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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 우리는 왜 분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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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같은 사실, 다른 세계

여기 한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뉴스를 봅니다. 같은 화면, 같은 문장, 같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화면이 꺼지는 순간,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본 사람처럼 자리를 뜹니다. 한 사람은 안도하고, 다른 사람은 분노합니다. 같은 정보가 어떻게 이렇게 다른 결론으로 이어질까요?

이 장면은 오늘날 많은 사회가 겪는 양극화의 축소판입니다. 양극화란 단순히 의견이 다른 상태가 아닙니다. 의견 차이는 늘 있어 왔고, 어떤 면에서는 건강한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 차이가 점점 깊어지고, 상대를 단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적으로 느끼게 되는 단계입니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는 토론할 수 있지만, 적과는 토론하지 않습니다. 적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압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양극화의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이 전환 — 상대를 토론 상대에서 적으로 바꾸어 놓는 순간 — 에 있습니다.

이 글은 어느 한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정 정파를 편들거나 어떤 입장이 더 분열적이라고 손가락질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한 발 떨어져, 분열이 일어나는 메커니즘 그 자체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왜 우리는 갈라지는가. 우리 마음의 어떤 작동이, 우리가 만든 어떤 도구가, 우리가 처한 어떤 환경이 이 골을 깊게 만드는가. 이 질문은 진보든 보수든, 어느 나라에 살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한 가지 비유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양극화를 강의 양안에 선 두 무리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흔히 강 건너편 사람들이 왜 저렇게 어리석은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묻고 싶은 것은 다릅니다. 애초에 이 강은 어떻게 점점 넓어졌는가. 무엇이 물을 불렸고, 무엇이 다리를 떠내려 보냈는가. 강 건너의 사람을 탓하는 일은 쉽지만, 강 자체의 지형을 이해하는 일은 더 어렵고, 더 쓸모 있습니다.


양극화를 어떻게 측정하는가

먼저 막연한 인상을 넘어, 양극화가 실제로 측정 가능한 현상인지 살펴봅시다. 연구자들은 양극화를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두 얼굴의 양극화

이념적 양극화 (issue polarization)
  → 구체적 정책 사안에서 입장이 양 끝으로 벌어짐
  → 예: 세금, 복지, 환경 등에 대한 견해 차이

정서적 양극화 (affective polarization)
  → 정책이 아니라 "상대 진영에 대한 감정"이 차가워짐
  → 같은 편은 따뜻하게, 반대편은 적대적으로 느낌

흥미롭게도, 여러 연구에서 더 두드러지게 커진 것은 이념적 양극화가 아니라 정서적 양극화라는 점이 관찰됩니다. 즉 사람들의 구체적 정책 견해는 생각만큼 극단으로 가지 않았는데, 상대 진영을 향한 감정은 훨씬 차가워졌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는 일은 단순한 학술적 분류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짜 문제가 정책의 거리라면 우리는 더 나은 토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가 감정의 거리라면, 아무리 정교한 토론도 헛돌 수 있습니다. 진단이 틀리면 처방도 빗나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단서입니다. 만약 우리가 단지 정책을 두고 다투는 것이라면 토론과 타협으로 풀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투는 것이 사실은 정체성과 감정이라면, 같은 도구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숫자로 설득해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도계로서의 작은 실험

정서적 양극화를 가늠하는 한 가지 직관적인 방법을 떠올려 봅시다. 연구자들은 종종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자녀가 반대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수십 년 전이라면 많은 이들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을 질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질문에 대한 불편함이 시간이 지나며 눈에 띄게 커진 사회들이 관찰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정책 — 예컨대 세율의 적정 수준 — 을 물으면 그 견해 차이는 결혼 질문만큼 극적으로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책의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가 더 빨리 멀어졌다는 신호입니다.

이런 질문은 일종의 사회적 온도계입니다. 온도계가 병의 원인을 말해 주지는 않지만, 열이 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정직하게 알려 줍니다. 양극화 연구의 상당 부분은 이렇게 마음의 온도를 재는 다양한 도구를 다듬는 일에 바쳐져 있습니다.

측정의 어려움도 정직하게

다만 양극화를 측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설문의 질문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나라마다 정치 구조가 달라 단순 비교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양극화가 얼마나 심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정도의 차이를 두고 논쟁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어떤 수치를 단정하기보다, 여러 연구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방향 — 특히 정서적 거리의 확대 — 에 주목하겠습니다.

측정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은 그 자체로 양극화를 다루는 한 가지 태도이기도 합니다. 어떤 통계든 자기 입장에 유리하게 골라 쓰고 싶은 유혹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숫자를 무기로 쓰는 순간, 우리는 이미 진실보다 승부를 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작동: 우리는 왜 편을 가르도록 설계되었나

분열의 뿌리를 찾으려면 바깥의 도구보다 안쪽의 마음부터 들여다봐야 합니다. 인간의 심리에는 편 가르기를 쉽게 만드는 오래된 경향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결함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해 다듬어진 진화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내집단과 외집단이라는 본능

심리학에는 최소 집단 실험이라 불리는 고전적 연구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아주 사소한 기준 — 심지어 동전 던지기 같은 무작위 기준 — 으로 두 집단으로 나누기만 해도, 사람들은 곧바로 자기 집단을 편애하기 시작합니다. 아무 의미 없는 구분인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이 우리 대 그들이라는 틀을 너무도 쉽게 만들어 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정치적 정체성은 이 본능에 올라타 강력해집니다.

한번 어느 편이라는 소속감이 생기면, 그 편의 승리는 내 승리처럼, 그 편의 패배는 내 패배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좋아하는 스포츠 팀을 응원할 때처럼요.

여기서 잠깐 사고 실험을 하나 해 봅시다. 당신이 어느 여름 캠프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무작위로 파란 팀과 빨간 팀에 배정되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처음에는 그저 색깔일 뿐입니다. 그런데 며칠만 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당신은 같은 색 동료의 농담에 더 잘 웃고, 다른 색 사람들의 실수를 더 또렷이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점심 줄에서 누가 새치기를 하면, 그가 어느 팀인지에 따라 당신의 분노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이 캠프에는 아무런 이념도, 역사도, 진짜 이해관계도 없었습니다. 오직 색깔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며칠 만에 세계를 둘로 칠해 버립니다. 현실의 정치적 분열에 깊은 역사와 진짜 이해관계까지 얹히면, 이 본능이 얼마나 거세질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본능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오래된 배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는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그의 주장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그가 다른 색 옷을 입었기 때문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 그 작은 자각이 본능과 우리 사이에 한 뼘의 거리를 만들어 줍니다.

확증 편향: 보고 싶은 것만 보기

우리 마음은 자신의 기존 믿음을 확인해 주는 정보를 반기고, 거스르는 정보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확증 편향이라 합니다.

같은 증거를 봐도, 내 편에 유리하면 신뢰하고 불리하면 흠을 찾습니다. 이 경향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특정 진영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작동 방식입니다.

확증 편향이 교묘한 이유는, 그것이 게으름의 산물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불리한 정보를 만나면 오히려 더 열심히 생각합니다. 다만 그 노력의 방향이 진실을 찾는 쪽이 아니라 반박할 구실을 찾는 쪽으로 기울 뿐입니다. 즉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기 믿음을 지키는 데 더 정교한 논리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동기화된 추론: 결론을 먼저 정하고 근거를 찾기

한 발 더 나아가, 사람은 때로 어떤 결론에 다다르고 싶은 마음을 먼저 품고, 그 결론을 뒷받침할 근거를 골라 모읍니다. 이를 동기화된 추론이라 부릅니다.

흥미로운 역설은, 더 똑똑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 일을 더 잘한다는 점입니다. 똑똑함은 진실을 찾는 데도,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변호하는 데도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정에 비유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진실을 찾는 사람은 판사처럼 양쪽 증거를 저울에 올립니다. 그러나 동기화된 추론에 빠진 사람은 변호사처럼 행동합니다. 이미 변호할 의뢰인 — 자기가 원하는 결론 — 이 정해져 있고, 모든 지적 능력은 그 의뢰인을 위해 동원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을 판사라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 가지 경향을 한눈에

지금까지 살펴본 마음의 경향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누구나 가진 일반적 작동이며, 어느 한 진영의 결함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경향한 줄 요약분열에 미치는 영향
내집단 편애내 편을 무조건 더 좋게 봄상대를 균질한 덩어리로 단순화
확증 편향보고 싶은 것만 신뢰함같은 사실에서 다른 결론 도출
동기화된 추론결론을 먼저 정하고 근거를 모음똑똑할수록 더 정교하게 분열

이런 마음의 작동을 아는 것은 누구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같은 함정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나만은 객관적이라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편향일지 모릅니다.

소박한 실재론: 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

여기에 한 가지 경향을 더 보태야 그림이 완성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소박한 실재론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이 세상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세 가지 중 하나로 설명하려 듭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명하는 흔한 방식
  1. 그는 정보가 부족하다 (모르니까 저렇게 생각한다)
  2. 그는 게으르거나 비합리적이다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3. 그는 나쁜 의도를 가졌다 (알면서도 일부러 저런다)

세 설명 모두 한 가지 가능성을 빠뜨리고 있습니다. 상대가 나만큼의 정보를 가지고, 나만큼 성실히 생각했는데도, 단지 다른 가치를 우선했기에 다른 결론에 이르렀을 가능성입니다. 이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순간, 상대는 자동으로 무지하거나 어리석거나 악한 사람이 됩니다. 분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적대로 굳어집니다.

소박한 실재론을 경계하는 첫걸음은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저 사람의 자리에서, 저 사람의 경험과 두려움을 안고 태어났다면, 나는 정말 지금과 다르게 생각했을까. 이 질문은 상대를 옳다고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 가능한 사람으로 되돌려 놓으라는 초대입니다.


미디어와 알고리즘: 골을 넓히는 도구들

마음이 불씨라면, 미디어와 기술은 바람입니다. 같은 심리적 경향도, 그것을 증폭하는 환경 속에서는 훨씬 거세집니다.

선택의 시대와 정보의 분화

과거에는 많은 사람이 비슷한 정보원을 공유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몇 개의 채널을 보던 시절에는, 적어도 같은 사실의 토대 위에서 다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보원이 수없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믿음에 맞는 정보원을 고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택지가 늘어난 것은 자유의 확장이지만, 동시에 각자가 다른 사실의 토대 위에 서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 변화의 양면성을 놓치면 안 됩니다. 모두가 같은 몇 개의 채널만 보던 시절이 더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절에는 소수의 편집자가 무엇이 중요한지를 대신 정해 주었고, 거기에는 그 나름의 편향과 사각지대가 있었습니다. 정보의 분화는 더 많은 목소리에 길을 열어 준 해방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해방의 대가로, 우리는 공유된 사실의 토대라는 오래된 자산을 일부 잃었습니다.

반향실과 필터 버블

여기서 두 가지 개념이 자주 등장합니다.

반향실(echo chamber)
  →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같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믿음이 더 강해지는 공간

필터 버블(filter bubble)
  → 추천 시스템이 내 취향에 맞는 것만 골라 보여 주어
    나도 모르게 좁은 시야에 갇히는 현상

다만 균형을 위해 짚을 점이 있습니다. 일부 연구는 이 효과가 흔히 말해지는 것만큼 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보다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오히려 온라인에서 반대 의견을 더 자주 마주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정보를 못 접해서가 아니라, 반대 의견을 접했을 때 그것을 적대적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자기 입장이 더 굳어지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역화 효과의 가능성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는 중요합니다. 만약 분열의 원인이 단지 반대 정보를 못 본 탓이라면, 해법은 간단합니다. 더 다양한 정보를 보여 주면 됩니다. 그러나 분열의 원인이 반대 정보를 적대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에 있다면, 정보를 더 들이미는 일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놓는 일은 무엇을 보여 주느냐만큼이나, 어떤 마음으로 보게 하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알고리즘은 무엇을 위해 설계되었나

추천 알고리즘의 목표는 대체로 사람들의 참여(engagement)를 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주의를 가장 강하게 붙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분노와 도덕적 격분입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콘텐츠는 우리를 더 오래 머물게 하고, 더 많이 공유하게 합니다. 알고리즘이 의도적으로 분열을 노린 것은 아닐지라도, 참여를 좇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가장 자극적이고 대립적인 내용이 더 널리 퍼지는 경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진화적 압력이 작동합니다. 수많은 콘텐츠가 사람들의 주의를 두고 경쟁할 때, 살아남아 널리 퍼지는 것은 가장 정확한 것도, 가장 균형 잡힌 것도 아니라 가장 잘 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잘 퍼지는 것은 종종 가장 분노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분열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시스템 전체의 결과로서 분열이 자라날 수 있다는 점 — 이것이 알고리즘 시대 분열의 가장 까다로운 대목입니다.

여기서도 단정은 피해야 합니다. 기술이 모든 분열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양극화는 인터넷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어떤 사회는 같은 기술을 쓰면서도 덜 분열되어 있습니다. 기술은 불씨를 키우는 바람일 수 있지만, 바람만으로 불이 나지는 않습니다.

분노가 더 멀리 가는 이유

왜 하필 분노일까요. 한 가지 설명은, 분노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감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슬픔은 우리를 가라앉히고 물러나게 하지만, 분노는 우리를 일어서게 하고 무언가를 공유하거나 반박하게 만듭니다. 참여를 먹고 자라는 시스템에게 분노는 더없이 좋은 연료입니다.

여기에 도덕적 색채가 더해지면 효과는 배가됩니다. 단순히 화가 나는 것을 넘어, 상대가 도덕적으로 잘못했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가장 강하게 반응합니다. 그리고 그런 콘텐츠는 같은 편 사이에서 정의로운 분노로 빠르게 번집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상대 진영의 가장 극단적이고 어리석은 사례가 상대 전체를 대표하는 얼굴로 확대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상대 진영의 평범한 다수가 아니라, 가장 화나게 만드는 소수만을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그 소수의 모습이 곧 저쪽 사람들이라는 인상으로 굳어지면, 강은 한층 더 넓어집니다.


정체성이 정치가 될 때

오늘날 양극화를 가장 잘 설명하는 틀 중 하나는 정치가 점점 정체성의 문제가 되었다는 관점입니다.

과거에 정치적 견해는 여러 정체성 중 하나였습니다. 같은 정당을 지지해도 사는 곳, 신앙, 취향은 제각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여러 정체성이 한 줄로 정렬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편을 지지하는지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사는지와 점점 겹쳐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정체성들이 포개지면, 정치적 의견 차이는 단순한 견해 차이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 전체에 대한 부정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정책을 두고 타협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정책을 양보하는 것이 곧 나의 정체성을 양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은 왜 정서적 양극화가 이념적 양극화보다 더 커졌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차가워지는 것은 상대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느낌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렬과 교차

사회학에는 교차하는 정체성이라는 오래된 통찰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집단에 동시에 속할 때 — 예컨대 어떤 정당을 지지하면서도, 상대 진영과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취미 모임에 나간다면 — 그 사람은 상대 진영에도 자신과 겹치는 부분이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이 겹침이 적대의 완충재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 정체성이 한 줄로 정렬되면 이 완충재가 사라집니다. 정치적 입장이 거주지, 신앙, 취향, 소비까지 한 묶음으로 따라오면, 상대 진영은 나와 아무것도 겹치지 않는 완전한 타인처럼 보입니다. 다음 도식은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교차하는 정체성 (완충 있음)
  나의 정당 ↔ 상대의 정당
  그러나 같은 동네, 같은 취미로 연결됨
  → "그래도 저 사람과 통하는 데가 있다"

정렬된 정체성 (완충 없음)
  정당 = 동네 = 취향 = 소비가 모두 한 묶음
  → "저쪽은 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분열을 완화하려는 많은 노력이 정치와 무관한 공동의 공간 — 동네 모임, 운동, 봉사 — 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 공간은 정렬된 정체성을 다시 교차시키는, 작지만 실질적인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실, 두 해석: 공정하게 나란히 놓기

분열의 한가운데에는 종종 사실이 아니라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어느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은 가상의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도시에 새 다리를 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합시다. 같은 공사를 두고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은 말합니다. 마침내 미래를 위한 투자가 시작되었다. 또 한 사람은 말합니다. 또다시 빚을 내어 무리한 사업을 벌인다. 두 사람 모두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다리를 보면서, 한 사람은 그것이 가져올 편익에, 다른 사람은 그것이 남길 비용에 주목할 뿐입니다.

같은 사실해석 A해석 B
새 다리 공사 시작미래를 위한 투자무리한 빚
통계 수치 발표노력의 성과가려진 부작용
상대의 양보진정성의 표시숨은 계산

이 표에서 어느 칸이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동일한 사실이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라 정반대로 채색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실 다툼이라 부르는 것의 상당수는 사실은 가치 우선순위의 다툼입니다.

가치의 우선순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무게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안정을 더 무겁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변화를 더 무겁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를, 어떤 사람은 평등을, 어떤 사람은 공동체를, 어떤 사람은 개인을 앞에 둡니다. 이 무게추들은 대부분 그 자체로는 다 소중한 가치입니다. 다만 한정된 현실에서 이 가치들이 서로 부딪칠 때, 무엇을 먼저 놓느냐에서 갈림이 생깁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대화의 출발점이 달라집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한다고 단정하기 전에, 상대가 나와 다른 가치를 먼저 본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쟁이와는 대화할 수 없지만,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과는 대화할 수 있습니다.


분열의 역사는 새롭지 않다

양극화를 오늘의 기술이 만든 새로운 병으로만 여기면, 우리는 역사의 긴 그림자를 놓치게 됩니다. 인류는 인터넷도 알고리즘도 없던 시절에도 깊이 분열했습니다.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서로 다른 깃발을 들었던 장면, 같은 도시 안에서 이웃이 서로를 의심하던 시절, 한 가족의 식탁이 정치 이야기로 둘로 갈라지던 저녁 — 이런 장면들은 어느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분열의 도구는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어떤 시대에는 광장의 연설이, 어떤 시대에는 인쇄된 소책자가, 어떤 시대에는 라디오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긴 시야는 두 가지를 일러 줍니다. 첫째, 분열은 인간 사회의 만성적 조건에 가깝지, 어느 한 발명품의 부작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인류는 거듭 분열의 골을 메우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분열이 오래된 것이라면, 그것을 다스려 온 지혜 또한 오래된 것입니다. 한때 서로를 적으로 여기던 집단이 한 세대 뒤에는 같은 식탁에 앉는 일을, 역사는 여러 번 보여 주었습니다.

시대별 분열의 증폭 도구 (예시)
  광장의 연설  →  더 멀리 닿는 목소리
  인쇄물       →  더 빠르게 퍼지는 주장
  방송         →  더 동시에 닿는 메시지
  온라인       →  더 개인화되고 즉각적인 흐름
공통점: 도구는 불씨를 키우는 바람일 뿐, 불씨 자체는 마음에 있다

그러니 기술을 악마화하는 것도, 마음만 탓하는 것도 절반의 진실입니다. 분열은 오래된 마음과 새로운 도구가 만나는 자리에서 자랍니다. 둘 중 하나만 보면, 우리는 늘 절반만 이해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들을 둘러보기

양극화를 한 사회의 특수한 현상으로만 보면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 양극화에는 공통된 결과 함께 저마다 다른 결이 있습니다.

측면관찰되는 다양성
정도어떤 사회는 깊이, 어떤 사회는 얕게 분열되어 있음
분열의 기준이 나라마다 다름 (경제, 지역, 문화, 종교 등)
제도선거 제도와 정당 구조가 분열을 키우기도 줄이기도 함
추세어떤 곳은 심해지고, 어떤 곳은 비교적 안정적임

이 다양성은 중요한 희망의 단서를 줍니다. 양극화가 어디서나 똑같이 심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제도와 문화는 분열을 완화하고, 어떤 것은 증폭합니다. 이는 우리가 손쓸 여지가 있다는 신호입니다. 분열이 자연법칙이라면 우리는 그저 견딜 수밖에 없겠지만, 분열이 조건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그 조건을 바꿀 수 있습니다.

다만 한 나라의 해법을 다른 나라에 그대로 옮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합니다. 각 사회의 역사와 맥락은 다르며, 같은 처방이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례에서 배우되, 정답을 복제하기보다 질문을 빌려 와야 합니다.

제도라는 보이지 않는 손

특히 눈여겨볼 것은 제도의 역할입니다. 같은 인간 심리, 같은 미디어 환경이라도, 그것을 담는 제도의 그릇에 따라 분열의 양상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구조의 선거 제도는 두 진영의 대결을 격화하기 쉽습니다. 모 아니면 도의 게임에서는 타협이 곧 패배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러 세력이 의석을 나누고 연합해야 하는 구조에서는, 어제의 경쟁자와 오늘 손을 잡아야 하는 일이 잦아 적대가 다소 누그러질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제도도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같은 제도가 한 사회에서는 잘 작동하고 다른 사회에서는 갈등을 키우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분열이 순전히 사람들의 마음 문제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규칙 안에서 경쟁하느냐가, 우리를 더 적대적으로도 더 협력적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대화의 다리를 놓는 일

분열을 진단했으니, 마지막으로 그것을 넘는 길을 생각해 봅시다. 다만 손쉬운 처방을 약속하지는 않겠습니다. 양극화는 한 사람의 결심으로 풀리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러 연구와 경험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방향들이 있습니다. 이 방향들은 거대한 사회 개혁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서 출발합니다. 사회 전체의 온도를 한 번에 낮출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내 주변의 한 평짜리 온도는 내가 정할 수 있습니다.

접촉의 힘, 그리고 그 조건

오래된 사회심리학의 통찰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적절한 조건에서 직접 만나면 편견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를 접촉 가설이라 합니다.

추상적인 적은 미워하기 쉽지만, 얼굴을 마주한 구체적인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화면 너머로 미워하던 저쪽 사람이, 알고 보니 같은 고민을 안고 같은 농담에 웃는 평범한 이웃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머릿속의 단순한 적의 이미지는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다만 접촉이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적대적인 분위기에서의 만남은 오히려 골을 깊게 할 수 있습니다. 효과적인 접촉에는 대등한 위치, 공동의 목표, 서로를 향한 최소한의 존중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고 연구는 말합니다.

이 조건들을 한자리에 모아 두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건의미없을 때의 위험
대등한 위치어느 쪽도 위에서 가르치지 않음한쪽이 굴욕을 느낌
공동의 목표함께 풀어야 할 일이 있음만남이 곧 대결이 됨
최소한의 존중상대를 사람으로 대함접촉이 편견을 굳힘

이 표가 일러 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저 다른 편 사람과 한 방에 모아 놓는다고 다리가 놓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만남이냐가 만남 자체보다 중요합니다. 잘못된 조건의 접촉은 차라리 만나지 않느니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보다 마음 먼저

정서적 양극화가 핵심이라면, 사실을 더 던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닫힌 마음에는 어떤 증거도 튕겨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들은 흔히 사실 이전에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상대를 설득하려 들기 전에 상대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것, 상대도 나름의 두려움과 바람을 가진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에서요.

한 가지 작은 기법이 있습니다. 상대의 입장을 반박하기 전에, 상대가 만족할 만큼 그 입장을 정확히 되말해 보는 것입니다. 당신 말은 이런 뜻이군요, 라고 요약했을 때 상대가 그렇다, 정확히 그거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비로소 진짜 대화가 시작될 자리가 마련됩니다. 놀랍게도 이 단순한 행위만으로 상대의 방어가 누그러지는 일이 잦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제대로 이해받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귀를 엽니다.

작은 실천들

  • 내 편의 주장도 가장 약한 부분을 스스로 점검해 보기
  • 상대 진영의 가장 합리적인 사람의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을 찾아보기 (가장 약한 주장이 아니라)
  •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적이 아니라 다른 결론에 이른 사람으로 보기
  • 분노를 부추기는 콘텐츠 앞에서 잠시 멈추고, 이것이 나를 무엇으로 만들고 있는지 묻기

이 실천들은 누구를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분열의 메커니즘이 나를 통해 작동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짧은 자가 진단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양극화 온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작은 질문 모음을 둡니다. 정답이 있는 시험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1. 나는 상대 진영에 동의할 만한 좋은 친구가 있는가?
2. 최근에 내 편의 주장에서 틀린 점을 인정한 적이 있는가?
3. 상대 진영의 주장을 들을 때, 가장 약한 버전과 가장 강한 버전 중
   어느 쪽을 떠올리는가?
4. 나는 상대 진영 사람들을 "어리석다" 또는 "악하다"로
   뭉뚱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들 앞에서 마음이 살짝 불편해진다면, 그것은 나쁜 신호가 아닙니다. 오히려 분열의 자동 조종에서 잠시 빠져나와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다리를 놓는 일의 비대칭성

한 가지 어려운 진실도 짚어야 공정합니다. 다리를 놓는 일에는 비대칭이 있습니다. 분열은 한순간에 깊어질 수 있지만,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더디고 더딥니다. 한 번의 모욕은 수십 번의 호의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놓으려는 사람은 종종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견뎌야 합니다.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듣고, 먼저 의심을 거두는 쪽이 더 약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먼저 시작해야 강의 폭이 줄어듭니다. 그 누군가가 꼭 상대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어쩌면 이 글이 전하고 싶은 작은 제안입니다.


마치며: 차이를 견디는 능력

건강한 사회는 의견이 같은 사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의견 차이를 품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입니다. 차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차이를 적대로 바꾸는 과정이 문제입니다.

어쩌면 차이를 견디는 능력은 한 사회의 성숙도를 재는 가장 정직한 척도일지도 모릅니다. 위기 앞에서 똘똘 뭉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진짜 시험은 평온한 일상 속에서, 나와 다른 결론에 이른 이웃과 한 동네에 살며, 그를 미워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이 글은 어느 입장이 옳은지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글의 몫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왜 갈라지는지 — 우리 마음의 오래된 본능, 우리가 만든 도구의 작동, 정체성이 정치가 되는 방식 — 를 함께 들여다보려 했습니다. 분열의 지도를 손에 쥐면, 적어도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분열에는 보이지 않는 비용이 따른다는 점도 기억할 만합니다. 사회가 깊이 갈라지면, 정작 모두에게 이로운 결정조차 어느 편의 승리로 비치는 순간 가로막히곤 합니다. 상대가 제안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안이 거부되고, 우리 편이 냈다는 이유만으로 허술한 안이 통과됩니다. 분열의 가장 큰 손해는,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해낼 능력 자체가 줄어든다는 데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모든 차이를 없애자는 말은 아닙니다. 차이는 사회가 자신을 돌아보고 고쳐 나가는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키고 싶은 것은 차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차이를 품고도 무너지지 않는 사회입니다.

다음에 같은 뉴스를 본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세계를 안고 자리를 뜨는 장면을 마주하거든, 누가 틀렸는지를 묻기 전에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우리를 이렇게 멀어지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 내가 먼저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할 거리

  • 당신은 반대 진영의 주장을, 그 진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의 입을 빌려 공정하게 요약할 수 있나요?
  • 최근 강한 분노를 느낀 콘텐츠를 떠올려 보세요. 그 분노는 당신을 어디로 데려갔나요?
  • 의견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토론이 아니라 싸움이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 차이를 견디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일까요, 기를 수 있는 것일까요?
  • 정렬된 정체성과 교차하는 정체성 중, 당신의 삶은 어느 쪽에 가깝나요?
  • 만약 모두가 같은 정보를 본다면 분열이 사라질까요, 아니면 다른 형태로 남을까요?
  • 당신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바꾼 것은 언제이며, 무엇이 그 변화를 가능하게 했나요?
  • 상대를 적이 아니라 다른 결론에 이른 사람으로 보려면, 먼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요?

간단한 복습 퀴즈

읽은 내용을 스스로 점검해 보는 짧은 퀴즈입니다. 정답은 본문 안에 있습니다.

  • 정책 견해보다 상대 진영을 향한 감정이 더 차가워지는 현상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 무작위로 나눈 집단에서도 자기 집단을 편애하게 됨을 보여 준 고전적 연구는 무엇일까요?
  •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만 모으는 사고방식을 무엇이라 할까요?
  • 서로 다른 집단이 적절한 조건에서 만나면 편견이 줄어든다는 가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차례로 정서적 양극화, 최소 집단 실험, 동기화된 추론, 접촉 가설입니다. 답을 맞히는 것보다, 각 개념이 왜 분열의 지도에서 그 자리에 놓이는지를 떠올려 보는 편이 더 값집니다.

이 글이 작은 지도 한 장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지도는 길을 대신 걸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강이 어디서 넓어졌는지, 다리를 어디에 놓을 수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줄 뿐입니다. 그 다음 한 걸음은, 언제나 각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