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uth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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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ju Kim
- @fjvbn20031
- 들어가며 손을 드는 순간의 작은 수수께끼
- 역사의 한 장면 의지를 둘러싼 오래된 다툼
- 첫 번째 풍경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
- 두 번째 풍경 둘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 세 번째 풍경 자유는 인과의 사슬을 끊는다
- 세 입장을 한눈에
- 혼돈과 복잡성 결정되어 있어도 예측은 안 된다
- 깊이 들여다보기 뇌는 우리보다 먼저 결정하는가
- 의식의 자리 결정과 느낌 사이의 간극
- 가장 뜨거운 쟁점 그래서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 세 입장은 정말 화해할 수 없는가
- 현대의 풍경 양자역학, 법정, 그리고 일상
- 자유의지가 흔들리면 무엇이 흔들리는가
- 사고 실험의 방 네 개의 장면
- 동양의 시선 운명과 마음 사이에서
- 자유의지를 둘러싼 흔한 오해 세 가지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짧은 연표로 보는 논쟁의 흐름
- 잠깐 퀴즈 당신의 직관은 어느 쪽인가
- 마치며 답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을 위하여
- 한 줄로 남기는 정리
- 생각할 거리
- 퀴즈 정답
- 참고 자료
들어가며 손을 드는 순간의 작은 수수께끼
지금 당신의 오른손을 잠깐 들어 보십시오. 아무 이유 없이, 마음 내킬 때 한 번 들었다 내리면 됩니다. 다 하셨나요? 그렇다면 여기서 오래된 질문 하나가 시작됩니다. 방금 손을 든 것은 정말로 당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당신이 의식적으로 결심했다고 느끼기 전에 이미 뇌 어딘가에서 결정이 내려져 있었던 것일까요.
이 사소한 동작 하나에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씨름해 온 문제가 통째로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누구에게 먼저 연락할지, 화가 났을 때 참을지 폭발할지. 그리고 그 선택이 우리의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주의 모든 일이 그 이전의 원인으로부터 빈틈없이 이어진 결과라면, 그래서 빅뱅 직후의 입자 배치만 알면 오늘 당신이 든 손까지 원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면, 그 손은 여전히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글은 그 질문을 둘러싼 세 가지 큰 입장을 차근차근 살펴봅니다. 결정론, 양립가능론, 그리고 리버태리언 자유의지입니다. 그다음 신경과학이 이 논쟁에 던진 유명한 실험 하나를 들여다보고, 도덕적 책임이라는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넘어갑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글은 어느 한 입장이 정답이라고 결론짓지 않습니다. 철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치열한 논쟁 가운데 하나인 만큼, 각 입장이 왜 그렇게 강력한지를 공정하게 보여 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왜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가
흥미로운 점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질문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천문학은 천동설을 폐기했고, 화학은 연금술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자유의지 문제만큼은 수천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살아 있는 쟁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 가지 이유는, 이 질문이 사실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의미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과학이 답할 수 있는 사실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을 뜻해야 하는가, 책임이란 어떤 조건에서 성립하는가는 우리가 함께 정해 가야 할 개념과 가치의 영역입니다. 이 두 층위가 한데 얽혀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발전만으로는 문제가 깔끔하게 닫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 질문이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의 궤도를 묻는 것과 달리, 자유의지를 묻는 것은 묻는 자신을 거울에 비추는 일입니다. 나는 정말 내 삶의 저자인가, 아니면 거대한 각본의 한 배우인가. 이 물음은 우리가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느냐와 직결되어 있어, 쉽게 손에서 내려놓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글 역시 답을 내려 주기보다, 그 거울을 조금 더 선명하게 닦아 드리는 일을 하려 합니다.
역사의 한 장면 의지를 둘러싼 오래된 다툼
자유의지 문제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잠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고대의 사상가들은 이미 운명과 인간의 결단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어떤 학파는 세계가 촘촘한 인과의 그물로 짜여 있다고 보면서도, 인간이 그 흐름에 어떤 태도로 응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가르쳤습니다. 흐름 자체는 바꿀 수 없어도,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는 우리 몫이라는 묘한 절충이었습니다.
중세로 넘어오면 무대의 조명이 바뀝니다. 이제 핵심 질문은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였습니다. 만약 전능한 신이 내가 내일 무엇을 할지 이미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나의 내일은 이미 고정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한낱 정해진 각본을 읽는 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당시의 사상가들은 이 문제를 두고 수백 년에 걸쳐 정교한 논변을 쌓아 올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의 앎이 시간 밖에 있어 미래를 강제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또 어떤 이들은 신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그 자유로움 그대로 안다고 보았습니다.
근대에 들어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무대의 주인공은 다시 한번 바뀝니다. 이제 인간의 의지를 위협하는 것은 신의 예지가 아니라 자연법칙 그 자체였습니다. 천체의 운동이 방정식으로 깔끔하게 예측되는 것을 본 사람들은, 같은 법칙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도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형태의 자유의지 논쟁, 곧 자연과학적 세계상과 인간의 자유가 충돌하는 무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짧은 회고가 보여 주듯, 질문은 같았지만 그 질문을 위협하는 상대는 시대마다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첫 번째 풍경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
결정론이란 무엇인가
결정론은 간단히 말해 이렇습니다. 우주의 현재 상태와 자연법칙이 주어지면, 미래의 모든 일이 단 하나의 방식으로만 일어난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가 미래를 빈틈없이 고정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도 그 이전 사건들의 필연적 귀결이며, 거기에는 다른 가능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이 그림을 가장 선명하게 표현한 사람으로는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던 시기의 프랑스 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자주 인용됩니다. 그는 어떤 가상의 거대한 지성을 상상했습니다. 그 지성이 어느 한순간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안다면, 그리고 충분한 계산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 지성에게는 미래도 과거도 현재처럼 한눈에 펼쳐질 것이라는 그림입니다. 흔히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부르는 이 사고 실험은 고전 물리학이 그리던 우주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결정론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필요합니다. 결정론이라고 다 같은 결정론이 아닙니다.
물리적 결정론 또는 인과적 결정론은 방금 설명한 것처럼 물리법칙과 과거의 상태가 미래를 고정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논쟁의 중심에 있는 형태입니다.
신학적 결정론은 전능한 신의 예지나 섭리가 모든 일을 미리 정해 둔다는 생각입니다. 중세 신학에서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논리적 결정론은 미래에 관한 명제도 지금 이미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점에서 출발해, 그렇다면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래전 고대 철학에서부터 다루어졌습니다.
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인과적 결정론입니다. 자연과학이 그리는 세계상과 가장 직접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론이 자유의지를 위협하는 이유
결정론이 왜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질까요. 핵심은 이른바 다르게 할 수 있었음이라는 관념에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선택이 자유로우려면 적어도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거짓말을 했지만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고, 그 갈림길에서 내가 진실 쪽을 택할 수도 있었어야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직관입니다.
그런데 인과적 결정론이 옳다면, 과거의 상태와 자연법칙이 주어진 이상 나는 정확히 그렇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선택지는 애초에 실현 가능한 길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 추론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 이른바 귀결 논증이라고 불리는 논변입니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이 풀어 쓸 수 있습니다. 먼 과거의 사실은 내가 어찌할 수 없고, 자연법칙도 내가 어찌할 수 없다. 그런데 나의 현재 행동은 그 과거와 법칙의 필연적 귀결이다. 따라서 나의 행동 역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증입니다.
이 논증을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입장에 이르게 됩니다. 결정론이 참이라면 자유의지는 환상이라는 입장, 곧 강한 결정론 또는 자유의지 부정론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두 번째 풍경이 열립니다.
결정론을 향한 흔한 직관적 저항
결정론을 처음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 거부감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몇 가지 직관이 보입니다. 하나는 내적 경험의 생생함입니다. 나는 지금 이 문장을 쓸지 말지 정말로 자유롭게 정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 느낌이 어떻게 환상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항변입니다. 결정론자는 이에 대해, 느낌이 생생하다는 것이 곧 그 느낌이 사태를 정확히 반영한다는 보장은 아니라고 답합니다. 우리는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진다고 생생하게 느끼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우리가 딛고 선 지구입니다.
또 다른 직관은 예측 불가능성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너무나 복잡해서 누구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니, 그것은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결정론자는 예측 불가능성과 비결정성을 구별하라고 말합니다. 날씨는 사실상 예측이 매우 어렵지만, 그렇다고 날씨가 자연법칙을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것과 원리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이런 응수들이 보여 주듯, 결정론은 우리의 소박한 직관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만만찮은 입장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결정론을 인정하면서도 자유를 구하려는 양립가능론이 그토록 매력적인 선택지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 풍경 둘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양립가능론의 핵심 발상
양립가능론은 이름 그대로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서로 양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우주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의미 있는 의미에서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언뜻 보면 말장난 같지만, 그 안에는 꽤 단단한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
양립가능론자는 먼저 자유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시 따져 봅니다. 그들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자유의지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는 사실 두 가지 다른 것을 뒤섞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강제로부터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인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총구를 들이대며 금고를 열라고 협박받아 금고를 여는 사람과, 아무런 위협 없이 스스로 마음먹고 금고를 여는 도둑을 떠올려 봅시다. 둘 다 물리적으로는 인과의 그물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두 사람을 전혀 다르게 대합니다. 앞사람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뒷사람에게는 책임을 묻습니다. 양립가능론자는 바로 이 차이가 자유의지가 실제로 작동하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인과의 사슬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내 행동이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욕구와 숙고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흄에서 데닛까지 이어지는 흐름
이 발상의 고전적 형태는 18세기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에게서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흄은 자유와 필연이 대립한다는 통념 자체가 일종의 언어적 혼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한 자유란 의지에 따라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곧 사슬에 묶여 있지 않은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런 의미의 자유라면 행동이 동기와 성격으로부터 규칙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과 전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동이 성격과 동기에서 규칙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흄은 보았습니다.
현대에 와서 이 노선을 가장 활발히 옹호한 사람으로는 미국 철학자 대니얼 데닛이 자주 언급됩니다. 데닛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자유의지가 실은 우리가 진짜로 가지고 싶어 할 만한 종류의 자유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인과의 그물 밖에서 아무 이유 없이 튀어나오는 변덕스러운 선택은 사실 통제가 아니라 무작위에 가깝습니다. 정작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미래를 내다보고 결과를 따져 보고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결정론적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데닛의 주장입니다.
양립가능론을 향한 반론
물론 양립가능론에도 만만치 않은 반론이 있습니다. 가장 흔한 비판은 양립가능론이 자유의지라는 말의 뜻을 슬쩍 바꿔치기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걱정할 때 정말로 묻는 것은 다르게 할 수도 있었는가인데, 양립가능론은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강제가 없었는가라는 더 다루기 쉬운 질문으로 화제를 옮겼다는 비판입니다.
또 다른 사고 실험도 있습니다. 어떤 악의적 신경과학자가 당신의 뇌를 몰래 조작해, 당신이 특정 선택을 하도록 욕구와 숙고 과정까지 통째로 심어 두었다고 해 봅시다. 당신은 외부의 총구도 없이 자기 욕구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 욕구 자체가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것입니다. 이때 당신은 자유로운가요. 이런 조작 사례는 강제가 없다는 조건만으로는 자유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날카롭게 찌릅니다. 그래서 많은 양립가능론자는 단순히 강제가 없음을 넘어, 행위자가 자기 욕구를 한 단계 위에서 승인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이성에 반응하는 능력 같은 더 정교한 조건을 덧붙입니다.
세 번째 풍경 자유는 인과의 사슬을 끊는다
리버태리언 자유의지
세 번째 입장은 리버태리언 자유의지, 우리말로는 자유지상론적 자유의지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치 용어인 자유지상주의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라는 점을 먼저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입장은 두 가지 주장을 묶어서 내세웁니다. 첫째, 우리에게는 진짜 자유의지가 있다. 둘째, 그 자유의지는 결정론과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결정론은 적어도 인간의 선택에 관해서는 거짓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리버태리언은 양립가능론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진정한 자유란 정말로 다르게 할 수 있었음을 요구하며, 그것은 같은 과거와 같은 법칙 아래에서도 다른 선택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갈림길에 섰을 때 두 길이 모두 실제로 가능해야 비로소 내가 그 길을 골랐다고 말할 수 있다는 직관입니다. 이 직관은 우리의 일상 경험과 아주 잘 맞아떨어집니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분명 여러 길이 열려 있다고 생생하게 느끼니까요.
끊어진 사슬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문제는 인과의 사슬을 끊고 나면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입니다. 만약 내 선택이 과거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순전한 우연도 아니어야 한다면, 그 선택은 대체 무엇에 의해 이루어지는 걸까요.
여기서 리버태리언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한 갈래는 행위자 인과라는 개념을 끌어들입니다. 사건이 사건을 일으키는 보통의 인과와 달리, 행위자라는 존재 자체가 새로운 인과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발상입니다. 즉 나라는 행위자가 앞선 어떤 사건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갈래는 미시 세계의 비결정성, 곧 양자역학적 우연에 기대를 걸기도 합니다. 다만 이 두 길 모두 만만치 않은 난점을 안고 있는데, 이 점은 뒤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행위자 인과는 어떻게 가능한가
리버태리언의 한 갈래가 기대는 행위자 인과라는 개념을 조금 더 들여다볼 가치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아는 인과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입니다. 당구공이 다른 공을 때려 움직이게 하듯, 한 사건이 다음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행위자 인과는 사건이 아니라 행위자라는 지속하는 존재가 직접 새로운 인과의 출발점이 된다고 봅니다.
이 발상은 매혹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의 순간에 느끼는 어떤 것, 곧 내가 이 행동의 진짜 주인이라는 느낌을 그대로 담아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발상은 까다로운 의문을 남깁니다. 행위자가 사건들의 연쇄와 무관하게 행동을 일으킨다면, 그 행위자는 왜 하필 이 순간에 이 행동을 일으킨 걸까요. 만약 그 시점과 내용에 아무런 선행 이유가 없다면, 그것은 또다시 우연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충분한 선행 이유가 있다면, 결국 그 이유가 행동을 설명하는 셈이어서 행위자의 특별한 역할이 흐려집니다.
이 딜레마는 리버태리언 진영이 오랫동안 씨름해 온 핵심 난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행위자 인과가 우리가 가진 다른 인과 개념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인 종류라고 주장하며 이 어려움을 정면으로 끌어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개념이 신비에 호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어느 쪽이 옳든, 행위자 인과를 둘러싼 이 논쟁은 자유라는 관념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운 반론이라는 까다로운 문제
리버태리언이 마주하는 가장 날카로운 비판은 흔히 운 반론이라고 불립니다. 논리는 이렇습니다. 같은 과거, 같은 법칙 아래에서 내가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고 거짓을 말할 수도 있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실제로는 거짓을 말했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과거가 그 차이를 고정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 갈림은 어느 정도 운에 맡겨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운에 의해 갈린 선택을 두고 온전히 내 책임이라고 말하기는 어색합니다. 결국 인과의 사슬을 끊어 자유를 확보하려던 시도가, 자칫하면 책임의 근거마저 함께 끊어 버리는 역설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단계 위의 욕구라는 발상
양립가능론을 더 정교하게 다듬은 흥미로운 발상 하나를 잠시 들여다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한 단계 위에서 욕구를 승인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단지 무언가를 욕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욕구 자체를 욕구하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한다고 합시다. 동시에 그는 그런 욕구를 가진 자신을 못마땅해하며, 차라리 담배를 끊고 싶어 하는 더 높은 차원의 욕구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그가 의지박약으로 담배를 피운다면, 그는 자신의 더 높은 욕구를 배신한 셈입니다. 이 그림에서 자유로운 행위자란, 자신의 일차적 욕구들 가운데 어느 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느 것을 거부할지를 한 단계 위에서 조율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 발상이 매력적인 이유는, 자유를 인과의 사슬 밖이 아니라 마음의 구조 안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중독자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가 인과 안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일차적 욕구가 더 높은 욕구를 짓밟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은 있습니다. 그 더 높은 욕구 역시 어딘가에서 주어진 것일 텐데, 그렇다면 무한히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입니다. 그럼에도 이 발상은 자유라는 모호한 말을 마음의 내부 구조라는 구체적인 그림으로 옮겨 놓았다는 점에서 큰 기여를 했습니다.
세 입장을 한눈에
지금까지 살펴본 세 입장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구분 |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양립 | 다르게 할 수 있었는가 | 주된 강점 | 주된 약점 |
|---|---|---|---|---|
| 강한 결정론 | 양립 불가 자유의지 부정 | 불가능 | 과학적 세계상과 잘 맞음 | 책임과 일상 경험을 설명하기 어려움 |
| 양립가능론 | 양립 가능 | 조건적 의미로만 가능 | 책임 실천을 잘 설명함 | 자유의 뜻을 바꿨다는 비판 |
| 리버태리언 자유의지 | 양립 불가 자유의지 인정 | 진짜로 가능 | 일상 직관과 잘 맞음 | 운 반론과 형이상학적 부담 |
표가 보여 주듯 세 입장은 저마다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칸도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 논쟁이 왜 그토록 오래 이어지는지를 말해 줍니다. 한쪽의 강점이 다른 쪽에서는 정확히 약점이 되는 묘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혼돈과 복잡성 결정되어 있어도 예측은 안 된다
결정론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흔히 오해를 부르는 한 가지 개념을 짚어 두면 좋겠습니다. 바로 혼돈 또는 카오스입니다. 20세기 후반에 발전한 혼돈 이론은, 아주 단순하고 완전히 결정론적인 규칙을 따르는 체계조차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에 극도로 민감해 사실상 예측 불가능해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흔히 나비의 날갯짓이 먼 곳의 날씨를 바꾼다는 비유로 회자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측 불가능함이 곧 비결정론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혼돈계는 한 치의 우연도 없이 법칙에 따라 굴러가지만, 우리가 초기 조건을 무한히 정밀하게 알 수 없기에 미래를 내다보지 못할 뿐입니다. 이는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사고 실험이 왜 한낱 상상으로 머무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설령 우주가 완전히 결정론적이라 해도, 그것을 실제로 계산해 미래를 알아낼 존재는 현실에 없습니다.
이 구별은 자유의지 논쟁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 행동의 예측 불가능성을 자유의 증거로 내세우려 하지만, 혼돈의 교훈은 그 추론에 제동을 겁니다. 예측이 안 된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무엇도 결정론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주가 결정론적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미래를 다 안다는 뜻도 아닙니다. 결정되어 있음과 알 수 있음은 전혀 다른 두 가지입니다. 이 작은 구별을 놓치면, 자유의지 논쟁은 엉뚱한 곳에서 헛돌기 쉽습니다.
깊이 들여다보기 뇌는 우리보다 먼저 결정하는가
리벳의 준비전위 실험
이제 신경과학이 이 논쟁에 던진 가장 유명한 돌멩이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1980년대에 미국의 신경생리학자 벤저민 리벳은 지금도 회자되는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그 설계의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실험 참가자에게 아무 때나 마음 내킬 때 손목이나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머리에는 뇌의 전기 활동을 측정하는 장치를 붙입니다. 그리고 참가자에게는 특수하게 만든 시계를 보여 주면서, 움직이고 싶다는 충동을 처음 의식한 바로 그 순간에 시계의 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기억해 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세 가지 시점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뇌 활동이 시작된 시점, 의식적으로 움직이려는 의도를 느낀 시점, 그리고 실제로 근육이 움직인 시점입니다.
리벳이 보고한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운동을 준비하는 뇌의 전기 활동, 이른바 준비전위가 참가자가 움직이려는 의도를 의식하기 수백 밀리초 전에 이미 상승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뇌는 당신이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고 느끼기 전에 이미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결과는 의식적 의지가 행동의 진짜 원인이 아니라 사후에 따라붙는 해설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도발적인 해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후속 연구들도 이 흐름을 이었습니다. 2000년대 후반에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을 이용한 연구가 보고되었는데, 어떤 조건에서는 참가자가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여러 초 전에 뇌 활동 패턴만으로 그 선택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결과들은 자유의지가 결국 뇌의 사후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기서 멈추면 결론이 너무 성급합니다. 리벳 실험은 발표 직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방법론적 비판을 받아 왔고, 그 비판들은 상당히 묵직합니다.
첫째, 의도를 처음 느낀 순간을 시계를 보고 보고하게 하는 방식 자체가 정확한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의식의 시점을 밀리초 단위로 자기보고하게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오차와 왜곡에 취약합니다.
둘째, 준비전위의 정체에 대한 재해석이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연구자들 가운데 일부는 준비전위가 결정을 내리는 신호라기보다, 뇌가 무언가를 할까 말까 망설이며 떠도는 배경 잡음 같은 신경 활동의 자연스러운 누적일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준비전위의 상승은 결정이 이미 내려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결정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흔들림에 가깝습니다. 이런 비판은 아론 슈르터를 비롯한 연구자들의 작업과 함께 자주 언급됩니다.
셋째,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실험의 적용 범위입니다.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처럼 아무 의미 없고 즉흥적인 동작이, 직업을 고르거나 도덕적 딜레마 앞에서 고민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자유로운 선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많은 철학자들은 이 둘 사이에 큰 간극이 있다고 봅니다. 깊은 숙고 끝에 내리는 선택은 단발성 충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과정일 수 있습니다.
넷째, 설령 뇌 활동이 의식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곧 자유의지의 부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양립가능론자에게는 애초에 행동이 뇌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결정이 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과, 그 결정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은 충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리벳 실험은 의식과 행동의 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지만, 자유의지가 환상임을 증명했다고 말하기에는 갈 길이 멉니다. 과학은 멋진 단서를 주었을 뿐, 철학적 문제를 대신 풀어 준 것은 아닙니다.
의식의 자리 결정과 느낌 사이의 간극
리벳 실험이 건드린 가장 미묘한 지점은 의식적 느낌과 실제 결정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 그 느낌이 곧 결정의 순간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의식적 느낌이 결정 과정의 전부가 아니라 그중 일부일 가능성, 혹은 결정이 무르익은 뒤에 떠오르는 자각일 가능성은 충분히 진지하게 따져 볼 만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절충안 하나를 소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리벳 실험을 자유의지의 부정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작동 방식에 대한 재서술로 읽자고 제안합니다. 리벳 자신도 준비전위가 상승한 뒤라도, 행동이 실제로 일어나기 직전의 짧은 순간에 그 행동을 멈출 여지, 이른바 거부권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고 전해집니다. 충동이 떠오르는 것은 자동적일지라도, 그 충동을 실행에 옮길지 말지를 마지막 순간에 검열하는 능력에 자유의지의 핵심이 있을 수 있다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옳은지는 또 다른 논쟁거리이지만, 적어도 결정과 의식의 관계가 단순한 일대일 대응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생각보다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선택을 한 뒤에 그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하지만, 그 설명이 실제 원인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심리학의 여러 연구는 사람들이 자기 행동의 진짜 원인을 종종 잘못 짚으면서도 매우 자신 있게 이유를 댄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이런 발견은 자유의지를 곧장 부정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투명한 주인이라는 소박한 그림에는 분명히 그늘을 드리웁니다.
가장 뜨거운 쟁점 그래서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
이 논쟁이 단지 한가한 사변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도덕적 책임 때문입니다. 우리는 칭찬과 비난, 보상과 처벌이라는 거대한 제도 위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만약 어느 누구도 결국에는 자기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칭찬과 비난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기서 입장에 따라 그림이 크게 갈립니다. 어떤 자유의지 부정론자들은 책임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누군가가 끝내 자기 행동의 궁극적 원인이 아니라면, 그를 응징하기 위한 처벌, 곧 응보적 처벌은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들도 사회가 책임 개념을 통째로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처벌의 목적을 응징에서 보호와 교화, 재발 방지 쪽으로 옮겨야 한다고 제안하곤 합니다.
반면 양립가능론자는 책임을 구하기 위해 굳이 인과의 사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숙고 능력을 갖추고 이성에 반응할 수 있었으며 외부의 강제 없이 행동했다면, 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충분히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칭찬과 비난은 단지 과거를 심판하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의 행동을 조율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사회적 실천이기도 합니다.
반응적 태도라는 또 하나의 관점
도덕적 책임을 이해하는 매우 영향력 있는 또 하나의 길은, 책임을 추상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보이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태도에서 출발해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20세기 중반의 한 영향력 있는 논의는,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보이는 감사, 분노, 원망, 용서 같은 반응적 태도에 주목했습니다.
이 관점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를 우리와 같은 도덕적 대화의 상대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무례에 분노하는 것은, 그가 우리를 존중했어야 한다는 기대를 그에게 걸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우리가 이런 태도를 거두는 경우는 보통, 상대가 어린아이이거나 심각한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도덕적 대화의 상대로 보기 어려울 때입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책임의 문제는 우주가 결정되어 있느냐 아니냐를 먼저 푸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태도들이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추상적인 결정론 논증만으로는 통째로 폐기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발상은 양립가능론에 깊이를 더해 주었습니다. 책임을 형이상학적 자유의 유무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제 짜임에서 찾는 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은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반응적 태도 자체가 어떤 잘못된 전제에 기대고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자연스럽고 뿌리 깊다 해도 수정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입니다. 이처럼 책임을 둘러싼 논의는 한 겹을 벗기면 또 한 겹이 나오는, 깊고 정교한 미로와도 같습니다.
균형 잡힌 시선이 필요한 자리
이 대목에서는 특별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경과학이 자유의지를 부정했으니 아무도 자기 행동에 책임이 없다는 식의 단순한 결론은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앞서 보았듯 실험 결과의 해석은 여전히 열려 있고, 책임 개념이 반드시 사슬 밖의 자유를 요구하는지도 논쟁 중입니다. 동시에, 한 사람의 성장 환경과 뇌 상태, 사회적 조건이 그의 선택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중요합니다. 책임을 단숨에 부정하는 것도, 모든 결과를 오롯이 개인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둘 다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길입니다.
세 입장은 정말 화해할 수 없는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세 입장이 영영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논쟁을 한 단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강한 결정론자가 던지는 질문은 우주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생겼는가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모든 것이 인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양립가능론자가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책임이라는 실천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강제 없이 이성에 응답하며 행동하는 능력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리버태리언이 던지는 질문은 진정으로 열린 미래가 존재하는가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적어도 어떤 순간에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 입장의 충돌 중 상당 부분은 사실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른 뜻으로 쓰는 데서 옵니다. 자유라는 한 단어 안에, 인과로부터의 독립, 강제로부터의 자유, 열린 가능성이라는 여러 의미가 겹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은 이 논쟁의 절반은 형이상학의 문제이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가 자유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할지 정하는 약속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이 곧 모든 차이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주가 결정되어 있는가 아닌가는 분명 사실의 문제이며, 그 사실이 어느 쪽으로 판명되든 책임과 존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다만, 서로가 정확히 어떤 질문에 답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 두면, 헛된 평행선 대신 진짜 쟁점을 둘러싼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좋은 논쟁은 상대를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진짜로 갈라서는지를 함께 찾아내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현대의 풍경 양자역학, 법정, 그리고 일상
양자역학은 자유의지를 구해 주는가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라플라스의 악마가 그리던 완벽한 결정론의 그림에는 금이 갔습니다. 미시 세계에서는 어떤 사건의 결과를 확률로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양자역학의 비결정성이 자유의지가 들어설 틈을 열어 준다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생각보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첫째, 미시 세계의 비결정성이 뇌라는 따뜻하고 거대한 시스템의 수준에서 의미 있게 증폭되는지부터가 불분명합니다. 둘째, 설령 뇌 속 어딘가에 양자적 우연이 작동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작위에 가깝습니다. 내 선택이 동전 던지기처럼 우연에 좌우된다면, 그것을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부르기는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다시 말해, 결정론을 우연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의지가 확보되는 것은 아닙니다. 양자역학은 결정론을 흔들었을지언정, 자유의지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아닙니다.
법은 자유의지를 어떻게 다루는가
자유의지 논쟁은 법정에서도 메아리칩니다. 형사 책임은 전통적으로 행위자가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인은 때때로 피고인의 뇌 영상이나 신경학적 소견을 제시하며, 그가 자신의 충동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뇌에 어떤 손상이나 이상이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책임의 완전한 면제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동시에, 그런 요소를 양형이나 처우에서 고려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신경과학은 법에 새로운 증거와 관점을 제공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최종 답을 대신 내려 주지는 않습니다. 그 답은 여전히 사회적 합의와 가치 판단의 몫으로 남습니다.
법정의 한 장면 책임의 경계를 묻다
자유의지 논쟁이 법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하나의 장면으로 그려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충동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합시다. 재판에서 변호인은 그의 뇌에 충동을 억제하는 영역의 기능 이상이 있었다는 신경학적 소견을 제출합니다. 검사는 반박합니다. 그런 이상이 있어도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았고, 멈출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판사와 배심원은 이제 매우 어려운 물음 앞에 섭니다. 뇌의 상태는 책임을 얼마나, 어떻게 깎아 내리는가.
이 장면이 보여 주는 것은, 법이 자유의지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형벌 제도 전체가 사람이 자기 행동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장면은, 법이 자유의지 문제를 철학처럼 끝까지 파고들 수도 없다는 사실 역시 보여 줍니다. 법은 매 순간 누군가에게 구체적인 판결을 내려야 하므로, 형이상학적 결론을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은 대개 실용적인 절충을 택합니다. 완전한 자유나 완전한 결정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이 그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합당했는가라는 식의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절충은 어떤 의미에서 양립가능론의 정신과 닮아 있습니다. 법은 행위자가 우주의 인과를 벗어났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이성에 응답할 능력이 있었는지, 외부의 강제가 없었는지, 자신의 행동을 조절할 여지가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신경과학은 이 판단에 점점 더 정교한 자료를 보태고 있지만, 어디까지를 책임으로 볼 것인가라는 최종 선은 여전히 사회가 함께 그어야 하는 가치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거울
최근 들어 자유의지 논쟁은 뜻밖의 새로운 거울을 하나 얻었습니다. 바로 점점 정교해지는 인공지능입니다. 어떤 인공지능 시스템이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선택하고, 심지어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됩니다. 저 시스템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그리고 그 물음은 곧장 거울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저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 비교는 묘하게 양립가능론과 자유의지 부정론 양쪽 모두에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합니다. 한편으로, 복잡한 정보 처리 시스템이 인간과 비슷한 행동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선택 역시 결국 정교한 정보 처리의 산물일 수 있다는 그림에 무게를 더하는 듯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기계에 대해 책임이나 존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지 처리의 복잡성일까요, 아니면 의식이나 자기 이해 같은 또 다른 무엇일까요.
여기서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이 그것과 똑같다고 곧바로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인간만이 신비로운 자유의 불꽃을 지녔다고 손쉽게 단정하는 것도 충분한 논증 없이는 공허합니다.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거울은 답을 주기보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정확히 어떤 능력에 기대고 있는지를 더 날카롭게 묻도록 우리를 압박합니다. 오래된 질문이 새로운 기술을 만나 다시 한번 젊어진 셈입니다.
일상으로 돌아와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거대한 형이상학적 논쟁과 무관하게 우리는 매일 자유의지를 전제하며 산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친구의 약속을 믿고, 자신의 결심을 다지고, 잘못한 사람에게 사과를 기대합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면 사람들의 행동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그런 연구 결과들의 해석에는 신중함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자유의지라는 관념이 우리의 실천적 삶 깊숙이 박혀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이 관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듬을 것인가는, 그래서 한가한 사변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자유의지가 흔들리면 무엇이 흔들리는가
이 논쟁이 단지 학자들의 머릿속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한 번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관념은 우리 삶의 곳곳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흔들리면 함께 흔들리는 것들의 목록을 떠올려 보면, 이 문제의 무게가 실감 납니다.
먼저 후회와 자부심이 흔들립니다. 우리는 잘못한 일을 두고 그때 다르게 할 수 있었는데 하고 후회하고, 잘해 낸 일을 두고 내가 해냈다고 뿌듯해합니다. 이 두 감정은 모두 다른 선택이 가능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면, 후회와 자부심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양립가능론자라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후회는 과거를 향한 한탄이라기보다 미래를 위한 학습의 신호이고, 그렇게 보면 결정론과도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다음으로 용서가 흔들립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가 책임이 있음을 전제하면서도 그 책임을 면제해 주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아무도 책임이 없다면, 용서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게 될까요. 어쩌면 용서는 책임을 면제하는 일이 아니라, 분노를 내려놓고 관계를 새로 시작하기로 하는 결심에 가까운 것으로 다시 정의될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흔들립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나쁜 습관을 고치려 애씁니다. 이 모든 노력은 내가 나를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조차 대개 이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노력한다는 사실 또한 원인의 사슬 안에서 진짜로 결과를 바꾸는 한 마디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유의지 논쟁은 추상적 형이상학으로 시작해,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아주 구체적인 물음으로 돌아옵니다.
사고 실험의 방 네 개의 장면
추상적인 논의가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철학자들은 종종 사고 실험이라는 작은 무대를 세웁니다. 자유의지 논쟁에서도 몇 가지 장면이 유명합니다. 차근차근 들어가 보겠습니다.
첫 번째 방 프랭크퍼트의 가짜 갈림길
20세기 미국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다르게 할 수 있었음이 책임의 필수 조건이라는 통념을 흔드는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골자를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결심해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가 만에 하나 다른 선택을 하려고 했다면, 곁에서 지켜보던 누군가가 즉시 개입해 결국 같은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실제로는 그가 스스로 그 행동을 택했기 때문에 개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례의 묘미는 이렇습니다. 그는 사실상 다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길로 가려는 순간 개입이 그를 되돌려 놓았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자기 의지로 행동했고 따라서 책임이 있다고 느낍니다. 만약 이 직관이 옳다면, 다르게 할 수 있었음은 책임의 필수 조건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책임에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길의 존재가 아니라, 그 행동이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쳐 나에게서 비롯되었는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례는 양립가능론에 강력한 무기를 쥐여 주었지만, 동시에 그 설정이 과연 공정한지를 둘러싼 정교한 반론도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두 번째 방 빨려 들어가는 결정의 강
이번에는 다른 그림을 떠올려 봅시다. 당신의 모든 선택이, 태어나기 전부터 흐르고 있던 거대한 강물의 한 지점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질, 어린 시절의 경험, 우연히 읽은 책 한 권, 오늘 아침의 호르몬 상태까지, 이 모든 것이 합류해 지금 이 순간의 결정으로 흘러듭니다. 강한 결정론자는 바로 이 그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이 꼭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자유의지 부정론자들은 오히려 이 그림에서 일종의 위안을 발견합니다. 누군가가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때, 그 강물 전체를 보면 우리는 분노를 넘어 이해와 연민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태도가 책임을 너무 쉽게 면제해 주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강물의 비유는 매혹적이지만, 그 매혹이 곧 진리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방 쌍둥이 우주
같은 과거를 정확히 복제한 두 우주를 상상해 봅시다. 입자 하나하나까지 똑같은 두 우주에서, 어느 순간 한 사람이 동일한 갈림길에 섭니다. 결정론자는 두 우주에서 그 사람이 반드시 같은 선택을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리버태리언은 적어도 진정한 자유의지가 작동하는 순간이라면 두 우주에서 다른 선택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운 반론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만약 똑같은 과거에서 한 우주의 그는 진실을, 다른 우주의 그는 거짓을 말한다면, 그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두 우주의 모든 것이 같았으니, 그 차이를 설명할 그 무엇도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 쌍둥이 우주 장면은 자유와 우연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무대입니다.
네 번째 방 나를 설계한 사람
앞서 잠깐 등장했던 조작 사례를 조금 더 밀고 가 봅시다. 누군가가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의 모든 성향과 가치관을 세밀하게 설계했다고 해 봅시다. 당신은 평생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강제 없이, 진심으로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신념의 첫 단추는 설계자가 끼운 것입니다. 이때 당신의 삶은 자유로운가요.
이 장면이 까다로운 이유는, 설계자를 어떤 익명의 자연 과정으로 바꾸어도 구조가 거의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우리가 고르지 않은 출발점에서 시작합니다. 유전자도, 부모도, 시대도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는 처음부터 빌려 온 것일까요, 아니면 빌려 온 재료로도 충분히 나만의 무언가를 지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이 갈리는 지점이 곧 세 입장이 갈리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동양의 시선 운명과 마음 사이에서
자유의지 논쟁은 흔히 서양 철학의 전유물처럼 소개되지만, 비슷한 고민은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다만 문제의 틀이 다소 다르게 짜여 있었습니다.
예컨대 어떤 전통에서는 우주의 흐름이나 도리에 순응하는 것을 가장 높은 경지로 보았습니다. 이때 자유는 흐름을 거스르는 힘이 아니라, 흐름과 하나가 되는 깨달음에 가깝습니다. 또 어떤 전통에서는 행위와 그 결과의 길고 긴 사슬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슬을 끊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수행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인과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변화의 여지를 찾는 이 긴장은, 서양의 양립가능론이 던지는 물음과 묘하게 닮은 데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전통들을 서양식 자유의지 논쟁의 틀에 곧바로 끼워 맞추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각 사유는 저마다의 언어와 관심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나의 선택이 정말 나의 것인가, 그리고 거대한 흐름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특정 시대나 지역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어디서든 마주하게 되는 보편적 질문이라는 점입니다.
자유의지를 둘러싼 흔한 오해 세 가지
논의를 정리하기 전에, 이 주제에서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 몇 가지를 짚어 두면 도움이 됩니다.
첫째, 결정론을 운명론과 혼동하는 오해입니다. 운명론은 무엇을 하든 결과가 똑같이 정해져 있다는 체념적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결정론은 그런 주장이 아닙니다. 결정론에서도 나의 노력과 선택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진짜 원인입니다. 다만 그 노력과 선택 자체도 원인의 사슬 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결정론이 참이라 해도,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는 결론은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둘째, 자유의지가 있으려면 행동이 아무 원인 없이 일어나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앞서 보았듯, 원인 없는 행동은 자유가 아니라 무작위에 가깝습니다. 대부분의 진지한 입장은, 자유로운 행동도 어떤 식으로든 나의 이유와 성격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유와 무원인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셋째, 과학이 이 문제를 곧 끝낼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신경과학은 분명 귀중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책임이란 무엇인가 같은 물음은 그 자체로 개념적이고 규범적인 질문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뇌 영상도, 우리가 자유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를 대신 정해 주지는 못합니다. 과학과 철학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에서 협력해야 하는 관계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긴 논의를 지나오면 한 가지 실천적인 물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대체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세 입장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든 일상의 삶이 곧바로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강한 결정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도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 계획을 세우고, 사랑하는 이를 아끼고, 부당함에 분노합니다. 다만 그는 잘못한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이해하려 애쓰고, 자신의 실패를 두고 자책에 빠지기보다 원인을 살피려 할지도 모릅니다. 양립가능론자는 책임과 자유를 모두 유지한 채, 그러나 한 사람의 배경과 처지를 헤아리는 너그러움을 함께 품으려 합니다. 리버태리언은 매 순간의 선택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무게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흥미롭게도 이 세 가지 태도는 서로 배타적이라기보다, 한 사람 안에서 상황에 따라 번갈아 나타나곤 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잘못 앞에서는 그의 사정을 헤아리는 결정론자가 되었다가, 자신의 게으름 앞에서는 더 분발할 수 있다고 믿는 리버태리언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성숙한 삶이란 어느 한 입장을 교조처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이 여러 관점을 지혜롭게 오가며 자신과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정답이 아니라, 바로 이런 유연하고 너그러운 시선일 것입니다.
짧은 연표로 보는 논쟁의 흐름
아래는 자유의지 논쟁의 큰 줄기를 아주 거칠게 압축한 흐름입니다. 정확한 연도보다 사고의 순서를 느끼는 데 도움이 되도록 단순화했습니다.
고대 운명과 필연을 둘러싼 물음이 신화와 철학에서 등장
중세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양립하는가를 두고 격렬한 논쟁
근대 초기 고전 물리학의 성공과 함께 인과적 결정론의 그림이 또렷해짐
18세기 흄을 비롯한 사상가들이 양립가능론의 고전적 틀을 다듬음
19세기 라플라스의 악마로 상징되는 완전한 결정론적 세계상 정착
20세기 초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미시 세계의 비결정성이 부각됨
1980년대 리벳이 준비전위 실험으로 의식과 행동의 순서를 문제 삼음
2000년대 기능적 뇌영상 연구가 선택의 사전 예측 가능성을 보고
최근 준비전위의 재해석과 실험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 활발해짐
이 흐름이 보여 주듯, 같은 질문이 시대마다 다른 옷을 입고 되돌아옵니다. 신화의 운명은 신학의 예지가 되고, 다시 물리학의 인과가 되었다가, 오늘날에는 신경과학의 준비전위로 모습을 바꾸어 우리 앞에 다시 섭니다.
잠깐 퀴즈 당신의 직관은 어느 쪽인가
가벼운 마음으로 풀어 보십시오.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니라, 본인의 직관을 점검하는 거울에 가깝습니다.
문제 1. 다음 중 양립가능론의 핵심 주장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무엇일까요.
- 가. 결정론이 참이면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다
- 나. 우주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어도 사람은 의미 있는 자유와 책임을 가질 수 있다
- 다. 자유의지를 위해서는 양자역학적 우연이 반드시 필요하다
- 라. 모든 선택은 순전한 우연의 결과이다
문제 2. 리벳의 준비전위 실험에 대한 비판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요.
- 가. 의식의 시점을 시계로 자기보고하게 하는 방식이 부정확할 수 있다
- 나. 준비전위가 결정 신호가 아니라 흔들리는 배경 활동의 누적일 수 있다
- 다. 손가락을 까딱이는 동작이 숙고를 거친 선택을 대표하기 어렵다
- 라. 이 실험은 자유의지가 환상임을 완전히 증명했다
문제 3. 리버태리언 자유의지가 마주하는 운 반론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 가. 자유로운 선택은 반드시 신의 예지와 충돌한다
- 나. 인과에 의해 결정되지 않은 선택은 자칫 우연에 맡겨진 것처럼 보여 책임의 근거가 흔들린다
- 다. 결정론이 참이면 어떤 선택도 불가능하다
- 라. 뇌 활동이 의식보다 항상 앞선다
문제 4. 혼돈 이론이 자유의지 논쟁에 주는 교훈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 가. 예측 불가능함은 곧 비결정론을 증명한다
- 나. 예측 불가능함과 비결정성은 다른 문제이므로,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만으로 자유의지를 입증할 수는 없다
- 다. 혼돈계에는 자연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 라. 나비의 날갯짓은 언제나 태풍을 일으킨다
정답은 글의 맨 끝에 적어 두었습니다. 먼저 스스로 골라 본 뒤 확인해 보십시오.
마치며 답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을 위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결정론, 양립가능론, 리버태리언 자유의지라는 세 풍경을 거쳐, 리벳 실험과 그 비판, 그리고 도덕적 책임이라는 가장 뜨거운 골짜기를 지나왔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글은 어느 입장이 옳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각 입장이 너무나 강력한 근거와 너무나 진지한 약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여정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더 선명해진 질문들입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다르게 할 수 있었음은 책임에 정말로 꼭 필요한 조건인가. 과학이 마음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밝혀낼 때, 우리는 책임과 존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다듬어 가야 하는가. 처음에 들어 보았던 그 손, 아무 이유 없이 들었다 내렸던 그 손은, 알고 보면 이 모든 질문이 응축된 작은 우주였던 셈입니다.
좋은 철학은 우리에게 정답을 쥐여 주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묻고 있었는지를 더 또렷이 보게 해 줍니다. 자유의지 문제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를 멈춰 세우고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매혹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한 줄로 남기는 정리
길었던 여정을 한 줄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의지 문제의 핵심은 우주가 결정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사실 위에서 우리가 자유와 책임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고 또 무엇을 지켜 내고 싶은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정론은 세계의 짜임을 말하고, 양립가능론은 그 안에서도 책임이 살아남을 길을 찾으며, 리버태리언은 진짜 열린 미래를 갈망합니다. 세 목소리는 서로 다투지만, 그 다툼 자체가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생각할 거리
- 만약 미래를 완벽히 예측할 수 있는 기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당신의 선택은 달라질까요. 달라진다면, 그 변화는 결정론과 어떻게 어울릴까요.
- 어떤 사람이 불우한 환경 탓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합시다. 그의 책임은 줄어들까요. 줄어든다면 어디까지, 무엇을 근거로 줄어드는 걸까요.
- 자유의지가 환상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당신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게 될까요, 아니면 별로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 답은 당신에게 무엇을 말해 주나요.
- 똑같은 과거를 복제한 두 우주에서 당신이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 차이를 무엇이라고 부르고 싶은가요. 자유인가요, 우연인가요, 아니면 둘 다 아닌 제삼의 무엇인가요.
-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망설이고 선택하는 모습을 본다면, 당신은 그 시스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느낄까요. 그 직관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퀴즈 정답
- 문제 1 정답은 나입니다. 양립가능론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다고 봅니다.
- 문제 2 정답은 라입니다. 리벳 실험은 흥미로운 단서를 주었을 뿐, 자유의지가 환상임을 증명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문제 3 정답은 나입니다. 운 반론은 인과로 결정되지 않은 선택이 우연처럼 보여 책임의 근거가 흔들린다는 비판입니다.
- 문제 4 정답은 나입니다. 혼돈의 교훈은 예측 불가능함과 비결정성이 서로 다른 문제라는 점입니다.
참고 자료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ree Will, https://plato.stanford.edu/entries/freewill/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mpatibilism,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ompatibilism/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ausal Determinism, https://plato.stanford.edu/entries/determinism-causal/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guments for Incompatibilism, https://plato.stanford.edu/entries/incompatibilism-arguments/
- Encyclopaedia Britannica, Free will, https://www.britannica.com/topic/free-will
- Soon C. S. et al., Unconscious determinants of free decisions in the human brain, Nature Neuroscience, https://www.nature.com/articles/nn.2112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ree Will and Moral Responsibilit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moral-responsibi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