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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은 어디까지 지어내도 되는가 — 사실과 허구 사이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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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크롬웰이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529년 어느 저녁, 토머스 크롬웰이 집에서 무엇을 먹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가 그날 누구에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잠들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공문서와 편지와 회계 장부, 그리고 그를 미워한 사람들이 쓴 몇 줄입니다.

역사소설은 정확히 그 빈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순간 독자와 조용한 계약을 하나 맺습니다. 알려진 것은 건드리지 않고, 기록이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운다는 계약입니다. 이 계약이 지켜진다고 믿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계약의 조항이 어디에도 성문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디까지가 허용된 상상이고 어디부터가 위반인지, 실존 인물의 입에 없던 말을 넣는 것은 어느 쪽인지. 이 글은 그 경계를 다룹니다. 어떤 작품의 결말도 밝히지 않습니다.

사실·해석·창작 — 역사소설의 3층 구조

계약의 내용을 명확히 하려면 재료를 층으로 나눠 보는 것이 편합니다. 역사소설의 재료는 대체로 세 층입니다.

무엇인가작가의 자유
사실날짜, 장소,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가거의 없음. 바꾸면 계약 위반앤 불린은 1536년에 처형되었다
해석왜 그랬는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사료가 엇갈리는 지점에서 고를 자유크롬웰은 냉혈한인가 유능한 실무가인가
창작사적인 대화, 감정, 이름 없는 인물사실상 전부크롬웰의 저녁 식탁에서 오간 말

가장 흥미로운 층은 가운데입니다. 역사소설의 진짜 작업은 창작 층이 아니라 해석 층에서 벌어집니다. 사료가 하나로 모이는 사건은 오히려 드뭅니다. 같은 인물을 두고 어떤 기록은 잔인하다고 하고 어떤 기록은 공정하다고 합니다. 작가는 그중 하나를 고르고, 왜 그렇게 골랐는지를 소설 전체로 논증합니다. 좋은 역사소설이 논문처럼 읽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논증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작가가 작품 끝에 후기를 붙입니다.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자신의 선택인지, 어떤 인물을 합쳤고 어떤 사건의 순서를 바꿨는지 밝히는 관행입니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레이스」(1996)에서 실존 인물인 그레이스 마크스를 다루면서, 그를 둘러싼 기록들이 서로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후기에서 짚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1980) 이후 아예 별도의 창작 노트를 냈습니다.

후기는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신뢰의 장치입니다. 경계를 밝히는 작가는 밝히지 않은 부분에서도 정직했으리라는 믿음을 얻습니다. 반대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끝내 알려 주지 않는 작품은, 재미와 별개로 독자를 조금 무장 해제된 상태로 남겨 둡니다.

고증의 역설 — 모든 역사소설은 번역이다

여기서 뜻밖의 문제가 생깁니다. 고증을 완벽하게 하면 소설이 읽히지 않습니다.

가장 분명한 사례가 언어입니다. 15세기 잉글랜드 사람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오늘날 영어 사용자도 사전 없이는 읽지 못합니다. 조선 중기의 문장을 그대로 쓰면 한국어 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모든 역사소설의 대사는 예외 없이 현대어입니다. 역사소설은 과거를 기록하는 장르가 아니라 과거를 번역하는 장르입니다. 번역인 이상 완전한 원문 재현이 아니라 선택과 손실이 개입합니다.

반대 방향의 실패도 있습니다. 분위기를 내겠다고 어설픈 옛말투를 뒤집어씌우는 경우입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이런 문체에 가짜 고어체라는 조롱 섞인 이름을 붙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흔합니다. 문장마다 그러하옵니다를 붙이면 시대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인형이 됩니다. 실제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 말은 낡은 말이 아니라 그냥 자기 말이었습니다. 당대 사람에게 당대는 하나도 고풍스럽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체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대감은 무엇이 만들까요. 놀랍게도 정확한 연호나 관직명이 아니라 감각의 세부입니다. 촛불 하나로 밝히는 방의 어둠, 젖은 양모 옷의 무게와 냄새, 소금에 절인 고기의 짠맛, 말이 지나갈 때 흙길에서 올라오는 먼지.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항해 소설들이 19세기 해군을 실감 나게 만드는 것은 전술 해설이 아니라 밧줄과 식사와 악취입니다.

이유는 인지적입니다. 독자는 관직 체계를 검증할 능력이 없지만 냄새와 무게와 통증은 자기 몸으로 바로 압니다. 검증 가능한 정확성은 신뢰를 주고, 감각의 구체성은 몰입을 줍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소설은 후자를 골라야 합니다. 고증은 틀리면 신뢰를 잃지만, 감각이 비면 처음부터 읽히지 않습니다.

「울프 홀」이 한 일 — 시점을 옮기면 인물이 바뀐다

힐러리 맨틀의 「울프 홀」(2009)은 이 장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준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이 소설은 헨리 8세 시대를 다루면서 카메라를 왕이 아니라 토머스 크롬웰에게 겁니다. 그리고 3인칭 현재형이라는 낯선 문체로, 크롬웰의 어깨 위에 붙어 그가 보는 것만 봅니다.

이 선택이 왜 결정적인지 이해하려면 그 이전의 크롬웰상을 알아야 합니다. 영어권에서 크롬웰의 대중적 이미지를 만든 것은 로버트 볼트의 희곡 「사계절의 사나이」(1960)와 그 영화판(1966)이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양심을 지키다 죽는 토머스 모어이고, 크롬웰은 그를 파멸시키는 냉혹한 행정가입니다. 수십 년간 이 구도가 기본값이었습니다.

맨틀이 한 일은 사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형 날짜도, 법령도, 편지도 그대로입니다. 바꾼 것은 누구의 눈으로 그 사실을 보는가뿐입니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맞고 자라다가 유럽을 떠돌며 상업과 법률을 익히고 궁정 최고 실무자가 된 사람의 시점에서 보면, 같은 사건이 다르게 배열됩니다. 그리고 성인으로 그려지던 모어 쪽에도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그가 이단 단속에 열성적이었다는 사실 역시 사료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이 장르의 가장 큰 힘이 드러납니다. 역사는 대체로 이긴 쪽과 글을 쓸 줄 알았던 쪽이 남깁니다. 그 기록은 사실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배열되어 있습니다. 역사소설은 사료를 위조하지 않고도, 시점 하나를 옮기는 것만으로 그 배열을 다시 짤 수 있습니다. 학술적 반론이 각주로 하는 일을 소설은 문장의 위치로 합니다.

물론 위험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시점 인물에게 붙어 있으면 독자는 그의 자기 정당화까지 함께 흡수합니다. 잘 쓰인 작품은 그 사실을 알고, 인물이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과 그가 실제로 하는 일 사이에 미세한 틈을 남겨 둡니다. 그 틈을 읽어 내는 것이 독자 몫입니다.

과거를 빌려 현재를 말하기 — 한국 사극의 이동과 그 함정

시대극이 흥하는 시기에는 대개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를 무대로 삼으면 현재의 민감한 문제를 한 겹 건너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정당성, 언론과 여론, 재난 앞에서 국가가 하는 일. 직접 말하면 논쟁이 되는 주제도 400년 전 옷을 입히면 이야기가 됩니다.

한국 사극의 궤적이 이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1990년대까지 사극의 기본값은 왕조 정통 서사였습니다. 「용의 눈물」(1996)처럼 왕과 공신들의 권력 다툼이 중심이었고 시청자는 정치 드라마로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카메라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허준」(1999)은 의원을, 「대장금」(2003)은 궁녀와 의녀를 주인공으로 세웠고, 「추노」(2010)는 아예 노비를 중심에 놓았습니다. 「미스터 션샤인」(2018)은 이름이 남지 않은 의병 쪽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소설 쪽도 비슷합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2001)는 이순신을 영웅 서사가 아니라 1인칭의 고립된 내면으로 다시 썼고, 조정래의 대하소설들은 근현대사를 민중의 층위에서 재구성했습니다. 왕좌에서 사람으로 내려온 이 이동이 최근 30년 한국 사극의 가장 큰 변화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과거를 현재의 확성기로만 쓰면, 과거 인물이 21세기의 가치관을 그대로 장착한 채 등장하게 됩니다. 조선의 인물이 오늘의 언어로 오늘의 옳은 말을 하고, 주변 인물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경이 됩니다. 이때 독자가 얻는 것은 과거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우리는 저들보다 낫다는 확인입니다. 이 자기만족을 역사학 쪽에서는 현재주의라고 부릅니다.

다만 반대 방향의 게으름도 경계할 만합니다. 그 시대엔 다들 그랬다는 말은 종종 사실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의 언어로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고,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좋은 역사소설은 당대의 논리 안에서 저항하는 인물을 찾아냅니다. 오늘의 답을 과거에 심는 대신, 오늘과 다른 전제에서 출발해 그럼에도 저항에 도달하는 경로를 그리는 쪽이 훨씬 어렵고 훨씬 값집니다.

실존 인물이라는 무게 — 팩션의 윤리

지금까지는 기술의 문제였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윤리의 문제입니다.

실존 인물을 다루면 그 사람에게는 반론권이 없습니다. 소설이 그린 성격과 동기가 널리 퍼지면, 그것이 사실상 그 사람의 대중적 초상이 됩니다. 시간이 충분히 지난 인물이라면 부담이 적지만, 근현대 인물은 다릅니다. 유족이 살아 있고 관련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죽은 사람은 항의하지 못하고 산 유족은 소설과 싸워야 한다는 비대칭이 이 장르의 기본 조건입니다.

한국에서도 이 논쟁은 반복되었습니다. 2021년 「조선구마사」는 역사 왜곡 논란 속에 방영 초기에 편성이 중단되었고, 같은 해 「설강화」는 198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 배경을 다루는 방식을 두고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두 사례에서 쟁점은 세부 고증의 오류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당사자와 기억이 살아 있는 시기를 극의 재료로 쓸 때 어떤 주의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무게가 특히 무거운 소재도 있습니다. 학살, 식민 지배, 전쟁 범죄처럼 피해가 집단적이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건들입니다. 여기서는 극적 재미를 위한 각색이 곧바로 사실 왜곡의 효과를 냅니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존 보인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2006)은 널리 읽혔지만, 여러 홀로코스트 교육 기관과 연구자들이 이 작품의 설정이 실제 수용소의 작동 방식에 대한 오해를 퍼뜨릴 수 있다고 지적해 왔습니다. 좋은 의도와 좋은 결과가 자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례입니다.

그렇다고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은 아닙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는 광주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사건을 극적 소재로 소비하는 대신 남은 사람들의 시간을 따라갑니다. 어려운 소재를 다루는 실력은 얼마나 대담한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기로 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감상적인 클라이맥스를 포기하는 것, 가해자에게 매력적인 서사를 주지 않는 것, 피해를 구경거리로 배치하지 않는 것. 이 절제가 결국 작품을 오래 남게 합니다.

어디서부터 읽고 볼까 — 입문 경로

  •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힐러리 맨틀 「울프 홀」 → 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
  • 한국어로 시작하고 싶다면: 김훈 「칼의 노래」 → 「남한산성」 → 한강 「소년이 온다」
  • 큰 규모의 서사를 원한다면: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 조정래 「태백산맥」
  • 재미와 몰입이 먼저라면: 켄 폴릿 「대지의 기둥」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 고대와 로마 쪽이 궁금하다면: 로버트 그레이브스 「나, 클라우디우스」
  • 영상으로 흐름을 보고 싶다면: 「대장금」(2003) → 「추노」(2010) → 「미스터 션샤인」(2018)

마치며 — 소설이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감각이다

역사소설을 읽고 나면 연도를 외우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각이 남습니다. 그 시대에 산다는 것이 몸으로 어떤 일이었는지, 오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 중 무엇이 그때는 없었는지에 대한 감각입니다. 사실을 알고 싶다면 역사서를 읽는 편이 낫습니다. 소설이 더 잘하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르를 읽는 좋은 태도는 아마 두 가지를 동시에 쥐는 것입니다. 이야기에는 온전히 몰입하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 번은 물어보는 것. 이 중 어디까지가 기록이었을까. 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 좋은 역사소설이고, 그 질문을 미리 예상해 답을 준비해 둔 작가가 좋은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