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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ju Kim
- @fjvbn20031
들어가며 — 3년째 같은 자리에 책갈피가 꽂혀 있다면
제 책장에는 47쪽에 책갈피가 꽂힌 채 3년을 보낸 책이 있습니다. 그 3년 동안 저는 그 책을 읽지 않았고, 대신 그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잃은 것은 47쪽 분량의 독서가 아니라, 그 3년간 다른 책을 읽으며 느꼈어야 할 편안함이었습니다.
추천 목록의 문제는 목록이 부실해서가 아닙니다. 목록은 무엇을 읽을지는 알려 주지만, 언제 그만둬도 되는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 맞는 책을 붙들고 자책하게 만듭니다.
이 글은 30권을 소개하되, 각 권마다 세 가지를 같이 적습니다. 분량 감각(대략 몇 쪽인지), 난이도(제 주관적 판단입니다), 그리고 첫 50쪽이 어렵다면 그만둬도 되는 책인지 아닌지. 마지막 항목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어떤 책은 첫 50쪽이 원래 최악이고 100쪽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떤 책은 첫 50쪽이 그 책의 정직한 견본이고, 안 맞으면 끝까지 안 맞습니다. 이 둘을 구별해 드리는 것이 목록 자체보다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줄거리는 전제 이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쪽수는 한국어판 기준의 어림값이며 출판사와 판형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이 목록의 사용법 — 첫 50쪽 규칙
50쪽이라는 숫자에 마법은 없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소설은 50쪽쯤에서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책인지를 이미 다 보여 줍니다. 문제는 그 시점에 독자가 느끼는 불편이 여러 종류인데, 우리는 그걸 뭉뚱그려 "어렵다"고 부른다는 점입니다.
느낀 것의 종류를 나누면 판단이 쉬워집니다.
| 첫 50쪽에서 느낀 것 | 대개의 원인 | 판단 |
|---|---|---|
| 문장은 읽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다 | 인물과 지명이 한꺼번에 쏟아짐 | 계속 읽으세요. 100쪽이면 정리됩니다 |
| 문장 자체가 넘어가지 않는다 | 번역 또는 문체의 문제 | 판본을 바꿔 보고, 그래도 같으면 중단 |
| 지루한데 뭔가 대단해 보이긴 한다 | 작품의 리듬이 원래 느림 | 하루 20쪽으로 속도를 낮춰 계속 |
| 불쾌하고 읽는 내내 화가 난다 | 지금의 나와 주제가 충돌 | 중단. 몇 년 뒤에 다시 |
| 아무 감흥이 없다 | 관심 밖의 소재 | 중단. 취향의 문제입니다 |
세 번째 줄이 가장 중요합니다. 느린 책을 빨리 읽으려 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미들마치」를 하루에 100쪽씩 읽으려는 계획은 「미들마치」가 아니라 계획이 잘못된 것입니다.
고전 — 19세기까지
고전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어휘가 아니라 속도입니다. 당시 독자는 이 책들을 몇 달에 걸쳐 잡지 연재로 읽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한 덩어리로 받아 놓고 일주일에 끝내려 합니다. 애초에 설계가 다릅니다.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 1813 · 약 400쪽 · 난이도 하
시골 중산층 가정의 딸들과 결혼 시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전 중에서 가장 현대적으로 읽히는 축이고, 대사의 리듬이 지금 로맨틱 코미디와 거의 같습니다. 고전이 무섭다는 감각을 없애는 데 이만한 첫 책이 없습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초반의 인물 소개가 다소 지루할 뿐, 100쪽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장르의 문법 자체가 궁금해지면 로맨스 장르 문법 편이 좋은 짝입니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 1818 · 약 250쪽 · 난이도 중
과학자가 생명을 만들어 낸 뒤 벌어지는 일입니다. 영화 이미지 때문에 오해받는 대표적인 책인데, 실제로는 괴물이 아주 유창하게 말하는 철학 소설에 가깝습니다. 250쪽이라 부담도 적습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편지로 시작하는 액자 구조라 초반이 가장 지루합니다. 본 이야기가 시작되면 속도가 붙습니다.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 1847 · 약 700쪽 · 난이도 중
고아 소녀가 가정교사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1인칭 화자의 목소리가 워낙 강해서 700쪽이 생각보다 빨리 넘어갑니다. 19세기 소설 중 감정의 온도가 가장 높은 편에 듭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어린 시절 학교 장면이 가장 어둡고 느립니다. 여기만 지나면 됩니다.
「모비 딕」 허먼 멜빌 · 1851 · 약 700쪽 · 난이도 상
한 선장이 흰 고래를 쫓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절반쯤은 고래학, 밧줄의 종류, 고래 기름 정제 공정에 관한 서술입니다. 그 이상함이 이 책의 정체이고, 그래서 사랑하거나 던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됩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그만두셔도 됩니다. 다만 그 전에 방법을 하나 권합니다. 고래학 장들을 건너뛰고 읽으십시오. 이 책은 그렇게 읽어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많은 독자가 그렇게 완독합니다.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1866 · 약 700쪽 · 난이도 중
한 가난한 대학생이 살인을 저지른 뒤의 심리를 따라갑니다. 문체는 의외로 빠르고 거의 스릴러처럼 읽힙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어렵다는 평판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몫이고, 이 책은 입구로 적당합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러시아 이름이 정식 이름, 애칭, 부칭으로 세 가지씩 나오는 것이 유일한 장벽입니다. 인물 목록을 종이에 적어 두면 해결됩니다.
「미들마치」 조지 엘리엇 · 1871~1872 · 약 1,000쪽 · 난이도 중상
영국 지방 도시의 여러 가족을 동시에 따라갑니다. 1871년 12월부터 1872년 12월까지 여덟 권으로 나뉘어 나온 책이라, 원래 1년에 걸쳐 읽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정밀도가 지금 기준으로도 놀랍습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되 속도를 원래대로 되돌리세요. 하루 20~30쪽이 이 책의 정상 속도입니다. 한 달 반이면 끝납니다.
20세기 — 소설이 자기 형식을 의심하기 시작한 시기
19세기 소설이 "세상을 어떻게 다 담을까"를 물었다면, 20세기 소설은 "담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틀린 것 아닌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 작품은 줄거리보다 누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 1925 · 약 200쪽 · 난이도 하
1920년대 뉴욕 교외에서 한 남자가 매일 밤 파티를 엽니다. 200쪽밖에 안 되는데 문장 밀도가 아주 높아서, 짧은 책으로 20세기 소설의 문체를 체감하기에 최적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화자의 태도가 어정쩡하게 느껴지는 것이 초반의 불편인데, 그게 이 소설의 설계입니다.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 1927 · 약 250쪽 · 난이도 상
한 가족이 등대에 가려다 못 가고, 시간이 흐르고, 다시 시도합니다. 사건은 그게 전부이고 나머지는 인물들의 의식 안에서 벌어집니다. 의식의 흐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율리시스」보다 이쪽이 훨씬 인간적인 입구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판단을 미루세요. 이 책은 소리 내어 읽거나 낭독을 들으면 갑자기 풀리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문장이 원래 호흡 단위로 설계돼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면 중단하셔도 됩니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 1942 · 약 150쪽 · 난이도 하
어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온 남자가 이후 겪는 일들을 건조하게 서술합니다. 문장이 짧고 쉬워서 이틀이면 읽히는데, 읽고 난 뒤에 훨씬 오래 남습니다. 뒤에서 다룰 번역 판본 문제가 가장 유명한 책이기도 합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어려울 리 없습니다. 다만 감정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 견디기 힘들다면, 그 감각이 정확한 독해입니다.
「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1967 · 약 500쪽 · 난이도 중상
한 가문의 백 년을 따라갑니다. 죽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4년 넘게 비가 오는데 아무도 이상해하지 않습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을 대표하는 책이고, 문장 자체는 오히려 화려하고 재미있습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되 가계도를 그리십시오. 등장인물 이름이 대를 이어 반복되는 것이 이 소설의 의도적 장치이자 최대 장벽입니다. 대부분의 판본에 가계도가 실려 있으니 그것부터 펴 놓고 읽으시면 됩니다.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 1987 · 약 350쪽 · 난이도 상
노예제에서 탈출한 여성과 그의 집에 머무는 존재의 이야기입니다. 1988년 퓰리처상 소설 부문 수상작이고(퓰리처 재단 기록), 20세기 후반 미국 소설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시간이 뒤섞이고 정보가 조금씩만 주어집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이 소설은 혼란이 의도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늦게 알려 주는 것이 주제와 직결됩니다. 다만 정서적으로 힘든 시기라면 미루셔도 됩니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 1989 · 약 300쪽 · 난이도 하
영국 저택의 집사가 자동차 여행을 하며 과거를 회상합니다. 1989년 부커상 수상작이며(부커상 기록), 저자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문장이 정중하고 평이해서 술술 읽히는데, 그 정중함 자체가 트릭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어려울 리 없습니다. 대신 지루하다고 느껴지면 그게 신호입니다. 화자가 무엇을 말하지 않고 있는지에 주목하면 완전히 다른 책이 됩니다.
최근 20여 년 — 아직 정전이 되지 않은 책들
최근 작품에는 고전에 없는 위험이 있습니다. 시간이 걸러 주지 않았다는 것. 대신 장점도 분명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문장으로 쓰였다는 것. 아래 다섯 권은 유행이 아니라 형식이나 시야에서 새로운 것을 한 가지씩 하고 있습니다.
「2666」 로베르토 볼라뇨 · 2004 · 약 1,200쪽 · 난이도 최상
저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유작으로, 다섯 부가 느슨하게 이어집니다. 한 부는 학자들의 이야기, 한 부는 멕시코 국경 도시의 연쇄 살인 기록입니다. 소설이 독자를 배려하지 않기로 작정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그만두셔도 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책은 대다수의 독자에게 맞지 않습니다. 특히 4부는 읽기 자체가 고통스럽게 설계돼 있습니다. 목록에 넣은 이유는 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페란테 · 2011 · 약 400쪽 · 난이도 하
나폴리 빈민가에서 자란 두 소녀의 우정을 따라갑니다. 4부작의 첫 권이고, 문장이 쉬운데도 인물의 질투와 애정이 놀랍도록 정교합니다. 최근 20년 소설 중 가장 중독성이 강한 축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초반에 동네 사람 이름이 대거 나오는데, 앞에 실린 인물 목록만 참고하시면 됩니다.
「아메리카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2013 · 약 600쪽 · 난이도 하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여성이 겪는 일들을 따라갑니다. 인종과 이민을 다루면서도 설교하지 않고, 연애 소설로도 완전히 성립합니다. 600쪽이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읽는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시간이 앞뒤로 오가는 구조에 적응하는 것 외에 장벽이 없습니다.
「링컨 인 더 바르도」 조지 손더스 · 2017 · 약 350쪽 · 난이도 상
링컨의 어린 아들이 묻힌 묘지에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2017년 부커상 수상작이고, 페이지 자체가 수백 개의 짧은 발언과 인용문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설의 외형이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최근 사례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판단을 미루세요. 이 책은 형식에 적응하는 데 딱 30쪽이 걸리고, 그 뒤로는 급격히 쉬워집니다. 다만 60쪽까지 가도 여전히 조각들이 흩어져 보인다면 그때는 중단하셔도 됩니다.
「파친코」 이민진 · 2017 · 약 550쪽 · 난이도 하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시작해 일본으로 건너간 한 가족의 4대를 따라갑니다. 문장이 평이하고 사건이 계속 이어져서, 두꺼운 소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데 좋습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다룬 대중적 입구이기도 합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이 책의 어려움은 문체가 아니라 소재의 무게에 있습니다. 문장 자체는 끝까지 친절합니다.
장르 — SF와 추리와 판타지
장르소설을 목록에 넣는 이유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래 여섯 권은 각자 자기 장르의 규칙을 새로 쓴 책이고, 그래서 이후 수십 년치 작품이 여기에 답하는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 1969 · 약 350쪽 · 난이도 중
성별이 고정되지 않은 종족이 사는 행성에 인간 사절이 파견됩니다. 1969년 네뷸러상과 1970년 휴고상 장편 부문을 모두 받았고, SF가 사고 실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준 결정적 사례입니다. 르 귄 재단 공식 사이트에 작가 자신의 설명이 남아 있습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초반의 낯선 명사들이 유일한 장벽이고, 100쪽 지나면 후반부는 거의 조난 생존기처럼 읽힙니다. 이 계열의 사고방식은 SF 사고 실험 편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듄」 프랭크 허버트 · 1965 · 약 800쪽 · 난이도 중상
사막 행성의 자원을 둘러싼 정치와 종교의 이야기입니다. 이듬해 제1회 네뷸러상 장편 부문을 받았고, 1966년 휴고상은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과 공동 수상했습니다. 생태학과 정치를 SF의 중심에 놓은 첫 대작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되 부록의 용어집을 먼저 훑으세요. 이 책은 설명 없이 고유명사를 던지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뒤에 용어집이 붙어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체감 난이도가 크게 내려갑니다.
「삼체」 류츠신 · 2008 · 약 450쪽 · 난이도 중
문화대혁명 시기에서 시작해 외계 문명과의 접촉으로 이어집니다. 켄 리우가 옮긴 영역판이 2015년 휴고상 장편 부문을 받았는데, 휴고상 기록상 번역 소설이 이 부문에서 수상한 첫 사례였습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문화대혁명 장면과 물리학 설명이 초반에 몰려 있어 가장 진입이 어렵습니다. 후반은 속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 1939 · 약 300쪽 · 난이도 하
고립된 섬에 초대받은 열 사람이 차례로 죽습니다.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설정의 완성형이고, 추리소설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에게 권하기 가장 안전한 책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어려울 리 없습니다. 이 책은 하룻밤에 끝납니다. 장르의 계보가 궁금해지면 추리소설 패턴 편으로 이어집니다.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 2005 · 약 350쪽 · 난이도 하
수학 교사가 이웃의 사건에 개입합니다. 트릭과 동기가 같은 자리에서 만나는 구조라 여러 나라에서 리메이크됐습니다. 일본 추리소설의 대중적 입구로 가장 널리 권해지는 작품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어려울 리 없습니다. 초반에 범행이 이미 공개되므로 이 책의 재미는 "누가"가 아니라 "어떻게 빠져나가는가"에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 J.R.R. 톨킨 · 1954~1955 · 약 1,300쪽 · 난이도 중상
현대 판타지의 원본입니다. 이후 나온 거의 모든 판타지가 이 책을 따르거나 일부러 거스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영화의 속도를 기대하면 반드시 실망합니다. 원작은 훨씬 느리고 훨씬 자주 멈춥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되 초반 샤이어 부분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느립니다. 여기서 포기한 독자가 대단히 많습니다. 세계 설계 자체가 궁금하시면 판타지 세계관 편을 먼저 읽고 오셔도 좋습니다.
한국문학과 비서구권 — 지도의 나머지 절반
세계문학이라는 말이 실제로는 서유럽과 미국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래 일곱 권은 그 지도의 나머지를 채웁니다. 한국문학은 특히 번역을 거치지 않고 읽을 수 있다는 특권이 있는데, 이 이점을 의외로 잘 안 씁니다.
「광장」 최인훈 · 1960 · 약 200쪽 · 난이도 중
분단 상황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200쪽 남짓인데 한국 현대소설의 출발점으로 가장 자주 지목되는 작품이고, 저자가 이후 여러 차례 개작해서 판본마다 문장이 다릅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관념적인 문장이 초반에 몰려 있습니다. 중반부터는 이야기로 굴러갑니다.
「토지」 박경리 · 1969~1994 · 5부작 · 난이도 중
경남 하동에서 시작해 만주까지, 구한말부터 광복까지를 다룹니다. 1969년 연재를 시작해 1994년에 완결한, 25년이 걸린 작품입니다. 판본에 따라 16권에서 21권까지 나뉘어 있습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다만 이 책에 대해서는 조언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완독을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1부만 읽고 몇 년 뒤에 2부로 돌아오는 독법이 이 작품에는 충분히 정당합니다.
「채식주의자」 한강 · 2007 · 약 250쪽 · 난이도 중
한 여성이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하면서 가족이 무너집니다. 세 편의 중편이 이어지는 구조이고, 2016년 데버러 스미스의 영역판으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작가와 번역자가 공동 수상했습니다. 저자는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노벨 위원회 발표).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다만 폭력 묘사가 정면으로 나오므로, 지금 그런 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라면 「소년이 온다」나 「흰」 같은 다른 작품부터 가셔도 좋습니다.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 2016 · 약 180쪽 · 난이도 하
한 여성의 생애를 통계 자료를 섞어 가며 건조하게 서술합니다. 문학적 장치가 적다는 비판과 그 건조함이 곧 형식이라는 옹호가 갈리는 작품이라, 논쟁까지 포함해서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어려울 리 없습니다. 두 시간이면 읽힙니다.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 1948 · 약 200쪽 · 난이도 중
눈 많은 온천 마을에 드나드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1935년부터 여러 잡지에 나뉘어 실렸고 1948년에 완성판이 나왔습니다. 저자는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사건보다 감각의 묘사가 중심이라 줄거리 요약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판단을 미루세요. 이 책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내용입니다. 그 상태를 30쪽쯤 견뎌 보고 여전히 답답하면 중단하셔도 됩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 1958 · 약 250쪽 · 난이도 하
식민 통치가 들어오기 전후의 이보족 마을을 그립니다.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유럽인이 쓰던 시대에, 안쪽에서 쓴 작품이라는 점이 결정적입니다. 문장은 대단히 평이합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으세요. 낯선 이름과 풍습이 초반에 몰릴 뿐이고, 이야기 자체는 명료합니다.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 1998 · 약 700쪽 · 난이도 상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세밀화가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집니다. 저자는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장마다 화자가 바뀌는데, 사람뿐 아니라 시체와 색과 그림 속 개까지 화자가 됩니다.
첫 50쪽이 어렵다면: 계속 읽되 화자 교체 방식에 익숙해질 때까지만 버티세요. 장 제목이 곧 화자입니다. 그것을 의식하면 갑자기 읽기 쉬워집니다.
번역 — 한국 독자가 판본을 골라야 하는 책들
한국 독자에게는 다른 나라 독자에게 없는 변수가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떤 번역으로 읽느냐입니다. 이건 취향 문제가 아니라 때로는 다른 책을 읽는 것에 가깝습니다.
중역인지 직역인지부터 봅니다. 오래된 판본 중에는 영어판을 거쳐 옮긴 것이 적지 않습니다. 「백년의 고독」의 경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이 스페인어 원전에서 옮긴 조구호 번역이고, 옮긴이가 문장의 흐름과 단락 구분을 임의로 손대지 않는 쪽을 택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러시아 문학도 마찬가지여서, 러시아어에서 직접 옮긴 판본인지 확인하는 것이 첫 단계입니다.
저본이 무엇인지 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김희영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2013년부터 나오기 시작해 2022년 전 13권으로 완간됐고, 1987년 프랑스 플레이아드판을 저본으로 삼았습니다(출판사 목록). 같은 작품이라도 저본이 다르면 문장이 달라집니다.
번역 논쟁이 있었던 책은 그 논쟁까지 알고 고릅니다. 대표적인 것이 카뮈의 「이방인」입니다. 2014년 번역가 이정서가 기존 번역, 특히 널리 읽히던 김화영 번역이 오역이라고 주장하며 새 번역을 내놓았고, 주인공의 살해 동기를 어떻게 옮기느냐를 두고 크게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여기서 판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150쪽짜리 책이니 두 판본을 다 읽어 보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고, 그렇게 해 보면 번역이 무엇인지에 관해 어떤 해설서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판본 확인이 필요한 계열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문체 자체가 내용인 작품(울프, 조이스, 포크너), 시적 밀도가 높은 작품(가와바타, 카뮈), 고유명사와 조어가 많은 작품(톨킨, 허버트), 오래전에 번역돼 개정되지 않은 작품. 반대로 이시구로나 페란테처럼 문장이 평이한 작가는 판본 차이가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마지막으로 방향을 뒤집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채식주의자」의 영역이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받은 뒤 한국에서는 그 번역이 원문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두고 긴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외국 문학을 번역으로 읽으며 감수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일이 반대 방향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번역서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겸손해집니다.
마치며 — 읽지 않은 책의 목록은 짧을수록 좋습니다
교양의 압박은 대개 읽어야 하는데 못 읽은 책의 목록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목록은 관리하지 않으면 계속 길어집니다.
제안은 간단합니다. 그 목록을 다섯 권으로 제한하십시오. 여섯 번째 책이 들어오려면 한 권을 빼야 합니다. 뺀 책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우선순위가 아닌 것입니다. 3년 뒤에 다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30권 중 아마 절반 이상은 당신에게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30권을 다 읽은 사람보다 세 권을 제대로 읽고 그중 한 권을 다시 읽은 사람이 대체로 더 멀리 갑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붙들고 싶은 책이 있다면,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다음 글 어려운 책을 읽어내는 법에서 그 방법과, 잘 포기하는 법을 함께 다룹니다. 같은 고민을 영화로 옮긴 글은 영화 명작, 어디서 시작할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