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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ju Kim
- @fjvbn20031
들어가며
세상에는 기억되지 않는 날들이 있습니다.
너무 평범해서, 너무 똑같아서, 일주일만 지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릴 수 없는 그런 날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사실 그런 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날을 기다리며 삽니다. 생일, 여행, 합격 발표, 누군가를 처음 만난 날.
그러나 그런 날들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수한 보통의 날들입니다.
그 보통의 날들은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고, 누구에게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한 사람의 삶을 진짜로 떠받치고 있는 것은 그런 날들인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하루에 관한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어느 평범한 화요일에 관한.
아침 여섯 시 사십 분
알람이 울리기 삼 분 전에 윤서는 눈을 떴다.
그녀는 늘 그랬다. 몸이 알람보다 먼저 깼다. 마치 잠든 동안에도 어딘가에서 시계가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천장의 익숙한 얼룩, 커튼 사이로 새어 드는 흐린 빛, 옆방에서 들려오는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았다.
윤서는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일으키기 직전의 그 짧은 망설임을 그녀는 좋아했다.
하루 중 누구의 것도 아닌 유일한 시간. 아직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시간.
그녀는 스물아홉이었다. 작은 회사에서 회계를 맡고 있었고, 혼자 살았고, 특별히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그녀는 늘 똑같이 대답했다. 그냥 그래요, 별일 없어요.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별일이 없었다.
그녀의 삶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 파문도 없고, 깊이도 알 수 없는.
가끔 윤서는 생각했다. 이렇게 별일 없이 흘러가는 날들이 다 모이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누군가 그녀의 삶을 책으로 쓴다면, 그 책에는 무슨 이야기가 적힐까.
아마 아무것도 적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사실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일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배경이 되어야 했고, 윤서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대 뒤에서 조용히 불을 켜고 끄는, 이름 없는 사람.
알람이 울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알람을 껐다. 그리고 하루가 시작되었다.
부엌은 차가웠다. 윤서는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어제 사 둔 식빵 봉지를 열었다.
식빵은 끝에서 두 장째였다. 그녀는 마지막 한 장을 남겨 두고 두 번째 장을 꺼내 토스터에 넣었다.
마지막 장을 남기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무언가가 완전히 끝나 버리는 걸 그녀는 늘 조금 두려워했다.
우유의 마지막 한 모금, 치약의 마지막 한 짜임, 노트의 마지막 한 장. 그녀는 늘 그 끝을 조금 남겨 두었다. 끝이 보이면, 마음이 서늘해졌으니까.
창밖으로 길 건너 빵집 셔터가 절반쯤 올라가는 게 보였다. 새벽 빵집 주인은 늘 윤서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한 번도 대화를 나눠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 셔터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면 윤서는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세상에 자기 말고도 깨어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토스트가 튀어 올랐다. 살짝 탔다. 그녀는 그대로 먹었다.
탄 자리가 조금 썼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은 아침. 그것이 그녀의 하루를 여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창가에 잠시 서 있었다. 거리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고, 도시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윤서는 그 풍경을 좋아했다. 세상이 아직 소란해지기 전의, 잠깐의 고요를.
여덟 시 십이 분, 지하철
지하철은 만원이었다.
윤서는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는 사람들 틈에 끼여 섰다. 누구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모두가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눈을 감거나,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한 칸 안에 있었지만, 그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윤서는 가끔 이 침묵이 신기했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도, 모두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두르고 있었다.
어깨가 닿고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데도, 그들은 각자의 섬이었다. 어쩌면 도시에 산다는 건, 수백만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윤서는 이 시간을 미워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 익숙한 안내 방송, 매일 같은 자리에서 내리는 낯익은 얼굴들.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일종의 리듬이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그녀만의 조용한 박자.
매일 같은 칸, 같은 손잡이, 같은 광고판. 그 변하지 않음이 그녀를 지탱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뀔 때, 변하지 않는 것 하나쯤 있다는 건 작은 위로였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한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손에는 화분이 들려 있었다. 작은 토마토 모종이었다.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분을 가슴에 꼭 안았다. 사람들이 밀릴 때마다 노인은 몸을 비틀어 화분을 보호했다.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것이라는 듯이.
윤서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 복잡한 출근길에 토마토 모종을 들고 가는 사람이라니.
어디로 가는 걸까. 누구에게 주려는 걸까, 아니면 자기 베란다에 심으려는 걸까. 노인의 손마디는 굵었고, 화분을 받친 손가락은 흙으로 살짝 물들어 있었다.
작은 모종은 연약했다. 줄기는 아직 가늘었고, 잎은 손톱만 했다.
저렇게 작은 것이 자라서 언젠가 빨간 열매를 맺을 거라고 생각하니, 윤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모든 큰 것은 한때 저렇게 작았다. 모든 단단한 것은 한때 저렇게 연약했다.
다음 역에서 노인이 내렸다. 내리기 직전, 노인은 윤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아주 잠깐, 멋쩍게 웃었다. 마치 별것 아닌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윤서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문이 닫히고, 노인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작은 초록빛 모종은 윤서의 머릿속에 한참 남아 있었다.
출근길 내내, 그녀는 그 노인이 무사히 집에 도착해 모종을 심는 모습을 상상했다. 굵은 손가락이 흙을 다독이고, 작은 줄기가 새 자리에서 똑바로 서는 모습을.
이상한 일이었다.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은 사람인데, 그 노인의 하루가 궁금했다. 그가 누군가를 위해 그 모종을 키우는 거라면, 그 누군가는 분명 사랑받는 사람일 거라고, 윤서는 생각했다.
열 시 삼십 분, 사무실
사무실은 늘 그렇듯 형광등 아래 가라앉아 있었다.
윤서는 회계 업무를 했다. 숫자들을 맞추고, 영수증을 정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
누구도 그녀의 일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만 사람들은 그녀를 찾았다. 잘 굴러갈 때, 그녀의 일은 보이지 않았다. 잘 만든 다리처럼, 잘 쓰인 글의 띄어쓰기처럼.
윤서는 그것이 불만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일에는 보이지 않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녀가 맞춘 숫자들 덕분에 회사가 굴러갔고, 사람들이 월급을 받았고, 누군가의 가족이 저녁을 먹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그녀는 알았다. 그것으로 충분할 때도 있었다.
숫자는 정직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핑계를 대지 않았다. 맞으면 맞았고, 틀리면 틀렸다. 윤서는 그 정직함이 좋았다. 사람의 마음과 달리, 숫자는 늘 답이 있었으니까.
옆자리의 민호가 한숨을 쉬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윤서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민호가 멈칫했다. 누군가 자신의 한숨을 들어 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어머니가 병원에 계셔서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라는 말. 윤서는 그 말을 알았다. 가장 무거운 것을 가장 가벼운 척 내려놓을 때 쓰는 말.
그녀 자신도 매일 쓰는 말이었으니까. 별일 없어요, 그냥 그래요. 그 말 뒤에 얼마나 많은 것이 숨어 있는지, 그녀는 잘 알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서랍에서 비타민 음료 하나를 꺼냈다. 점심에 마시려고 사 둔 것이었다.
"이거라도 드세요."
민호는 그 작은 병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짧은 침묵 동안, 그의 눈가가 잠깐 붉어진 것을 윤서는 못 본 척했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신다는 말. 윤서도 몇 해 전, 똑같은 말을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따뜻한 음료 하나를 건넸더라면, 어땠을까. 그녀는 그 마음을 이제야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것뿐이었다. 거창한 위로도, 깊은 대화도 없었다.
윤서는 그에게 힘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 잘될 거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말들이 때로 얼마나 공허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작은 병 하나를 건넸을 뿐이다.
하지만 그날 오후 내내 민호의 한숨은 들리지 않았다. 윤서는 그걸 알아챘다.
가끔은 말보다 작은 것 하나가 더 멀리 가닿는다는 걸, 그녀는 그날 다시 배웠다.
오후 어느 순간,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 쪽으로 가다가 잠깐 멈춰 섰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윤서는 괜찮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작은 끄덕임 안에, 두 사람만 아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점심, 혼자
윤서는 회사 근처 공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편의점 김밥과 따뜻한 커피. 벤치는 차가웠지만 햇볕이 좋았다.
구름이 잠깐 걷히면서 봄볕이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윤서는 눈을 감고 그 온기를 느꼈다.
햇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렸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행복한 사람에게도 외로운 사람에게도. 그 사실이 그녀를 조금 위로했다.
세상이 아무리 불공평해도, 적어도 봄볕만은 모두에게 똑같이 닿았다. 윤서는 그 작은 공평함에 오래 기대어 살아왔다.
근처에서 아이 둘이 비둘기를 쫓고 있었다. 비둘기는 도망가는 척하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아이들은 그때마다 까르르 웃었다.
한 아이가 넘어졌다. 울 듯 말 듯 입을 비죽거리던 아이는, 다른 아이가 손을 내밀자 금세 다시 웃으며 일어났다.
윤서는 생각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을 찾기 어려워지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있어도 그 손을 잡기를 망설이게 되는 일인지도.
그 생각은 조금 쓸쓸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다정하기도 했다. 손을 내미는 일도, 그 손을 잡는 일도, 결국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아이였을 때, 윤서는 넘어지면 큰 소리로 울었다. 그러면 누군가 달려와 일으켜 주었다.
어른이 된 지금, 그녀는 넘어져도 소리 내지 않았다. 혼자 조용히 일어나 흙을 털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걸었다. 그것이 어른의 방식이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그 방식이 외로웠다.
그녀는 마지막 김밥 한 조각을 비둘기에게 던졌다. 비둘기들이 몰려들었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그 순간 윤서는 자신이 무언가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이 공원의, 이 도시의, 이 봄날의. 작은 김밥 한 조각으로 그녀는 세상과 연결되었다.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윤서는 빈 도시락 통을 가방에 넣고, 잠시 더 햇볕 속에 앉아 있었다. 일터로 돌아가면 다시 숫자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햇볕의 기억이, 오후를 견디는 작은 연료가 되어 줄 것을 그녀는 알았다.
오후 세 시, 작은 실수
오후에 윤서는 실수를 했다.
거래처에 보낼 금액을 한 자리 잘못 입력한 것이다. 다행히 결재 전에 발견했지만, 잠깐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녀는 숨을 골랐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고, 발견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예전의 윤서라면 하루 종일 그 실수를 곱씹었을 것이다. 자신을 탓하고, 무능하다고 여기고, 집에 가는 길까지 그 무게를 짊어졌을 것이다.
밤에 잠들기 전에도 그 장면이 떠올라 이불을 걷어찼을 것이다. 작은 실수 하나가 그녀의 하루 전체를, 때로는 일주일 전체를 어둡게 물들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침의 토마토 모종을 안고 있던 노인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민호에게 음료를 건넸을 때의 그 작은 온기 때문일까.
윤서는 실수를 고치고, 한 번 더 확인하고, 그리고 그냥 넘어갔다.
그녀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사무실 건너편 건물 유리에 부서지고 있었다. 그 빛을 보며 윤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있다. 그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이.
그녀는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아주 조금씩 배워 가고 있었다. 그것은 회계 장부를 맞추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장부의 오차는 찾아내면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오차는, 찾아내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도 윤서는 오늘, 처음으로 그 오차를 그냥 안고 가 보기로 했다.
저녁 일곱 시, 돌아오는 길
퇴근길의 지하철은 아침보다 더 지쳐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루치의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윤서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어딘가 낯선 얼굴이었다. 거울 속의 자신이 아니라, 유리에 반사된, 조금 더 흐릿하고 조금 더 솔직한 얼굴.
저 얼굴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을까, 윤서는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었고, 작은 실수를 했고, 작은 두려움을 넘었다.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이지만,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 하루였는지도 몰랐다.
집 앞 마트에 들렀다. 식빵이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잠시 채소 코너 앞에 멈춰 섰다.
토마토 모종이 작은 화분에 담겨 팔리고 있었다. 아침의 그 노인이 떠올랐다.
윤서는 망설였다. 식물을 키워 본 적이 없었다. 매번 시들게 만들까 봐, 책임지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한 번도 사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을 돌본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그것이 죽으면, 그건 그녀의 잘못이 될 테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 작은 초록빛이 자꾸 마음에 밟혔다. 그녀는 모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화분은 가벼웠다. 그러나 그 가벼운 무게 안에, 어떤 약속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가격은 이천 원이었다. 단돈 이천 원으로 살 수 있는 작은 책임. 작은 돌봄. 작은 내일.
그녀는 그것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손이 살짝 떨렸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오랫동안 그녀는 무언가를 책임지는 일을 피해 왔다. 화분 하나, 약속 하나, 마음 하나. 잃을까 봐, 실패할까 봐, 늘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작고 초록빛인, 단돈 이천 원짜리 한 걸음을.
계산대의 점원은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였다. 모종을 천천히 봉지에 담아 주며, 아주머니가 한마디 건넸다.
"이건 햇볕만 잘 쬐어 주면 잘 커요. 물은 너무 많이 주지 말고."
윤서는 조금 놀랐다. 마트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건넨 적은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식물은 처음이라서요."
"처음엔 다 그래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늘어요."
아주머니가 웃었다. 윤서도 웃었다. 별것 아닌 대화였지만, 그 짧은 몇 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는다고.
밤 아홉 시
집에 돌아온 윤서는 모종을 창가에 놓았다.
빵집 셔터가 보이는 그 창가. 그녀는 작은 컵에 물을 떠 와서 흙을 적셨다.
흙냄새가 났다. 비 온 뒤의 땅 같은, 오래되었지만 살아 있는 냄새.
그 냄새를 맡자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의 작은 텃밭. 윤서는 그 흙냄새를 좋아했었다.
여름이면 할머니는 윤서의 손을 잡고 텃밭으로 데려갔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따서, 옷에 쓱쓱 닦아 그 자리에서 베어 물게 했다. 햇볕에 데워진 토마토는 따뜻하고 달았다. 그 맛을, 윤서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할머니는 늘 말했다. 식물은 거짓말을 안 한다고. 정성을 주면 주는 만큼 자라고, 잊으면 잊은 만큼 시든다고. 그 말을 잊고 살았는데, 흙냄새 한 번에 다시 떠올랐다.
윤서는 그 앞에 한참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잘 부탁해."
그녀는 모종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어색했다. 혼자 사는 집에서 소리 내어 말을 한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식물이 대답할 리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제 이 집에는 그녀 말고도 살아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아침이면 그 모종에게 물을 주어야 할 것이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로 옮겨 주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하루에 작은 의무가, 작은 이유가 하나 생긴 것이다.
오랫동안 윤서의 아침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저 일어나야 하니까 일어났고, 가야 하니까 갔다. 그런데 이제, 내일 아침에는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을 기다리는, 햇볕을 기다리는, 아주 작은 누군가가.
윤서는 마지막 남겨 두었던 식빵 한 장을 꺼내 구웠다. 오늘은 그 마지막 한 장을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일이면 새 식빵이 있을 테니까. 끝나는 것이 두렵지 않은 날도 있는 법이다.
토스트는 적당히 노릇하게 구워졌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모종을 바라보며, 천천히 토스트를 먹었다.
빵 한 조각의 온기, 발밑의 차가운 바닥, 창에 비친 자신의 흐릿한 윤곽. 그 모든 것이 오늘 밤따라 또렷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흐려져 있던 무언가에 다시 초점이 맞은 것처럼.
길 건너 빵집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빵집 주인도 어딘가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을 것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 사람도, 토마토 모종을 안고 있던 노인도, 한숨을 거둔 민호도, 비둘기를 쫓던 아이들도, 모종을 봉지에 담아 준 마트 아주머니도, 모두 각자의 평범한 하루를 살아 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작은 두려움을 넘고, 작은 친절을 주고받고, 작은 끝과 작은 시작을 지나왔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평범한 하루들로 떠받쳐지고 있었다.
윤서는 빈 접시를 들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창밖은 어두웠고, 방 안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외롭지 않았다. 창가에 작은 초록빛이 함께 있었으니까.
마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문에 날 만한 일도,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일도, 일기에 굵은 글씨로 적을 만한 일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화요일이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잊혀질, 그런 하루.
그러나 윤서는 알고 있었다. 오늘 하루가 결코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안에서는 작은 것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날들인지도 모른다.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흘려보낼 뻔한 작은 순간들.
모르는 사람의 멋쩍은 웃음, 옆자리 동료에게 건넨 음료 한 병, 마트 아주머니의 다정한 한마디, 손바닥에 올려놓은 작은 모종.
윤서는 토스트를 다 먹고, 접시를 씻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창가의 모종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걸 알았다. 조용히, 천천히, 자라고 있다는 걸.
그녀는 문득, 자기 삶에 관한 책을 다시 떠올렸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그 책.
하지만 어쩌면, 그 책에는 오늘 같은 날들이 적혀 있을지도 몰랐다. 화려하지 않지만 다정한, 기억되지 않지만 살아 볼 만한, 그런 평범한 화요일들이.
내일도 평범한 수요일일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평범함은 때로 가장 다정한 형태의 기적이니까.
내일 아침이면, 그녀는 또 알람보다 삼 분 먼저 깨어날 것이다. 차가운 부엌에서 새 식빵을 굽고, 창가의 모종에 물을 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지하철에 오르고, 숫자들을 맞추고, 누군가의 한숨을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평범함 속에, 오늘처럼 작은 빛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챌 수만 있다면.
윤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알람이 울리기 삼 분 전에 깨어날, 또 하나의 평범한 아침을 향해 천천히 잠들었다.
창가에서는 작은 모종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조금씩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저는 자꾸 멈춰 서서, 제가 흘려보낸 화요일들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날을 기다리며 살지만, 정작 삶의 대부분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평범한 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평범한 화요일의 윤서는 영웅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꾸지도, 위대한 결단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작은 친절을 베풀고, 작은 두려움을 넘어서고, 작은 생명을 집에 들였을 뿐입니다.
윤서 같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 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윤서일지도 모릅니다. 화려한 서사 없이, 묵묵히 하루를 살아 내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기록되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그 작은 선택들이라고.
모르는 이에게 건네는 미소, 지친 동료에게 내미는 손,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은 용기. 이런 것들이 모여, 기억되지 않는 평범한 날들조차 살아 볼 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오늘이 당신에게 평범한 하루라면, 그 평범함 속에 숨어 있을 작은 다정함을 한 번쯤 알아채 보시길 바랍니다.
어쩌면 이미 당신 곁에, 토마토 모종 같은 작은 기적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