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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14년이 100년을 바꾸다 — 사물의 형태를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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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ju Kim
- @fjvbn20031
들어가며 — 14년만 존재한 학교
바우하우스는 1919년 4월 바이마르에서 문을 열었고, 1933년 나치의 압력 속에 스스로 해산했습니다. 존속 기간은 14년입니다. 재학생은 늘 수백 명 규모였고, 졸업생 수를 다 합쳐도 1,300명 안팎으로 추산됩니다. 지방 소도시의 미술학교 하나가 겪은 짧은 소동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규모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쓰는 사무용 의자, 스마트폰의 아이콘 격자, 지하철 노선도의 서체, 이케아 매장의 조립식 가구, 심지어 "군더더기를 덜어낸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감각 자체가 이 14년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 불균형이 바우하우스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학교는 짧게 존재했고, 영향은 길게 남았습니다.
이야기가 길게 남는 동안 사실은 자주 뭉개졌습니다. 바우하우스의 대명사처럼 인용되는 문장은 정작 바우하우스의 것이 아니고, 개교 선언문이 모든 예술은 건축으로 모인다고 외쳤지만 건축과는 8년 뒤에야 생겼으며, 학교에 가장 큰 돈을 벌어다 준 물건은 미술관에 놓인 강관 의자가 아니라 벽지였습니다. 순서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바이마르에서 베를린까지 — 14년의 지도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1919년 바이마르의 미술 아카데미와 공예학교를 합쳐 새 학교를 세웁니다. 이름은 바우하우스. 중세의 건축 공방을 뜻하는 옛말을 뒤집어 만든 조어였습니다. 개교 선언문의 표지에는 리오넬 파이닝거의 목판화 대성당이 실렸습니다. 별 세 개가 뜬 고딕 성당 — 화가와 조각가와 장인이 하나의 건축을 위해 모이던 중세 길드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끌어온 것입니다. 20세기 기계 문명의 학교가 중세의 은유로 출발했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바이마르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24년 선거로 우파가 주의회를 장악하자 예산이 반으로 잘렸고, 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은 뒤 데사우로 옮깁니다.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사우 교사는 1926년 12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모서리를 돌아 흐르는 유리 커튼월, 기능별로 갈라진 날개 동, 옥상에서 내려다봐야 전체가 보이는 배치. 건물 자체가 학교의 강령이었습니다.
데사우에서 학교는 가장 생산적이었고 동시에 가장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 사임했고, 후임 한네스 마이어는 학교를 사회적 필요와 원가 계산 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1930년 해임됩니다. 마지막 교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학교를 건축 중심으로 축소했습니다. 1932년 나치가 데사우 시의회를 장악하자 학교는 베를린 슈테글리츠의 버려진 전화기 공장으로 옮겨 사설 학교가 되었고, 1933년 4월 게슈타포의 수색을 겪은 뒤 그해 여름 자진 해산합니다.
| 시기 | 연도 | 교장 | 성격 | 남긴 것 |
|---|---|---|---|---|
| 바이마르 | 1919~1925 | 그로피우스 | 공예 길드의 언어, 예비과정 확립 | 1923년 전시, 이텐의 사임 |
| 데사우 | 1925~1932 | 그로피우스, 마이어, 미스 | 유리 교사, 공방의 산업화, 건축과 신설 | 강관 의자, 칸뎀 램프, 벽지 |
| 베를린 | 1932~1933 | 미스 반 데어 로에 | 전화기 공장의 사설 학교 | 1933년 자진 해산과 이주 |
예비과정 — 이론 대신 재료를 만지는 여섯 달
바우하우스의 교육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발명은 특정 가구가 아니라 예비과정입니다. 모든 신입생은 공방에 배치되기 전 반년 동안 이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디자인·미술대학의 1학년 기초 수업은 대체로 이 여섯 달의 후손입니다.
처음 이 과정을 설계한 사람은 스위스 화가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이었습니다. 그는 색채 대비 이론과 재료의 질감 연구를 도입했지만, 수업 방식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기이했습니다. 마즈다즈난이라는 신비주의 교단을 따라 삭발하고 승복 같은 옷을 입었으며, 수업 전에 호흡 체조를 시켰고, 학생들의 식단까지 관여했습니다. 그로피우스가 학교를 산업과 연결하려 하자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1923년 전시의 표어가 "예술과 기술, 새로운 통일"로 정해졌고, 그해 이텐은 학교를 떠납니다.
뒤를 이은 라슬로 모호이너지와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는 예비과정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갔습니다. 알베르스의 유명한 과제 하나는 이렇습니다. 학생들에게 신문지 한 뭉치를 나눠 주고, 도구도 접착제도 없이, 종이라는 재료 자체의 힘만으로 서 있는 무언가를 만들라고 합니다. 종이를 접으면 하중을 견딘다는 사실을 강의로 설명하는 대신 손으로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알베르스가 가르친 것은 형태가 아니라 재료를 심문하는 태도였습니다.
공방 체계도 같은 논리 위에 서 있었습니다. 각 공방에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습니다. 조형을 맡는 형태 마이스터(칸딘스키, 클레, 슐레머 같은 화가들)와 기술을 맡는 공방 마이스터(목수, 금속공, 직조공). 학생은 학생이 아니라 도제였고, 졸업장 대신 직인 자격을 땄습니다. 예술가는 위, 장인은 아래라는 오래된 위계를 무너뜨리려는 장치였습니다. 그로피우스는 선언문에서 예술가와 장인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다만 여기에도 어긋남이 있었습니다. 모든 예술이 결국 건축으로 모인다고 선언한 학교였지만, 정식 건축과가 생긴 것은 1927년, 개교 8년 뒤였습니다. 그전까지 건축을 배우고 싶은 학생은 그로피우스의 개인 사무소에서 어깨너머로 배워야 했습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누구의 문장인가
바우하우스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때 거의 자동으로 따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그런데 이 문장은 바우하우스의 표어였던 적이 없습니다.
출처는 미국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이 1896년에 쓴 고층 건물에 관한 글입니다. 바우하우스 개교보다 23년 앞섭니다. 게다가 설리번이 뜻한 바는 기계미학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독수리의 날개와 사과꽃의 형태를 예로 들며, 자연에서 형태가 기능을 따르듯 건물도 그러해야 한다는 유기적 비유를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건물은 장식이 대단히 풍부합니다. 시카고와 버펄로에 남은 그의 입면은 테라코타 덩굴무늬로 뒤덮여 있습니다. 장식을 사랑한 건축가의 문장이, 장식을 죄악시한 운동의 표어가 되어 100년을 떠돈 셈입니다.
바우하우스가 실제로 내건 말은 1923년 전시의 표어 "예술과 기술, 새로운 통일"에 가깝습니다. 기능만 남기자는 선언이 아니라, 예술의 조형 감각과 산업 생산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자주 실패했습니다.
가장 정직한 사례가 빌헬름 바겐펠트가 1924년에 만든 유리와 금속의 탁상 램프입니다. 지금도 생산되는 이 램프는 기계로 찍어 낸 물건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거의 수작업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비쌌습니다. 바겐펠트는 훗날 제조업자들이 자신의 램프를 보고 "기계로 만든 것처럼 생겼는데 왜 이렇게 비싸냐"고 물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기계 시대의 형태를 손으로 만들던 시기가 상당히 길었습니다. 형태가 기능을 따랐다기보다, 형태가 기능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양식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강관 의자와 직조기 — 그리고 여학생이 몰린 공방
바우하우스가 남긴 사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의 강관 의자입니다. 헝가리 출신으로 학생이었다가 가구 공방의 마이스터가 된 그는 1925년, 새로 산 아들러 자전거의 핸들을 보다가 생각합니다. 이음매 없는 강관은 가볍고 강하며 구부릴 수 있다. 이듬해 완성된 B3 의자는 가죽 띠 몇 줄과 강관 뼈대만으로 안락의자의 부피를 지웠습니다. 오늘날 이 의자는 바실리 체어라 불리지만, 그 이름은 바우하우스에서 붙은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이탈리아 제조사가 붙인 상품명입니다. 같은 학교의 칸딘스키가 이 의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에서 따온 마케팅이었습니다.
브로이어의 1928년 캔틸레버 의자는 더 복잡한 뒷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뒷다리 없이 앞으로 꺾인 강관만으로 몸무게를 받는 이 구조는 네덜란드 건축가 마르트 스탐이 1926년에 먼저 제시했고, 1930년대의 법정 다툼 끝에 캔틸레버 의자에 대한 권리는 스탐에게 돌아갔습니다. 디자인사에서 흔한 장면입니다. 새로운 형태는 대개 여러 사람의 손에서 거의 동시에 나오고, 이름은 한 사람에게만 붙습니다.
금속 공방에는 마리안네 브란트(Marianne Brandt)가 있었습니다. 1924년 그가 만든 차 우림기와 주전자는 반구와 원통과 원반으로만 구성된, 기하학 연습처럼 보이는 물건입니다. 2007년 경매에서 36만 달러에 팔린 이 주전자는 사실 대량생산된 적이 없습니다. 정작 브란트가 산업과 만나 성공한 것은 다른 쪽이었습니다. 힌 브레덴디크와 함께 조명회사 쾨르팅운트마티젠을 위해 설계한 칸뎀 침대 램프는 수십만 대가 팔렸습니다. 미술관이 기억하는 물건과 시장이 팔아 준 물건은 자주 다릅니다.
직조 공방에는 안니 알베르스(Anni Albers)가 있었습니다. 1930년 그가 졸업 작품으로 내놓은 벽 마감재는 한쪽 면이 소리를 흡수하고 다른 면이 빛을 반사하도록 짠 직물이었습니다. 노동조합 학교 강당의 실제 문제를 푼 재료였고, 그는 이 작업으로 학위를 받습니다. 1949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직조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니 알베르스는 직조를 하고 싶어서 직조 공방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학교의 그늘을 말해야 합니다. 1919년 선언문은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고 적었고, 첫 학기 등록생 중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다는 집계가 있습니다. 그러자 이듬해 마이스터 회의에서 그로피우스는 여성 지원자를 별도로 관리해 대체로 직조 공방으로 보내는 방침을 세웁니다. 여성은 이차원으로 사고한다는 식의 근거가 동원되었습니다. 금속이나 가구 공방에 진입한 여성은 브란트처럼 예외적이었고, 그마저 남학생들의 노골적인 홀대를 견뎌야 했습니다. 마이스터가 된 여성은 직조 공방을 이끈 군타 슈퇼츨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학교의 재정을 실제로 떠받친 것은 이 이류 취급을 받은 영역이었습니다. 직조 공방의 원단 라이선스, 그리고 무엇보다 1929년 라슈 형제와 함께 낸 바우하우스 벽지입니다. 무늬 없이 잔결만 있는 이 벽지는 수백만 롤 단위로 팔리며 학교의 최대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산되고 있습니다.
폐교가 만든 역설적 세계화
1933년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나치는 이 실험을 끝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교사와 졸업생이 흩어지면서 바우하우스는 독일의 지역적 사건에서 세계적 표준으로 바뀝니다.
그로피우스는 1937년 하버드 건축대학원으로 갔고 브로이어가 합류했습니다. 모호이너지는 같은 해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를 세웠고, 이 학교는 우여곡절 끝에 일리노이 공대의 디자인 연구소가 됩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1938년 시카고로 건너가 아머 공대의 건축과를 맡았고, 20년 뒤 뉴욕에 시그램 빌딩(1958)을 올립니다. 요제프와 안니 알베르스 부부는 1933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랙마운틴 칼리지로 갔습니다. 영어를 거의 못 하던 요제프 알베르스는 무엇을 가르치러 왔느냐는 질문에 눈을 열어 주러 왔다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서 널리 퍼진 오해 하나를 정리하겠습니다. 텔아비브의 화이트 시티는 1930년대에 지어진 4,000채 가까운 흰 건물 덕에 200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고, 흔히 "바우하우스 도시"로 불립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을 설계한 건축가 중 실제로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사람은 아리에 샤론 등 소수였습니다. 대다수는 브뤼셀, 겐트, 로마, 파리에서 배웠습니다. 화이트 시티가 증언하는 것은 바우하우스라는 학교의 확산이 아니라, 국제주의 양식이라는 공통 언어의 확산입니다. 이름은 나중에 붙었습니다.
전후 독일에서 계보를 가장 직접적으로 이은 곳은 울름 조형대학(1953~1968)입니다. 백장미단의 한스와 조피 숄의 동생인 잉게 숄과 오틀 아이허가 세웠고, 초대 학장은 바우하우스 졸업생 막스 빌이었습니다. 울름은 1955년부터 가전회사 브라운과 협업합니다. 한스 구겔로트와 디터 람스가 1956년에 내놓은 전축은 투명한 아크릴 뚜껑 때문에 백설공주의 관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람스가 정리한 좋은 디자인의 원칙과 그의 "적게, 그러나 더 좋게"는 이후 수십 년간 산업 디자인의 기준선이 되었고, 애플의 조너선 아이브는 브라운 제품에서 받은 영향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계보를 늘어놓으면 이렇게 됩니다. 데사우의 공방에서 울름의 강의실을 거쳐 브라운의 라디오로, 그리고 손안의 기기로.
미니멀리즘은 늘 옳은가 — 사물에 묻는 법
여기까지가 승리의 서사입니다. 이제 청구서를 볼 차례입니다.
첫째, 보편은 자주 지역을 지웁니다. 평지붕과 흰 벽은 지중해에서 합리적이지만 비와 눈이 많은 기후에서는 유지비가 많이 듭니다. 어느 땅에서나 통하는 형태라는 이상은, 실제로는 특정한 기후와 특정한 생활 방식을 나머지 세계에 수출하는 일이 되기 쉬웠습니다.
둘째, 도시 규모에서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의 대규모 공공주택 단지 프루이트아이고는 1950년대 중반 근대건축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가 1972년부터 폭파 철거됩니다. 비평가 찰스 젠크스는 이 장면을 근대건축의 사망 시각으로 지목했는데, 그가 분 단위까지 명시한 것은 수사였고, 실제 원인은 설계만이 아니라 인종 분리와 재정 구조와 관리 부재가 겹친 결과였다는 것이 이후 연구들의 결론입니다. 그래도 교훈은 남습니다. 깨끗한 도면이 곧 살 만한 삶은 아닙니다.
셋째, 값입니다. 군더더기를 덜어낸 형태는 저렴한 대량생산을 위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바우하우스 계보의 정품 의자는 대개 수백만 원대에 팔립니다. 단순함이 사치의 기호가 되는 역전은 바우하우스 시절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넷째, 취향의 독점입니다. 1966년 로버트 벤투리는 미스의 "적을수록 좋다"에 "적을수록 지루하다"로 답했습니다. 장식과 상징과 잡음은 낭비가 아니라 사람이 장소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균형 잡힌 결론은 이렇습니다. 미니멀리즘은 하나의 답이지 정답이 아니며, 그 답이 정답처럼 보이는 이유는 100년 동안 우리 눈이 그렇게 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안하는 실천은 좋은 디자인을 알아보는 법이 아니라, 형태의 이유를 역산하는 법입니다. 지금 손에 닿는 사물 하나를 고르십시오. 컵, 리모컨, 문손잡이, 지하철 손잡이, 아무거나 좋습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를 순서대로 묻습니다.
- 재료와 공정이 강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모서리는 왜 둥근가. 사출 성형은 직각을 싫어합니다. 형태의 절반은 만드는 방법이 이미 정해 놓습니다.
- 몸이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어디를 잡게 되어 있고, 어디를 잡으면 안 되는가. 뜨거운 부분, 미끄러운 부분, 손가락이 닿는 곳의 오목함을 찾아봅니다.
- 비용과 수량이 정한 것은 무엇인가. 부품이 몇 개인가, 나사가 보이는가 감춰져 있는가. 나사 하나를 감추는 데도 돈이 듭니다.
- 규칙과 유행이 얹은 것은 무엇인가. 안전 규격, 로고 자리, 그리고 순전히 그 시대에 그렇게 생겨야 했던 부분. 10년 전 제품 사진과 비교하면 이 층이 가장 잘 보입니다.
- 이 형태가 배제한 사람은 누구인가. 왼손잡이, 힘이 약한 손, 낮은 시력. 바우하우스가 놓친 것을 우리도 놓치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이 다섯 질문을 한 사물에 던지는 데는 2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한 번 해 보면 잘 바뀌지 않습니다. 사물이 취향의 결과가 아니라 제약들이 합의한 결과로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며 — 짧게 존재하고 길게 남는 법
바우하우스가 14년 만에 문을 닫고도 100년을 사는 이유는 좋은 의자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학교가 남긴 것은 물건이 아니라 질문의 형식이었습니다. 이 형태는 어디서 왔는가, 누가 만들 수 있는가, 몇 개나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옳은가.
그 질문들은 대답보다 오래갑니다. 흰 벽과 평지붕은 이미 한 시대의 양식으로 늙었지만, 인쇄술이 지식의 값을 무너뜨린 뒤 세계가 재편된 것처럼, 사물을 만드는 조건을 먼저 묻는 태도는 조건이 바뀔 때마다 새로 쓸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식탁 위의 물건 하나를 들고 다섯 번 물어보십시오. 그 사물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답하는 순간, 만든 사람의 회의실이 잠깐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