫으로만 돌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것이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문제 제기입니다.
샌델의 더 근본적인 비판은 롤스와 노직이 공유하는 한 가지 전제를 겨냥합니다. 두 사람 모두 정의를 논할 때, 사람들이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 여기는지에 관한 판단을 일부러 비워 둡니다. 롤스의 무지의 베일은 각자의 가치관을 가린 채 원칙을 정하게 하고, 노직의 절차적 정의 또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든 그 거래만 자발적이면 정당하다고 봅니다. 두 사람 모두 "좋음(the good)"에 관한 판단을 옆으로 밀어 두고 "옳음(the right)"의 틀만 짜려 한다는 것입니다. 샌델은 정의가 결국 좋은 삶에 관한 공동체의 논의, 그리고 미덕과 공동선에 관한 물음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롤스의 옹호자들은 반론을 폅니다. 다원적인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좋은 삶에 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의의 원칙은 특정한 가치관에 기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좋은 삶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어느 쪽 손을 들어 줄지는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샌델의 질문이 정의 논쟁의 무대를 한층 넓혀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잠깐,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본격적인 정리에 앞서, 가볍게 자신의 직관을 시험해 봅시다. 정답이 정해진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각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 당신이 어느 직관에 더 기대고 있는지를 비춰 줄 것입니다.
[ 직관 점검 ]
질문 1. 무지의 베일을 쓴 당신은, 상위 소수가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에 선뜻 합의하겠습니까?
질문 2. 자발적으로 돈을 건넨 관객들 덕분에 부자가 된 농구 선수에게
세금을 매기는 것은, 정의로운 재분배일까요, 자유의 침해일까요?
질문 3. 내 재능과 노력의 열매는 온전히 내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와 운에 일부 빚진 것일까요?
질문 1에서 선뜻 합의하기 망설여진다면, 당신 안에는 롤스적 직관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질문 2에서 그 세금이 자유의 침해처럼 느껴진다면, 노직적 직관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질문 3에서 잠시 멈칫했다면, 샌델이 던진 물음이 당신에게도 닿은 것입니다.
짧은 정리 퀴즈
이번에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점검해 봅시다. 아래 다섯 문제를 먼저 스스로 답해 본 뒤, 그 아래의 풀이를 확인해 보십시오.
[ 정의론 퀴즈 ]
문제 1. 무지의 베일 뒤에 있는 사람은 자신에 관해 무엇을 모르는가?
문제 2. 롤스의 차등원칙은 불평등을 어떤 조건에서 허용하는가?
문제 3. 노직의 소유권리론에서 분배의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결과인가, 과정인가?
문제 4. 노직의 농구 선수 논증이 보여주려는 핵심 주장은 무엇인가?
문제 5. 마이클 샌델은 롤스와 노직이 공유하는 어떤 전제를
비판하는가?
이제 풀이를 보겠습니다.
문제 1의 답. 자신의 성별, 인종, 재산, 재능, 사회적 지위, 심지어 자신이 어떤 가치관과 인생 계획을 가지게 될지조차 모릅니다. 다만 인간 사회의 일반적 작동 방식에 관한 지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 2의 답. 차등원칙은 불평등이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갈 때에만 그 불평등을 허용합니다. 단순히 전체 평균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문제 3의 답. 과정입니다. 노직은 현재 분배의 모양이 아니라, 그 분배에 이르기까지의 취득과 이전이 정당했는지를 봅니다. 절차가 정당하면 결과가 불평등해도 정의롭다고 봅니다.
문제 4의 답.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거래하는 한, 어떤 평등한 분배도 결국 불평등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분배 모양을 계속 유지하려면 자유로운 거래에 끊임없이 간섭해야 하며, 이는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주장입니다.
문제 5의 답. 두 사람 모두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관한 판단을 정의 논의에서 비워 둔다는 전제입니다. 샌델은 정의가 미덕과 공동선에 관한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오늘의 불평등에 적용하기
이 추상적인 논쟁은 책장 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회가 부의 격차 확대라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상위 소수가 사회 전체 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자산 가격이 노동 소득보다 빠르게 오르며, 출발선의 차이가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는 양상이 여러 나라에서 관찰됩니다. 이 현실 앞에서 롤스와 노직은 전혀 다른 진단을 내놓습니다.
롤스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지금의 불평등이 가장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이로운가. 만약 격차가 벌어지는데도 밑바닥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면, 차등원칙은 이 불평등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때 롤스적 사고는 재분배, 기회의 실질적 평등, 교육과 사회 안전망에 관한 정책적 관심으로 이어집니다.
노직의 눈으로 보면, 질문은 달라집니다. 그 부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만약 누군가의 재산이 정당한 취득과 자발적 거래의 긴 사슬을 거쳐 쌓인 것이라면, 그 결과가 불평등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강제로 재분배하는 것은 권리의 침해가 됩니다. 다만 여기서 노직 자신의 "교정의 정의"가 중요한 단서를 답니다. 만약 과거의 부의 축적에 부당한 강제나 약탈, 불공정한 제도가 끼어 있었다면, 그 부는 처음부터 정당하지 않으며 교정의 대상이 됩니다. 현실의 역사가 과연 깨끗한 절차로만 이루어졌는지를 따져 묻는 일은, 노직의 틀 안에서도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쟁점으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 누진세 논쟁: 고소득자에게 더 높은 세율을 매기는 것은 롤스의 차등원칙과 통하는 발상이고, 노직은 그것을 자유에 대한 침해로 우려합니다.
- 기본소득 논의: 모두에게 일정 소득을 보장하자는 발상은 최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직관과 맞닿아 있지만,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두고 자유의 직관과 부딪칩니다.
- 상속과 출발선: 부모의 부가 자녀의 출발선을 크게 좌우한다면, 롤스가 말한 "공정한 기회균등"은 어디까지 실현될 수 있을까요.
- 능력주의의 그늘: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한다는 믿음은, 출발선의 불평등을 가릴 위험이 있다고 샌델은 경고합니다.
이렇게 보면 두 입장은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키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모두 진지합니다. 우리는 결과의 공정함을 얼마나 중시해야 하는가.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정당한 노력의 몫을 얼마나 존중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부가 쌓여 온 과정은 과연 정당했는가. 어느 입장도 만능은 아닙니다. 롤스의 재분배는 자칫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약화시킬 수 있고, 노직의 자유는 자칫 약자를 방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현실의 좋은 정책은 이 질문들 사이의 어딘가에서, 양쪽의 통찰을 함께 끌어안는 형태일지도 모릅니다.
마치며: 다시 케이크 앞에서
처음의 케이크로 돌아가 봅시다. 롤스는 누가 어느 조각을 받을지 모른 채 케이크를 자르라고 말합니다. 노직은 그 케이크를 누가 구웠고 누가 재료를 댔는지부터 보라고 말합니다. 샌델은 그 모든 논의 이전에, 그 케이크가 누구의 부엌에서 어떤 손길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식탁을 좋은 식탁이라 부를지부터 함께 이야기하자고 청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사람 중 누구도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한 이의 삶이 비참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정직하게 노력해 얻은 것이 함부로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등을 향한 마음과 자유를 향한 마음은 우리 안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정의에 관한 논쟁이 이토록 오래, 이토록 뜨겁게 이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어느 한 사람의 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의도된 것입니다. 정의에 관한 물음에서 정답을 외부의 권위에서 받아 드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두 거장과 한 비판자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공정하게 들려드리려 했습니다. 정의란 어쩌면 하나의 완성된 답이 아니라, 이 목소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묻고 조율하는 과정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베일을 쓰고 자기 사회의 규칙을 정할 차례는 당신입니다.
생각할 거리
첫째, 만약 당신이 정말로 무지의 베일 뒤에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더 큰 평균적 풍요를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최악의 자리가 그나마 견딜 만한 안전한 사회를 택하겠습니까. 그 선택은 당신의 무엇을 드러냅니까.
둘째, 노직의 농구 선수 논증은 정말로 모든 재분배를 부당하게 만드는 강력한 논증일까요. 아니면 거기에 숨은 빈틈이 있을까요. 자발적 거래의 출발선이 이미 불평등했다면, 그 거래는 여전히 온전히 자유로운 것일까요.
셋째, 부의 격차를 마주한 우리 사회에서, 결과의 공정함과 과정의 정당함 중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두 질문을 동시에 끌어안는 길은 가능할까요.
넷째, 샌델의 말처럼 정의가 좋은 삶에 관한 판단과 분리될 수 없다면, 다원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의 좋은 삶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그 합의는 가능할까요.
다섯째, 내가 지지하는 정의관은, 혹시 내가 지금 사회의 어느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무지의 베일을 다시 써 본다면, 나의 생각은 달라질까요.
참고 자료
- John Rawls,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 Robert Nozick,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 Basic Books, 1974.
- Michael Sandel,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Farrar, Straus and Giroux, 2009.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Original Position": https://plato.stanford.edu/entries/original-position/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istributive Justice": https://plato.stanford.edu/entries/justice-distributive/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Robert Nozick's Political Philosoph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nozick-political/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John Rawl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rawls/
- Encyclopaedia Britannica, "John Rawls":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ohn-Rawls
- Encyclopaedia Britannica, "Robert Nozick":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Robert-Noz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