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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와 탈진실 — 사실이 흔들리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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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화성인이 쳐들어온 밤

1938년 10월 30일 저녁, 미국 동부의 라디오에서 한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평범한 댄스 음악이 흐르다가 갑자기 긴급 속보가 끼어듭니다. "화성에서 정체불명의 물체가 떨어졌습니다." 이어서 기자가 현장에서 외계 생명체의 침공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오슨 웰스가 연출한 라디오 드라마 "우주 전쟁"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실제로 얼마나 큰 공황을 일으켰는지는 오늘날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입니다. 당시 신문이 "라디오 청취자들이 패닉에 빠졌다"고 대서특필했지만, 후대 연구자들은 그 공황의 규모가 상당히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습니다. 가짜 침공을 둘러싼 이야기조차, 사실보다 더 자극적인 형태로 전해지며 또 하나의 부풀려진 서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 편의 에피소드는 우리가 다룰 주제를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정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어떻게 다시 왜곡되어 퍼지는가. 그리고 무엇이 "사실"인지를 가려내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운가. 오늘 우리는 가짜뉴스와 탈진실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려 합니다.

질문 하나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일주일 동안 본 뉴스 가운데 몇 개가 "사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요? 그리고 그 확신은 어디에서 왔나요? 직접 검증해서일까요, 아니면 그저 믿을 만해 보였기 때문일까요?

이 글은 누가 거짓말쟁이인지를 가려내려는 글이 아닙니다. 특정 진영이나 인물을 겨누려는 글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보다는 거짓 정보가 만들어지고 퍼지고 믿어지는 보편적인 구조를,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차분히 들여다보려는 시도입니다. 거짓에 가장 취약한 사람은 "나는 절대 안 속는다"고 믿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동안만큼은, 의심의 화살을 잠시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 보기를 권합니다.

첫걸음 — "탈진실"이라는 단어의 등장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그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습니다. 옥스퍼드의 정의에 따르면, 탈진실이란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신념에 대한 호소가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접두사 "탈(post)"은 단순히 "진실 이후"를 뜻하지 않습니다. 진실이 사라졌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이 더 이상 논의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부차적인 자리로 밀려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실 여부보다 "그것이 내 감정에 부합하는가", "내가 속한 집단의 믿음과 일치하는가"가 먼저 묻는 질문이 되어버린 시대 말입니다.

물론 거짓과 선전이 인류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고대 로마의 정적 비방, 중세의 마녀사냥을 부추긴 소문, 전쟁 시기의 선전물까지, 인간은 늘 정보를 무기로 삼아 왔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속도와 규모, 그리고 도달 범위입니다. 인쇄기가 종교개혁의 팸플릿을 실어 날랐듯이, 오늘날의 소셜미디어는 한 줄의 거짓말을 몇 시간 만에 수백만 명에게 전달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탈진실"이라는 단어가 그해의 단어로 뽑힌 것 자체가 하나의 신호였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단어가 시대의 단어로 선정된다는 것은, 그 현상이 비로소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경험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2016년의 그 선정은, 거짓이 그제야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그 문제를 비로소 또렷이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문제를 직시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탈진실"은 갑자기 떨어진 재앙이라기보다, 오래된 인간의 약점이 새로운 기술과 만나 증폭된 결과에 가깝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손쉽게 악마화하는 대신,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잠깐, "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탈진실을 이야기하려면, 그 앞에 놓인 "진실"이라는 말부터 잠깐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철학에서는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오래도록 여러 입장이 겨루어 왔습니다. 가장 직관적인 견해는 "대응설"이라 불립니다. 어떤 말이 진실인 것은, 그것이 세계의 실제 모습과 들어맞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가 온다"는 말은 정말로 비가 올 때 참입니다.

여기에 도전하는 여러 견해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진실이 사회적 합의나 유용성에 더 가깝다고 보고, 또 어떤 이들은 우리가 세계를 언제나 어떤 관점을 통해서만 본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런 논의는 자칫 "그럼 진실 같은 건 없는 것 아니냐"는 허무주의로 미끄러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진실의 본성을 두고 철학적으로 논쟁하는 일과, "사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 어떤 사건이 특정한 날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든 변하지 않는 사실에 속합니다. 탈진실의 진짜 위험은 진실이 복잡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잡함을 핑계 삼아 "어차피 다 똑같이 의심스럽다"며 모든 사실을 평평하게 만들어 버리는 태도에 있습니다. 건강한 회의주의와 냉소적 허무주의를 가르는 선은, 바로 이 지점에 그어집니다.

핵심 개념 — 거짓 정보에도 종류가 있다

흔히 우리는 모든 잘못된 정보를 뭉뚱그려 "가짜뉴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정보의 오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좀 더 정교한 구분을 제안합니다. 영국의 연구 단체 퍼스트드래프트(First Draft)의 클레어 워들(Claire Wardle)이 정리한 분류가 널리 인용되는데, 핵심은 "정보가 틀렸는가"와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있는가"라는 두 축입니다.

이 두 축을 교차시키면 세 가지 큰 범주가 나옵니다.

첫째, 오정보(misinformation)입니다. 내용은 틀렸지만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없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잘못된 건강 상식을 진심으로 믿고 선의로 친구에게 전달했다면, 그것은 오정보입니다. 거짓이지만 악의는 없습니다.

둘째, 허위정보(disinformation)입니다. 내용도 틀렸고, 해를 끼치거나 속이려는 의도도 있는 경우입니다.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여론을 조작하거나, 이익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이 여기에 속합니다. 조직적인 선전 공작이 대표적입니다.

셋째, 악성정보(malinformation)입니다. 내용 자체는 사실일 수 있지만, 해를 끼치기 위해 맥락을 비틀거나 사적인 정보를 폭로하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진짜로 오간 사적인 대화를 악의적으로 공개해 누군가를 망신 주는 행위가 그렇습니다. 사실이라고 해서 늘 무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좀 더 세분화된 일곱 가지 유형

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보 교란의 양상을 더 잘게 나눕니다. 다음 표는 그 핵심을 정리한 것입니다.

유형설명의도성
풍자/패러디해칠 의도는 없으나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유머낮음
잘못된 연결제목과 본문, 이미지가 서로 맞지 않음중간
오도하는 내용사안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도록 정보를 편집중간
잘못된 맥락진짜 내용을 엉뚱한 맥락에 갖다 붙임중간
사칭 콘텐츠진짜 출처인 척 위장높음
조작된 콘텐츠진짜 정보나 이미지를 손대어 왜곡높음
날조된 콘텐츠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으로 지어냄높음

이 분류가 중요한 이유는, 모든 거짓 정보를 똑같이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선의로 퍼뜨린 잘못된 상식과, 누군가를 무너뜨리려 정교하게 날조한 영상은 같은 무게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대응의 방식도, 책임의 정도도 달라야 합니다.

소문은 어떻게 자라는가

거짓 정보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입니다. 20세기 중반의 한 심리학 연구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를 거치며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살폈고, 거기서 세 가지 흥미로운 경향을 짚어냈습니다.

첫째는 "평준화"입니다. 이야기가 전해질수록 세부가 깎여 나가고, 점점 짧고 단순해집니다.

둘째는 "강조"입니다. 남은 세부 가운데 인상적인 몇 가지가 도드라지면서, 전체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그쪽으로 쏠립니다.

셋째는 "동화"입니다. 이야기가 듣는 사람의 기존 기대나 편견에 맞도록 조금씩 다듬어집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모양으로 이야기를 기억하고 전합니다.

이 세 경향을 함께 놓고 보면, 소문이란 단순히 "사실이 부정확하게 전달된 것"이 아니라, 전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차곡차곡 담아내는 그릇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소셜미디어에서 한 줄의 글이 공유를 거듭하며 변형되는 모습도, 본질적으로 이 오래된 소문의 문법을 닮아 있습니다. 매체는 바뀌었지만, 사람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입니다.

깊이 들어가기 1 — 우리는 왜 거짓에 끌리는가

가짜뉴스를 논할 때 흔히 "누가 거짓을 만드는가"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더 불편하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은 "왜 우리는 그것을 믿고 퍼뜨리는가"입니다. 거짓이 퍼지는 데에는 만드는 사람만큼이나, 받아들이고 다시 전달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 있습니다.

확증편향이라는 마음의 습관

심리학에서 오래도록 연구된 개념 가운데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미 믿고 있는 바를 뒷받침하는 정보는 쉽게 받아들이고, 그에 어긋나는 정보는 깐깐하게 의심하거나 아예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는 마음의 게으름이라기보다 일종의 효율 전략입니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매번 처음부터 검증한다면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뇌는 지름길을 택합니다. 다만 이 지름길이 거짓 정보를 만나면, 우리는 듣고 싶은 거짓을 골라 믿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똑똑한 사람일수록 이 함정에서 더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과 논리력이 뛰어난 사람은, 자기가 이미 내린 결론을 정당화할 그럴듯한 근거를 더 능숙하게 지어내곤 합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추론 능력이 진실을 찾기보다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고 표현합니다. 즉 비판적 사고력은 양날의 칼입니다. 그것이 나 자신의 믿음을 향할 때 비로소 거짓을 거르는 방패가 되고, 오직 남의 주장만을 겨눌 때에는 편향을 더 단단히 굳히는 무기가 됩니다.

에코체임버와 필터버블

확증편향은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의 믿음을 메아리처럼 되울려 주는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이를 "에코체임버(echo chamber)", 곧 반향실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방 안에서는 자기 생각이 점점 더 옳게 느껴집니다. 반대 의견은 들리지 않거나, 들려도 적의 목소리로만 인식됩니다.

여기에 알고리즘이 더해집니다. 미국의 활동가 일라이 패리저(Eli Pariser)는 2011년 무렵 "필터버블(filter bubbl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추천 알고리즘이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만 골라 보여주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의 거품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필터버블의 효과가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를 두고 견해가 갈립니다. 어떤 연구는 그 영향이 통념만큼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알고리즘을 유일한 범인으로 지목하기보다, 인간의 성향과 기술이 맞물린 현상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거짓이 더 빨리 달리는 이유

2018년,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흥미로운 연구가 실렸습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연구진은 한 소셜미디어에서 수년치의 정보 확산을 분석한 결과, 거짓 정보가 사실보다 더 멀리, 더 빨리, 더 넓게 퍼지는 경향을 보였다고 보고했습니다. 연구진은 그 이유로 거짓 정보가 흔히 더 새롭고 놀라우며, 분노나 두려움 같은 강한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결과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남깁니다. 만약 거짓이 본질적으로 더 "재미있고 자극적"이라면, 진실은 늘 불리한 경기를 치르는 셈입니다. 차분하고 복잡하며 단서가 많은 진실은, 단순하고 선명하며 충격적인 거짓 앞에서 종종 밀려납니다.

진실의 효과와 거짓의 효과, 한눈에 비교

거짓이 빠르게 퍼지는 까닭을 진실과 나란히 견주어 보면 그 비대칭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다음 표는 정보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를 단순화해 정리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진실이 지루하고 모든 거짓이 자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인 경향을 짚어 보기 위한 비교입니다.

요소자극적인 거짓이 흔히 가지는 성질차분한 진실이 흔히 가지는 성질
새로움처음 듣는 충격적 내용이미 알려졌거나 예상 가능한 내용
감정분노, 공포, 통쾌함을 강하게 자극감정의 진폭이 비교적 작음
단순함한 줄로 요약되는 선명한 결론조건과 단서가 많아 복잡함
공유 욕구곧바로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짐공유의 동기가 약한 편
검증 비용믿기 쉬워 따로 확인하지 않음정확히 이해하려면 품이 듦

이 표가 일러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진실을 외면해서 거짓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거짓이 우리의 본능적 약점을 더 능숙하게 건드리기 때문에 앞서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에 맞서는 첫걸음은 남을 탓하기 전에, 내 마음이 어떤 미끼에 약한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반복은 어떻게 믿음이 되는가

심리학에는 "단순 노출 효과"와 가까운, "진실 착각 효과(illusory truth effect)"라 불리는 현상이 있습니다. 같은 주장을 여러 번 되풀이해 들으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점점 더 사실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익숙함이 신뢰로 둔갑하는 셈입니다.

이 현상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어떤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건 거짓이야"라고 분명히 판단했더라도, 같은 말을 거듭 마주치는 사이에 그 경계가 흐릿해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쪽이 같은 메시지를 끈질기게 반복하는 데에는 이런 심리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다"는 느낌은, 사실 진위를 가리는 기준으로 삼기에 가장 위험한 감각 가운데 하나입니다.

깊이 들어가기 2 — 딥페이크, 보는 것을 더는 믿을 수 없을 때

오랫동안 인류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믿어 왔습니다. 사진과 영상은 글보다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이 오래된 믿음에 균열을 냅니다.

딥페이크(deepfake)는 "딥러닝(deep learning)"과 "가짜(fake)"를 합친 말로, 인공지능을 이용해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영상이나 음성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의 얼굴을 다른 영상에 합성하거나,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하지 않은 말을 하게 만드는 일이 점점 쉬워지고 있습니다.

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입니다. 영화 제작, 교육 자료, 세상을 떠난 예술가의 목소리 복원처럼 의미 있는 쓰임도 많습니다. 문제는 악용입니다. 정치인이 하지 않은 발언을 한 것처럼 꾸미거나, 평범한 개인을 동의 없이 가짜 영상에 합성하는 일은 심각한 피해를 낳습니다.

딥페이크가 글로 된 거짓과 다른 점은, 그것이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을 노린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글은 의심해도, 두 눈으로 본 장면은 좀처럼 의심하지 못합니다. "본 것을 믿는다"는 본능은 인류가 오랜 세월 다듬어 온 생존의 지혜였지만, 이제 그 지혜가 거꾸로 약점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딥페이크 시대의 미디어 문해력은, 글을 읽는 능력을 넘어 "보는 것조차 의심할 줄 아는" 새로운 감각을 요구합니다.

더 깊은 위협은 어쩌면 "거짓말쟁이의 배당금(liar's dividend)"이라 불리는 현상일지 모릅니다. 가짜 영상이 흔해지면, 진짜 영상마저 "저건 딥페이크다"라며 부정할 수 있게 됩니다. 진실을 위조하는 능력보다, 진실을 부정할 핑계를 모두에게 쥐여주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증거가 흔들리면, 공유된 현실의 토대 자체가 흔들립니다.

위조와 탐지의 끝없는 경주

딥페이크를 둘러싼 풍경은 흔히 창과 방패의 경주에 비유됩니다. 한쪽에서는 더 그럴듯한 가짜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가짜를 가려내는 탐지 기술이 뒤를 쫓습니다. 부자연스러운 눈 깜빡임이나 빛의 방향, 음성의 미세한 떨림 같은 단서를 분석해 위조를 잡아내려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경주에서 만드는 쪽이 종종 한발 앞선다는 데 있습니다. 탐지 기술이 어떤 허점을 잡아내면, 위조 기술은 곧 그 허점을 메우는 식으로 진화합니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은 기술적 탐지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영상의 출처를 처음부터 기록해 두는 "콘텐츠 출처 증명"이나, 진짜 자료에 디지털 서명을 남기는 방식처럼, 가짜를 잡기보다 진짜를 증명하는 방향의 노력이 함께 논의되는 까닭입니다.

기술적 해법이 어디까지 가든, 결국 마지막 방패는 보는 사람의 신중함입니다. 충격적인 영상을 보았을 때 곧바로 반응하기 전에, "이것은 누가, 언제, 어디서 처음 올렸는가"를 묻는 한 박자의 여유가 그 무엇보다 든든한 방어막이 됩니다.

의심과 신뢰, 그 미묘한 균형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딥페이크를 경계한 나머지 모든 영상을 가짜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앞서 말한 "거짓말쟁이의 배당금"의 함정에 스스로 빠지게 됩니다. 진짜 증거마저 "어차피 조작 가능하잖아"라며 외면하는 순간, 거짓을 만드는 쪽이 오히려 이기는 셈입니다.

그러니 목표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할 곳과 신뢰할 곳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출처가 분명하고 여러 신뢰할 만한 곳에서 함께 확인되는 자료는 신중히 신뢰하고, 출처가 불분명하고 감정만 자극하는 자료는 한 번 더 멈추어 살피는 것. 이 균형 감각이야말로 딥페이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일지 모릅니다.

깊이 들어가기 3 — 팩트체크, 그리고 그 한계

거짓에 맞서기 위해 등장한 대표적인 제도가 팩트체크(fact-checking)입니다. 언론사와 독립 기구들은 떠도는 주장을 검증해 "사실", "절반의 사실", "거짓" 등으로 판정합니다. 미국의 포인터 연구소(Poynter Institute)가 운영하는 국제 팩트체킹 네트워크(IFCN)는 전 세계 팩트체크 기관들의 공통 윤리 강령을 마련해 두기도 했습니다.

팩트체크는 분명 가치 있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만능은 아닙니다. 그 한계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오히려 팩트체크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한계를 숨기는 검증은 또 하나의 권위가 되어 버리지만, 한계를 인정하는 검증은 독자와 함께 진실을 찾아가는 동반자가 됩니다.

첫째, 속도의 문제입니다. 하나의 주장을 꼼꼼히 검증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사이 거짓은 이미 수십만 번 공유되어 있습니다. 진실이 신발을 신는 동안 거짓은 지구 반 바퀴를 돈다는 옛 격언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둘째, 도달의 문제입니다. 팩트체크 결과는 흔히, 애초에 그 거짓을 믿지 않은 사람에게만 닿습니다. 거짓을 굳게 믿는 사람은 정정 보도조차 "그들이 진실을 숨기려 한다"는 또 하나의 증거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셋째, 역화 효과(backfire effect)에 대한 논쟁입니다. 한때 "잘못을 바로잡으면 오히려 믿음이 강해진다"는 주장이 주목받았으나, 이후 여러 연구는 이 효과가 생각만큼 흔하거나 강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즉 정정은 대체로 도움이 되지만, 만능 해법은 아니라는 절제된 결론이 더 정확합니다.

넷째, 판정 자체의 어려움입니다. 명백한 사실과 명백한 거짓 사이에는 넓은 회색지대가 있습니다. 맥락, 해석, 가치판단이 얽힌 사안에서는 "무엇이 사실인가"를 정하는 일 자체가 논쟁적입니다. 누가 검증자를 검증하는가라는 오래된 물음도 여기서 고개를 듭니다.

이런 한계는 팩트체크가 쓸모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팩트체크 하나에 모든 짐을 지울 수 없으며, 개인의 비판적 사고와 함께 가야 한다는 점을 일러줍니다.

사실만으로는 마음이 잘 바뀌지 않는다

팩트체크의 한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한 가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은 좀처럼 사실만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을 붙드는 데에는 단순히 "그것이 참이라서"를 넘어선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믿음은 우리의 정체성과 얽혀 있습니다. 내가 속한 집단이 공유하는 믿음을 의심하는 일은, 단순한 사실 교정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하는가"를 흔드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주장을 반박하는 일은, 본인도 모르게 그의 소속감을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은 사실의 목록보다 이야기에 더 쉽게 설득됩니다. 잘 짜인 하나의 이야기는, 흩어진 통계 수십 개보다 강하게 마음에 남습니다. 거짓 정보가 종종 선명한 서사의 옷을 입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점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바는 역설적입니다. 거짓에 맞서려면 더 많은 사실을 들이미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대의 입장을 먼저 존중하고, 공통의 가치에서 출발하며, 사실을 더 나은 이야기 안에 담아 전할 때 비로소 대화의 문이 열립니다. 진실을 전하는 일은 정보의 문제이기 이전에, 신뢰와 관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생각 실험 둘 —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서

추상적인 논의를 잠시 내려놓고, 두 가지 가상의 상황을 함께 떠올려 봅시다. 정답을 맞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직관을 들여다보기 위한 사고실험입니다.

첫 번째 상황입니다. 어떤 정보가 사실은 거짓이지만, 그것을 믿음으로써 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고 더 친절해진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도 우리는 그 거짓을 바로잡아야 할까요? "해롭지 않은 거짓"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이는 진실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답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결과가 좋다면 굳이 흔들 필요가 없다고 답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관은 어느 쪽에 가깝나요?

두 번째 상황입니다. 어떤 사실이 명백히 참이지만, 그것이 공개되면 무고한 누군가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고 가정해 봅시다. 진실을 말할 권리와, 해를 끼치지 않을 책임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순간입니다. 앞서 살펴본 "악성정보"가 바로 이 회색지대에 자리합니다.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폭로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면, 그 경계는 어디일까요?

이 두 물음에 깔끔한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미리 머릿속에서 굴려 보는 일은, 막상 현실에서 비슷한 갈림길에 섰을 때 우리가 조금 더 신중해지도록 도와줍니다. 진실을 다루는 일은 단순히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 진실을, 지금, 이렇게 다루는 것이 옳은가"라는 더 깊은 물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 — 스스로 지키는 힘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떠오르는 열쇳말이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곧 미디어 문해력입니다. 이는 정보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누구에 의해, 왜,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읽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미국의 비영리 단체들과 도서관 협회 등은 정보를 마주했을 때 던질 수 있는 간단한 점검 질문을 제안해 왔습니다. 그 정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보를 마주했을 때의 점검 흐름]

1. 멈추기      : 강한 감정이 들면 일단 멈춘다.
                 분노와 흥분은 공유 버튼을 누르게 한다.
2. 출처 보기   : 누가 말했는가? 믿을 만한 곳인가?
3. 근거 찾기   : 원본 자료가 있는가? 링크를 따라가 본다.
4. 교차 확인   : 다른 신뢰할 만한 곳도 같은 말을 하는가?
5. 맥락 살피기 : 언제, 어디서, 왜 만들어진 정보인가?
6. 의심하기    : 너무 완벽하게 내 생각과 맞으면 더 의심한다.

특히 마지막 항목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에 들지 않는 정보만 의심합니다. 그러나 진짜 비판적 사고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회의야말로 가장 어렵고 가장 값진 능력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흔한 함정을 짚어 두고 싶습니다. 풍자와 진짜 거짓을 혼동하는 경우입니다. 풍자나 패러디는 본디 웃음과 비판을 위한 장치이지, 속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글이 원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떠돌 때 생깁니다. 누군가는 농담으로 쓴 글을 다른 누군가는 진지한 보도로 오해하고 퍼뜨립니다. 그래서 어떤 정보를 마주했을 때 "이것이 애초에 진지한 주장으로 쓰인 것인가, 아니면 풍자였는가"를 헤아리는 것도 미디어 문해력의 한 부분입니다. 같은 문장도 어떤 의도와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측면 읽기라는 기술

스탠퍼드 대학의 한 연구진은 전문 팩트체커들이 정보를 검증하는 방식을 관찰한 끝에 흥미로운 습관을 발견했습니다. 일반 독자들은 한 웹페이지에 머물며 그 안에서 신뢰성을 판단하려 애쓰는 반면, 숙련된 검증자들은 곧바로 그 페이지를 떠나 다른 탭을 열고, 바깥의 여러 출처를 통해 그 출처 자체를 평가했습니다. 이를 "측면 읽기(lateral reading)"라 부릅니다.

비유하자면, 낯선 가게에 들어가 그 가게 간판만 들여다보며 믿을지 말지 고민하는 대신, 잠시 밖으로 나와 동네 사람들에게 그 가게의 평판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정보의 신뢰성은 그 정보 안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더 넓은 맥락에서 더 잘 드러나는 법입니다.

이 작은 습관 하나가 의외로 큰 차이를 만듭니다. 잘 꾸며진 가짜 웹사이트는 그 안에서 보면 더없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세련된 디자인, 전문가처럼 보이는 이름, 그럴듯한 인용까지 갖추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페이지를 잠시 떠나 바깥에서 그 출처를 검색해 보면, 정체가 한결 또렷이 드러나곤 합니다. 측면 읽기가 강력한 까닭은, 거짓이 가장 공들여 꾸미는 곳,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소개를 그대로 믿지 않고 우회하기 때문입니다.

미리 맞는 백신 — 접종 이론

거짓에 맞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접근으로 "접종 이론(inoculation theory)"이 있습니다. 1960년대 심리학자 윌리엄 맥과이어(William McGuire)가 제안한 이 발상은, 우리 몸이 약한 병원체에 미리 노출되어 면역을 기르듯, 우리 마음도 거짓의 작은 견본과 그 작동 원리를 미리 접해 두면 진짜 거짓을 만났을 때 더 잘 견딘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특정한 거짓 하나하나를 일일이 반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런 식의 속임수가 있다"는 수법 자체를 미리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가령 가짜 전문가를 내세우는 방식, 무관한 통계를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는 방식, 두 선택지밖에 없는 것처럼 몰아가는 방식을 미리 배워 두면, 나중에 그런 패턴을 마주쳤을 때 "아, 이거 그 수법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기 쉬워집니다. 거짓의 내용이 아니라 거짓의 문법을 가르치는 셈입니다.

이 접근이 매력적인 이유는, 정정 보도가 흔히 부딪히는 한계를 비껴가기 때문입니다. 이미 믿어 버린 거짓을 되돌리기는 어렵지만, 아직 만나지 않은 거짓에 대비시키는 일은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물론 모든 거짓을 미리 예측해 접종할 수는 없다는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후 반박"과 "사전 대비"를 함께 가져가는 발상은, 거짓에 맞서는 우리의 도구 상자를 한층 넓혀 줍니다.

한 장의 사진이 일으킨 오해 — 맥락이 전부일 때

거짓 정보가 늘 새빨간 날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진짜 사진과 진짜 영상이, 엉뚱한 맥락에 놓이는 것만으로 강력한 거짓이 됩니다. 예컨대 한 재난 현장의 오래된 사진이, 전혀 다른 시점과 장소의 사건인 양 다시 퍼지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사진 자체는 조작되지 않았기에 "가짜"라고 부르기 애매하지만,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한 오도입니다.

이것이 앞서 살펴본 워들의 분류에서 "잘못된 맥락"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미지 검색이나 원본 추적 같은 도구가 빛을 발합니다. 어떤 사진을 처음 본 순간 "이 장면이 정말 지금, 이곳의 일일까"를 묻고, 그 출처와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작은 습관이 수많은 오해를 미리 막아 줍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경계가, 콘텐츠 그 자체보다 그것이 놓인 맥락에 달려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다양한 시선 — 표현의 자유와 규제 사이

여기서 우리는 가장 까다로운 갈림길에 섭니다. 거짓 정보가 해롭다면, 사회는 그것을 규제해야 할까요? 아니면 표현의 자유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거짓마저 견뎌야 할까요? 이 물음에는 손쉬운 정답이 없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양쪽의 목소리를 모두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규제에 무게를 두는 시선

한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짓 정보는 단순한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피해를 낳는다고요. 잘못된 건강 정보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고, 조작된 선동은 사회의 혼란과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개인을 표적 삼은 허위 영상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깁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거대 플랫폼이 거짓의 확산을 방치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담배나 식품에 안전 기준을 두듯, 정보 환경에도 일정한 규칙과 투명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유럽연합이 마련한 디지털 서비스법(Digital Services Act)처럼, 플랫폼에 위험 정보에 대한 일정한 책임을 묻는 제도적 흐름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옵니다.

이 진영은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말이 때로 책임을 회피하는 방패로 쓰인다고 지적합니다. 개인이 거리에서 외치는 한마디와, 알고리즘이 수백만 명에게 자동으로 퍼뜨리는 한마디는 그 영향력의 크기가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전례 없는 확산력을 가진 거대 플랫폼에는, 그에 걸맞은 전례 없는 책임이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본디 책임이 짝을 이룬다는 오래된 원칙을, 새로운 기술 환경에 맞게 다시 묻는 셈입니다.

표현의 자유에 무게를 두는 시선

다른 한쪽에서는 우려를 표합니다. 누가 무엇을 "거짓"이라 판정할 권한을 가지는가. 역사를 돌아보면, 권력자들은 종종 "거짓 정보 단속"이라는 명분으로 비판과 반대를 억눌러 왔습니다. 오늘의 정설이 내일은 뒤집히기도 합니다. 과학사는 한때 "거짓"으로 몰렸다가 훗날 옳았음이 밝혀진 주장들로 가득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거짓에 대한 최선의 해법은 또 다른 거짓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고 더 좋은 발언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미국 헌법 전통에서 자주 인용되는 "더 많은 발언(more speech)"이라는 원칙이 그것입니다. 검열의 칼은 한번 손에 쥐어지면, 결국 가장 약한 목소리를 겨눌 위험이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우려에는 역사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유해한 정보를 막는다"는 명분이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쓰여 왔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권력은 종종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혼란을 부추기는 거짓"으로 규정해 침묵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판정의 기준은 늘 판정하는 자에게 유리하게 그어지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이 진영은 묻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짓을 단속할 권한을 누군가에게 쥐여 준다면, 그 권한이 언제나 선의로만 쓰이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가장 무서운 것은 노골적인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휘둘리는 권력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치의 긴장을 마주하기

흥미로운 사실은, 양쪽 모두 더 건강한 공론장을 바란다는 점입니다. 다만 그 길에 대한 판단이 다릅니다. 한쪽은 해악을 줄이려면 일정한 개입이 필요하다 보고, 다른 한쪽은 자유를 지키려면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현실의 많은 사회는 이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점을 찾으려 애씁니다. 예컨대 명백히 거짓이면서 직접적 해를 끼치는 정보는 제한하되, 의견과 해석의 영역은 폭넓게 보호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경계선을 정확히 어디에 그을지는 사회마다, 시대마다 다르게 답해 왔습니다. 정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 논쟁을 성숙하게 다루는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

누구의 책임인가 — 세 층위의 역할

거짓 정보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책임의 화살을 한 곳으로 몰고 싶어 합니다. "플랫폼이 문제다", "교육이 문제다", "개인이 게으른 탓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세 층위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가장 바깥에는 사회와 제도의 층위가 있습니다. 어떤 규칙을 둘지, 플랫폼에 어떤 투명성을 요구할지, 공교육에서 미디어 문해력을 어떻게 가르칠지 같은 문제입니다. 가운데에는 플랫폼과 언론의 층위가 있습니다. 무엇을 추천하고 무엇을 억제할지, 어떤 정보에 경고를 붙일지, 정정은 얼마나 눈에 띄게 노출할지 같은 설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는 개인의 층위가 있습니다. 멈추어 묻고, 출처를 따지고, 공유 버튼 앞에서 한 박자 멈추는 일상의 선택입니다.

이 세 층위는 서로를 핑계 삼기 쉽습니다. 개인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시스템이 문제인데"라 말하고, 플랫폼은 "이용자가 원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 말하며, 제도는 "표현의 자유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모두 일리가 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길은, 각 층위가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몫을 함께 감당하는 데 있을지 모릅니다. 거대한 한 방의 해결책을 기다리기보다 말입니다.

금지 말고 다른 길은 없을까

거짓 정보에 대응하는 방법을 "금지하느냐 마느냐"의 이분법으로만 보면, 우리는 가장 거친 두 선택지 사이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표현 자체를 막지 않으면서도 정보 환경을 건강하게 만드는 여러 중간 지대가 있습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는 "맥락 덧붙이기"입니다. 어떤 게시물을 지우는 대신, 그 곁에 검증된 배경 정보나 다른 관점을 함께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무엇을 믿을지는 여전히 이용자가 정하되, 판단에 필요한 재료를 더 풍부하게 제공하는 셈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찰 더하기"입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글을 공유하려 할 때 "정말 공유하시겠어요?"라고 한 번 더 묻거나, 읽지 않은 기사를 공유하려 하면 먼저 본문을 권하는 식의 작은 멈춤 장치입니다. 강제는 아니지만, 충동적인 확산에 잠깐의 숨 고를 틈을 줍니다.

또 하나는 "투명성 요구"입니다. 어떤 정보가 왜 내게 추천되었는지, 어떤 광고를 누가 후원했는지를 드러내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정보를 막는 대신, 그 정보가 흐르는 통로를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접근입니다.

물론 이 중간 지대의 방법들도 완벽하지 않으며, 저마다 부작용과 논쟁거리를 안고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지가 "전면 허용"과 "전면 금지" 둘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더 정교한 도구들을 상상하고 견주어 보는 일이야말로, 이 어려운 문제를 성숙하게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잠깐 퀴즈 — 당신의 정보 감각 점검하기

읽은 내용을 정리할 겸, 가벼운 퀴즈를 함께 풀어 봅시다. 답은 바로 아래에 있으니, 먼저 스스로 생각해 본 뒤 확인해 보세요.

문제 1. 친구가 잘못된 건강 상식을 진심으로 믿고 선의로 공유했습니다. 이것은 오정보, 허위정보, 악성정보 중 무엇일까요?

문제 2. 어떤 내용이 사실이긴 한데,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고 사적인 대화를 폭로한 경우는 무엇이라 부를까요?

문제 3. "측면 읽기(lateral reading)"란 무엇을 뜻할까요?

문제 4. 거짓 영상이 흔해지면서 진짜 영상마저 "저건 가짜"라고 부정하게 되는 현상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문제 5.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쪽에서 거짓에 맞서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원칙은 무엇일까요?


정답입니다.

답 1. 오정보(misinformation)입니다. 내용은 틀렸지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답 2. 악성정보(malinformation)입니다. 내용 자체는 사실이어도 해를 끼치려는 의도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답 3. 한 웹페이지 안에 머물지 않고, 그 페이지를 떠나 다른 출처들을 통해 그 출처의 신뢰성을 검증하는 방법입니다.

답 4. 거짓말쟁이의 배당금(liar's dividend)입니다.

답 5. "더 많은 발언(more speech)" 원칙, 곧 검열 대신 더 많고 더 좋은 발언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몇 개나 맞히셨나요. 틀린 문제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답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정보를 마주할 때 이런 질문을 떠올리는 습관입니다.

정보 교란의 역사, 한눈에 보기

가짜뉴스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흐름을 간단한 연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연도와 사건은 큰 흐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세부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정보 교란과 그에 맞선 노력의 큰 흐름]

15세기   인쇄기의 등장. 지식의 대중화와 동시에
         팸플릿을 통한 선전과 비방도 폭발적으로 늘다.

1938년   라디오 드라마 "우주 전쟁" 방송.
         미디어가 대중의 인식에 미치는 힘을 둘러싼
         논쟁을 남기다.

20세기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기, 국가 차원의
         선전(propaganda)이 정교한 기술로 발전하다.

2000년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확산.
         누구나 정보를 만들고 퍼뜨리는 시대가 열리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하다.

2018년   거짓 정보가 사실보다 빠르게 퍼진다는
         대규모 분석 연구가 학술지에 발표되다.

2020년대 생성형 인공지능과 딥페이크의 발전으로
         "보는 것"의 신뢰성마저 도전받기 시작하다.

이 연표가 일러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기술이 바뀔 때마다 정보 교란의 형태도 바뀌어 왔고, 그에 맞선 인간의 노력 또한 거듭 새로워져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긴 이야기의 한 장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작은 습관들

거창한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를 마주하는 매 순간의 작은 선택입니다. 앞서 살펴본 내용을 일상에서 곧바로 써먹을 수 있도록 몇 가지 습관으로 추려 보았습니다. 모두를 한꺼번에 지키려 애쓰기보다, 마음에 드는 하나부터 시작해 보아도 좋습니다.

  • 감정이 먼저 솟구치면 잠시 멈춥니다. 분노나 통쾌함이 클수록, 그 정보는 한 번 더 의심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 공유 버튼을 누르기 전에 출처를 확인합니다. 누가, 언제, 어떤 의도로 만든 정보인지 묻습니다.
  • 제목만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끝까지 읽어 보면, 제목과 다른 내용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 같은 사안을 다루는 다른 출처를 적어도 하나 더 찾아봅니다. 한 곳의 말만으로는 그림이 반쪽입니다.
  • 충격적인 사진이나 영상은 그 출처와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진짜 자료가 엉뚱한 맥락에 놓인 경우가 흔합니다.
  • 내 생각과 딱 맞아떨어지는 정보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합니다. 가장 위험한 거짓은 내가 믿고 싶었던 거짓입니다.
  • 틀렸음을 알았을 때는 조용히 정정합니다. 실수를 인정하는 일은 약함이 아니라, 진실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이 습관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 박자의 여유"를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거짓이 우리의 즉각적 반응을 노린다면, 우리의 가장 든든한 방패는 바로 그 즉각성에 작은 틈을 내는 일입니다.

맺으며 — 흔들리는 시대를 건너는 법

다시 처음의 화성인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1938년의 청취자들은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 앞에서 무엇이 드라마이고 무엇이 속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비슷한 처지일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 앞에 놓인 매체가 라디오에서 무한히 흐르는 피드와 정교한 인공지능 영상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탈진실의 시대를 건너는 길에 마법 같은 한 방은 없습니다. 거짓을 단번에 없애는 기술도, 모두를 만족시킬 규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강력한 도구가 있습니다. 멈추어 묻고, 출처를 따지고, 교차 확인하고, 무엇보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을 향해서도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태도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도 모든 사실을 직접 검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어느 정도 다른 사람과 제도를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문제는 "신뢰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어디까지, 왜 신뢰할 것인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거짓 정보를 경계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자칫 모든 것을 의심하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냉소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탈진실의 해독제가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얼굴입니다. 모든 것을 똑같이 의심하는 사람은, 결국 가장 큰 목소리나 가장 자극적인 이야기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건강한 비판은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근거를 가진 쪽으로 믿음을 옮길 줄 아는 유연함입니다. 회의(懷疑)는 도착점이 아니라 더 나은 앎으로 가는 길목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생각해 볼 물음 몇 가지를 남깁니다.

첫째, 나는 어떤 정보에 가장 쉽게 마음을 여나요? 그리고 그 정보가 내 기존 믿음과 얼마나 닮아 있나요?

둘째, 내가 최근 누군가에게 공유한 정보를 나는 정말로 검증했나요, 아니면 그저 믿을 만해 보였나요?

셋째, 표현의 자유와 거짓 정보 규제 사이에서, 나라면 그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까요? 그리고 그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넷째, 만약 내가 굳게 믿어 온 무언가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나는 기꺼이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 마지막 순간에 무엇이 나를 망설이게 할까요?

다섯째, 나는 거짓을 가려내는 능력을 주로 누구를 향해 쓰고 있나요? 내 반대편의 주장에만 날카롭고, 내 편의 주장에는 너그럽지는 않은가요?

이 질문들에 단번에 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질문을 품고 사는 것 자체가, 사실이 흔들리는 시대를 조금은 더 단단하게 건너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진실은 종종 느리고 복잡하지만, 그래도 끝내 찾을 가치가 있는 무엇이니까요.

어쩌면 탈진실의 시대가 우리에게 건네는 역설적인 선물이 하나 있을지 모릅니다. 무엇이든 쉽게 믿을 수 없게 된 바로 그 불편함이,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묻고 더 신중히 판단하도록 떠민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거저 주어지던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 진실은 함께 찾아 나서야 하는 무엇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고로운 여정은,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일 때 한결 든든해집니다. 서로의 맹점을 비춰 주고, 다른 시선을 나누며, 틀렸을 때 기꺼이 고쳐 가는 공동체야말로, 흔들리는 시대를 건너는 가장 오래된 다리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글을 덮은 뒤, 다음번에 충격적인 소식을 마주하게 된다면 잠시만 멈추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 짧은 멈춤 속에서 한 번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사실일까. 나는 왜 이것을 믿고 싶어 할까." 그 작은 질문 하나가, 사실이 흔들리는 시대를 건너는 우리 각자의 가장 단단한 디딤돌이 되어 줄 것입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