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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은 왜 세계를 다시 썼나 — 사과, 프린키피아, 그리고 예측이라는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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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ju Kim
- @fjvbn20031
들어가며 — 사과는 머리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1726년 4월 15일, 런던 켄싱턴의 한 정원에서 여든세 살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젊은 방문객과 차를 마시며 옛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사과나무 그늘 아래였습니다. 60년 전 링컨셔의 고향 집 정원에 앉아 있을 때 사과 하나가 떨어졌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왜 사과는 옆으로도 위로도 아니고 언제나 땅의 중심을 향해 곧장 떨어지는가.
이 대화를 받아 적은 사람은 골동품 연구가 윌리엄 스터클리(William Stukeley)였고, 그는 1752년에 쓴 뉴턴 회고록에 이 장면을 남겼습니다. 원고는 왕립학회가 2010년에 디지털로 공개해 지금은 누구나 그 문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첫째, 사과가 머리에 떨어졌다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각색은 후대의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의 출처는 목격자가 아니라 60년 뒤의 뉴턴 자신입니다.
두 번째 사실이 더 흥미롭습니다. 여든이 넘은 뉴턴은 이 일화를 여러 사람에게 반복해 들려줬습니다. 조카사위 존 컨듀잇도 받아 적었고, 볼테르는 뉴턴의 조카에게서 들었다며 프랑스에 퍼뜨렸습니다. 하필 그 시기에, 그는 미적분의 우선권을 두고 라이프니츠 진영과 20년 가까이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사과 이야기는 자신의 발견을 1666년으로 못 박아 주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과학사가들이 이 일화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되 그 기능을 함께 읽는 이유입니다. 링컨셔 울즈소프의 그 나무는 지금도 서 있고, 1816년 바람에 쓰러진 뒤 뿌리에서 다시 자란 그루라고 전해집니다.
"기적의 해"라는 압축된 서사
1665년 여름, 런던에 대역병이 돌자 케임브리지 대학은 문을 닫았습니다. 스물두 살의 뉴턴은 고향으로 내려가 약 18개월을 보냅니다. 이 시기를 흔히 기적의 해라 부릅니다. 미적분, 빛과 색의 이론, 중력의 착상이 모두 이 몇 달에 쏟아졌다는 이야기죠.
이 서사의 출처 역시 상당 부분 뉴턴 본인입니다. 그는 1710년대에 쓴 회고 메모에서, 그 시절 자신이 발명에 가장 좋은 나이였고 그 뒤 어느 때보다 수학과 자연철학에 몰두했다고 적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무한급수와 유율법의 핵심 발상, 프리즘으로 흰빛을 나누는 실험의 출발, 달의 운동과 지상의 낙하를 견주어 보려는 시도가 모두 이 무렵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 웨스트폴의 뉴턴 평전(1980) 이후의 연구들은 훨씬 덜 극적인 그림을 보여 줍니다. 1666년의 뉴턴은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문제를 얻었습니다. 그해 달의 운동을 검산할 때 그는 지구 반지름 값을 부정확하게 썼고, 계산은 "제법 가깝게" 맞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인 수학적 걸림돌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구처럼 큰 구를 두고 낙하를 계산할 때, 그 구 전체의 인력을 중심에 모인 한 점처럼 다뤄도 되는지를 증명해야 했는데, 뉴턴이 이 정리를 증명한 것은 1685년입니다. 거의 20년 뒤입니다.
1679년과 1680년 로버트 훅과 주고받은 편지가 그를 다시 이 문제로 끌어들였고, 1684년의 방문 하나가 마침내 책을 만들어 냅니다. 다시 말해 기적의 해는 한 해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20년에 걸친 작업을 한 해로 접어 놓은 이야기입니다. 위대한 발견의 이야기는 거의 언제나 이런 식으로 압축됩니다. 우리는 결말을 알기 때문에 도중의 막다른 길들을 지웁니다.
핼리, 물고기 책, 그리고 1687년
1684년 1월 어느 날,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세 사람이 논쟁을 벌였습니다. 로버트 훅, 크리스토퍼 렌, 그리고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주제는 이것이었습니다.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하면 행성은 어떤 궤도를 그리는가. 훅은 자기가 증명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고, 렌은 두 달 안에 증명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40실링짜리 책을 주겠다고 걸었습니다. 아무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해 8월, 핼리가 케임브리지로 뉴턴을 찾아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뉴턴은 곧바로 타원이라고 답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계산해 봤다고 했고, 종이를 찾았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계산해 보내겠다고 했고, 그해 11월 아홉 쪽짜리 논문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논문은 멈추지 않고 자라 3권짜리 책이 되었습니다.
출판 과정에는 지금 봐도 웃음이 나는 사정이 끼어 있습니다. 왕립학회는 그 직전에 물고기 도감 한 권을 내느라 출판 예산을 다 써 버린 상태였습니다. 책은 팔리지 않았고, 학회는 핼리에게 급여 대신 팔리지 않은 물고기 책을 다발로 지급했습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책 중 하나는 학회의 금고가 물고기 도감으로 비어 있던 탓에 핼리의 사비로 출판되었습니다. 표지에는 왕립학회 회장 새뮤얼 피프스의 출판 허가가 1686년 7월 5일자로 찍혔고, 책은 1687년 여름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줄여서 프린키피아입니다.
이 책이 한 일은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하늘과 땅을 같은 법으로 묶었습니다. 그전까지 천상은 완전하고 영원한 원운동의 영역이었고, 지상은 부패하고 불규칙한 낙하의 영역이었습니다. 두 세계는 다른 규칙을 따른다고 여겨졌습니다. 뉴턴은 세 가지 운동 법칙과 하나의 인력 법칙으로 사과의 낙하와 달의 공전, 조수의 오르내림, 혜성의 궤도, 지구 자전축의 느린 흔들림을 같은 계산 안에 넣었습니다. 우주에 특별한 장소가 없다는 생각, 여기서 성립하는 법칙이 저기서도 성립한다는 생각이 이 책에서 물리학의 기본 전제가 됩니다.
읽기는 몹시 어려웠습니다. 뉴턴은 미적분으로 얻은 결과를 고전 기하학의 언어로 다시 써서 실었고, 훗날 수학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어렵게 썼다고 말했습니다. 케임브리지의 한 학생이 길을 지나는 뉴턴을 보고 자기도 남도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쓴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인쇄술이 만든 오류 수정의 회로 위에서 판을 거듭하며 유럽의 공용 언어가 됩니다.
미적분은 누구의 것인가 — 20년의 우선권 전쟁
뉴턴은 1660년대에 미적분의 핵심을 손에 넣고도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원고를 몇몇 지인에게 돌렸을 뿐입니다. 그가 유율법을 정식으로 인쇄한 것은 1704년, 광학 책의 부록으로였습니다. 거의 40년을 서랍에 둔 셈입니다.
그사이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는 1675년 무렵 독자적으로 같은 도구를 만들어 1684년에 출판했습니다. 표기법은 그의 것이 훨씬 좋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미분과 적분을 쓸 때 사용하는 기호는 뉴턴의 점이 아니라 라이프니츠의 것입니다.
1700년대 들어 다툼은 추해집니다. 표절 시비가 오갔고, 1712년 왕립학회는 진상 조사 위원회를 꾸려 이듬해 보고서를 냈습니다. 결론은 뉴턴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때 왕립학회 회장이 뉴턴 본인이었고, 위원회를 그가 지명했으며, 보고서의 상당 부분을 그가 직접 썼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 보고서에 대한 익명 서평까지 학회지에 실었습니다. 오늘의 기준으로는 이해충돌의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지금의 정설은 둘의 독립적 발견입니다. 그리고 승부의 대가는 엉뚱한 곳에서 치러졌습니다. 영국 수학계는 애국심 때문에 뉴턴의 표기법을 고수했고, 그 결과 18세기 내내 대륙의 해석학 발전에 뒤처졌습니다. 우선권 다툼에서 이긴 쪽이 100년을 손해 본 것입니다.
우리가 발명한 뉴턴 — 연금술 원고와 거인의 어깨
1936년 7월,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뉴턴의 유고가 329개 묶음으로 쪼개져 팔렸습니다. 후손이 대대로 보관하다 내놓은, 이른바 "과학적이지 않은" 원고들이었습니다. 낙찰 총액은 1만 파운드에 못 미쳤습니다. 이 경매에서 연금술 원고를 대량으로 사들인 사람이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였습니다. 신학 원고의 상당수는 수집가 에이브러햄 야후다가 가져갔고, 지금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 있습니다.
원고를 읽은 케인스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6년의 유명한 글에서 뉴턴을 이성의 시대의 첫 인물이 아니라 "마지막 마법사"라고 불렀습니다. 분량이 그렇게 말해 줍니다. 뉴턴이 연금술에 쓴 글은 100만 단어 안팎으로 추정되고, 성서 연대기와 신학에 쓴 글은 그보다도 많습니다. 물리학과 수학에 쓴 분량을 넘어섭니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적 신앙을 평생 숨겼고, 성서의 예언을 연대로 환산하는 계산에 매달렸으며, 어떤 원고에서는 세계의 종말이 적어도 2060년 이전에는 오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뉴턴이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정리하면 요점을 놓칩니다. 요점은 경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늦게 그어졌다는 것입니다. 17세기에는 과학자라는 단어조차 없었습니다. 그 말은 1830년대에 윌리엄 휴얼이 만들었습니다. 뉴턴은 자신을 자연철학자라 여겼고, 물질의 변환을 다루는 연금술과 신의 설계를 읽는 신학과 천체의 운동을 계산하는 역학이 그에게는 하나의 기획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근대 과학자 뉴턴"은 후대가 그의 유고에서 절반을 걷어 내고 조립한 초상입니다.
같은 종류의 조립이 그의 가장 유명한 문장에도 일어났습니다. 1676년 2월 5일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뉴턴은, 자신이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겸손의 표본으로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두 겹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저작권입니다. 난쟁이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앉는다는 비유는 12세기 샤르트르의 베르나르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며, 존 솔즈베리가 1159년의 책에 적어 전했습니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1965년에 이 문구의 이동 경로만 따라간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즉 겸손의 문장 자체가 남에게서 빌려 온 관용구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조입니다. 훅은 키가 작고 등이 굽은 사람이었으니 저 문장이 조롱이었다는 해석이 오래 인기를 끌었습니다. 매력적이지만 근거는 약합니다. 문구는 당대에 흔한 상투어였고, 문제의 편지는 광학 논쟁을 봉합하려는 화해의 어조였으며, 훅의 신체를 묘사한 기록은 대체로 그의 노년의 것입니다. 널리 퍼진 해석이 늘 근거가 두터운 해석은 아닙니다. 다만 뉴턴이 그 뒤 훅의 이름을 프린키피아에서 지워 나간 것도 사실이니, 겸손과 적의가 같은 사람 안에 공존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200년 뒤의 수정 —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한 일
프린키피아 이후 200년 동안 뉴턴 체계는 거의 완벽하게 작동했습니다. 1737년 라플란드 원정대는 지구가 극 쪽으로 납작하다는 뉴턴의 예측을 측량으로 확인했고, 1758년 크리스마스에는 핼리가 계산한 대로 혜성이 돌아왔습니다. 1846년에는 천왕성 궤도의 어긋남을 계산해 해왕성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찍었고, 그 자리에 실제로 행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끝내 맞지 않았습니다. 수성의 근일점이 100년에 43각초씩 이론보다 더 돌았습니다. 아주 작은 오차였고, 천문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행성을 가정하며 100년 가까이 이 구멍을 메우려 했습니다. 1915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새 행성 없이 이 값을 정확히 계산해 냈습니다. 4년 뒤 개기일식에서 별빛이 태양 곁을 지나며 휘는 것이 관측되면서 판은 완전히 넘어갑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정리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이 틀렸음을 보인 것이 아니라, 뉴턴이 맞는 범위를 보였습니다. 속도가 빛에 비해 느리고 중력이 약한 조건에서 일반상대성이론의 방정식은 뉴턴의 식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오늘도 위성 궤도와 로켓 궤적과 교량 설계는 뉴턴 역학으로 계산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1989년의 글에서 정리한 대로, 틀림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믿음과 지구가 완전한 구라는 믿음은 둘 다 틀렸지만, 두 번째가 훨씬 덜 틀렸습니다.
| 물음 | 뉴턴 (1687) | 아인슈타인 (1915) |
|---|---|---|
| 중력이란 무엇인가 | 질량 사이에 즉시 작용하는 힘 | 질량이 휘어 놓은 시공간의 기하 |
| 수성 근일점 | 100년에 43각초가 설명되지 않음 | 오차 없이 계산됨 |
| 빛은 휘는가 | 사실상 다루지 않음 | 태양 곁에서 휨, 1919년 일식에서 확인 |
| 잘 맞는 범위 | 느린 속도, 약한 중력 | 강한 중력, 빛의 속도에 가까운 운동 |
| 오늘 쓰는 곳 | 위성 궤도, 로켓 궤적, 구조 설계 | GPS 시계 보정, 중력파, 블랙홀 |
이 표에서 읽어야 할 것은 승패가 아닙니다. GPS 위성의 시계는 하루에 수십 마이크로초씩 지상의 시계와 어긋나고, 이를 보정하지 않으면 위치 오차가 하루 만에 수 킬로미터로 벌어집니다. 200년 넘게 잘 작동한 이론이 특정 조건에서 무너지고, 더 넓은 이론이 그것을 특수한 경우로 품는 것 —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입니다.
이 설명은 무엇을 예측하는가
뉴턴에게서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습관은 만유인력의 공식이 아닙니다. 프린키피아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한 능력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말한 능력이었습니다. 지구가 납작할 것이다, 혜성이 76년쯤 뒤에 돌아올 것이다. 두 예측 모두 틀릴 수 있었고, 그래서 맞았을 때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기준은 물리학 바깥에서도 그대로 쓸 수 있습니다. 어떤 주장을 만났을 때 순서대로 다섯 가지를 물어보십시오.
- 이 설명은 무엇을 예측하는가. 사후 해석과 사전 예측을 가릅니다. 주가가 내린 뒤에 이유를 대는 설명은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고, 무엇이든 설명하는 설명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 무엇이 관측되면 이 주장이 틀리는가. 주장하는 사람이 이 질문에 답을 못 하거나 답하기를 꺼린다면, 그것은 주장이 아니라 입장입니다.
- 숫자와 기한이 붙는가. 곧, 상당히, 대폭 같은 말은 검증을 피해 갑니다. 얼마나, 언제까지, 어느 정도 오차로인지가 붙는 순간 주장은 시험대에 오릅니다.
- 어디까지 맞는가. 모든 이론에는 적용 범위가 있습니다. 뉴턴 역학이 그랬듯, 좋은 주장은 자기가 통하지 않는 영역을 스스로 말할 수 있습니다.
- 틀렸을 때 무엇을 고쳤는가. 과거의 예측이 빗나갔을 때 조건을 슬쩍 바꿔 살아남았는지, 모형을 고쳤는지를 봅니다. 전자는 점성술의 방식이고 후자는 과학의 방식입니다.
다섯 질문 모두 상대의 지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을 몰라도, 통계를 몰라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 첫 번째 질문에서 대화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마치며 — 수정될 수 있어서 살아남는 것들
뉴턴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남는 것은 천재 한 명이 아니라 이상한 조합입니다. 사과 일화를 여든셋에 반복해 들려준 노인, 물고기 도감 때문에 남의 돈으로 출판된 책, 자기가 회장인 학회에 자기 사건의 판결문을 써 넣은 사람, 물리학보다 연금술과 성서 연대기에 더 많은 밤을 쓴 자연철학자.
그런데도 그가 만든 체계는 200년을 버텼고, 무너진 방식마저 후대에 쓸모가 있었습니다. 뉴턴 역학은 반박당해 폐기된 것이 아니라 경계가 그어지며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아남는 주장은 반박이 불가능한 주장이 아니라, 어디서 틀리는지 말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오늘 뉴스나 회의에서 그럴듯한 설명을 만나면 한 문장만 던져 보십시오. 그래서 이 설명은 다음에 무엇이 일어난다고 말하는가. 그 대답의 유무가, 300년 전 링컨셔의 정원에서 시작된 방법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