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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 창조자의 책임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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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열여덟 살이 지어낸 현대의 신화

1816년 여름, 스위스의 한 별장에서 몇몇 사람이 궂은 날씨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해는 훗날 '여름 없는 해'라 불리게 됩니다.

먼 곳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로 하늘이 뿌옇게 흐려졌고, 유럽의 여름은 서늘하고 음울했습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던 이들은 벽난로 앞에 모여 무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합니다.

그 자리에 열여덟 살의 한 젊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 셸리였습니다.

이 이야기 짓기 놀이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이었습니다.

한 과학자가 죽은 살들을 이어 붙여 생명을 만들어 내고, 그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버림받아 세상을 떠도는 이야기.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가 옛 전설이나 신화의 옷을 빌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셸리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과학, 곧 전기와 해부와 화학이라는 새로운 지식 위에 이 이야기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흔히 최초의 과학소설로 불립니다.

한 십 대 작가가 산업과 과학의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신화를 지어낸 셈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 소설을 여러 각도에서 찬찬히 살펴봅니다.

작가 메리 셸리와 1816년의 여름, 이 소설의 독특한 액자 구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오래된 오해, 창조의 윤리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 버림받은 피조물의 웅변과 그에 대한 연민, 낭만주의와 숭고의 미학, 왜 이 작품이 최초의 과학소설로 불리는지, 그리고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시대에 이 이야기가 던지는 물음까지 두루 다루겠습니다.

1. 메리 셸리와 1816년의 여름

메리 셸리는 1797년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당대의 이름난 사상가였습니다.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를 옹호한 선구적인 저술가였습니다.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은 급진적인 정치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메리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메리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셈입니다.

이 이른 상실은 그녀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어머니 없이 자란 이가, 훗날 어머니 없이 태어나는 피조물의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창작의 배경이 된 삶의 상실들

메리의 삶에는 이른 죽음이 거듭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사랑에 빠져 함께 유럽을 떠돌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를 잃는 아픔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몸으로 겪은 경험이, 죽은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야기의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빌라 디오다티의 괴담 대회

1816년 여름, 메리와 퍼시 셸리는 제네바 호숫가의 빌라 디오다티에 머물던 시인 바이런을 찾아갑니다.

궂은 날씨에 발이 묶인 이들은 독일 괴담집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러다 바이런이 제안합니다. 각자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지어내 보자고.

이것이 그 유명한 괴담 대회입니다.

다른 이들은 곧 흥미를 잃었지만, 메리는 며칠 동안 마땅한 이야기를 떠올리지 못해 애를 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 그녀는 반쯤 잠에 든 상태에서 생생한 환영을 보았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한 창백한 학생이 자신이 짜 맞춘 형상 곁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이 어떤 힘에 의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환영에서 프랑켄슈타인이 태어났습니다.

이 소설은 1818년,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처음 익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2. 액자 속의 액자 — 세 겹의 이야기

프랑켄슈타인의 구조는 생각보다 정교합니다.

이 소설은 하나의 목소리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겹겹이 포개진 액자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바깥에는 월턴이라는 탐험가가 있습니다.

그는 북극을 향해 항해하며 누이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들이 소설의 가장 바깥 테두리를 이룹니다.

어느 날 월턴은 얼음 위에서 죽어 가는 한 남자를 구합니다. 그가 바로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입니다.

빅토르는 월턴에게 자신의 기막힌 사연을 들려줍니다.

생명을 만들어 낸 일, 그로 인해 겪은 파멸, 그리고 자신이 만든 존재를 쫓아 이 극지까지 오게 된 사정을.

이것이 두 번째 층입니다.

그리고 빅토르의 이야기 한가운데에, 또 하나의 목소리가 끼어듭니다.

바로 피조물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버림받은 피조물이 홀로 세상을 배우고 언어를 익히며 겪은 일들을, 그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들려줍니다.

이 세 겹의 구조를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 월턴의 편지 — 북극 ]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빅토르를 만난다
    └─[ 빅토르의 이야기 ]
        생명을 만들고, 그로 인해 파멸한 과학자의 고백
          └─[ 피조물의 이야기 ]
              버림받은 존재가 스스로 들려주는 목소리

이 구조가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여러 시선에서 겹쳐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자의 눈으로, 또 피조물의 눈으로 같은 비극을 바라봅니다.

그 어느 쪽도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그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 겹침 속에서,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쉽게 답해지지 않게 됩니다.

3. '프랑켄슈타인'은 누구인가 — 오래된 오해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프랑켄슈타인'을 그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과학자의 이름입니다.

정확히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곧 창조자의 성입니다.

그렇다면 그 피조물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는 '피조물', '괴물', '악마', '그 존재' 같은 말로 불릴 뿐입니다.

창조자는 자신이 만든 존재에게 끝내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름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세상 안에 자리 잡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피조물은 태어난 순간부터 이름조차 얻지 못한 채 버려집니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세월이 흐르며 창조자에게서 피조물에게로 옮겨 간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창조자와 피조물, 만든 자와 만들어진 자의 경계가 그만큼 흐릿하다는 것을 대중의 무의식이 알아챈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이름의 혼동은 단순한 상식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소설의 핵심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과연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흉한 몰골로 태어난 피조물인가, 아니면 생명을 만들어 놓고 책임지지 않은 창조자인가.

4. 창조의 윤리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이 소설의 부제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준 존재입니다.

그 불로 인간은 문명을 이루었지만,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신들의 노여움을 사 끔찍한 벌을 받았습니다.

메리 셸리가 이 부제를 붙인 데는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또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 곧 생명을 창조하는 권능에 손을 뻗었습니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처럼, 그 대가로 끔찍한 파멸을 맞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물음이 나옵니다.

빅토르는 생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들어도 되는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할 수 있는가'에만 몰두했을 뿐, '해야 하는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이 소설이 200년 동안 되풀이해 던져 온 질문입니다.

창조보다 무거운 책임

빅토르의 진짜 잘못은 생명을 만든 것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큰 잘못은, 만들어 놓고 그것을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피조물이 눈을 뜬 순간, 빅토르는 그 흉한 모습에 공포를 느끼고 도망칩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존재를 돌보지도, 가르치지도, 책임지지도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그것과 함께 살아갈 의무를 지는 일입니다.

빅토르는 창조의 영광만을 좇았을 뿐, 그 뒤에 따라오는 무거운 책임은 외면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괴담을 넘어섭니다.

이것은 만드는 자의 책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5. 피조물의 목소리 —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소설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큰 이유는, 괴물에게 목소리를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속 괴물은 대개 말 못 하는 흉측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원작 속 피조물은 놀랍도록 말을 잘합니다.

그는 스스로 언어를 배우고, 책을 읽고, 자신의 처지를 논리 정연하게 이야기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하지 않았다

피조물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가 처음부터 악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나온 그는 오히려 순수했습니다.

그는 따뜻함을 원했고, 아름다움에 감동했으며,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를 바랐습니다.

한 가난한 가족을 몰래 지켜보며, 그는 남몰래 그들의 땔감을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거부가 괴물을 만든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흉한 겉모습만 보고 그를 밀어냅니다.

그가 다가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그를 때리고 쫓아냅니다.

그 어떤 선의도 그의 얼굴 앞에서 공포로 바뀝니다.

거듭된 거부 속에서, 그의 마음은 서서히 뒤틀립니다.

사랑을 구하던 존재가, 마침내 증오를 품게 됩니다.

여기서 이 소설은 깊은 물음을 던집니다.

괴물은 태어나는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 곧 타고난 것과 길러진 것에 관한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피조물은 흉한 몸으로 태어났을 뿐, 악한 마음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를 괴물로 만든 것은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를 향한 세상의 냉대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괴물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문득 서늘한 물음이 떠오릅니다. 과연 이 이야기에서 더 괴물다운 쪽은 누구인가.

6. 낭만주의와 숭고 — 알프스와 얼음의 풍경

프랑켄슈타인은 낭만주의 시대의 작품입니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을 휩쓴 예술과 사상의 흐름입니다.

그것은 이성과 질서보다 감정과 상상, 자연과 개인을 앞세웠습니다.

이 소설에는 낭만주의의 특징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숭고라는 감정

낭만주의 미학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가 '숭고'입니다.

숭고란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뜻합니다.

깎아지른 알프스의 봉우리, 끝없이 펼쳐진 빙하, 몰아치는 폭풍. 이런 풍경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프랑켄슈타인에는 이런 숭고한 자연 묘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빅토르가 절망 속에서 알프스의 산을 오르는 장면, 피조물과 마주치는 얼음의 벌판, 그리고 마지막 북극의 얼음 바다.

이런 풍경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물의 내면과 이야기의 정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자연과 과학의 대비

흥미롭게도, 이 소설에서 자연은 인간이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될 신성한 영역으로 그려집니다.

반면 빅토르의 과학은 그 신성한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오만으로 나타납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겸허해지는 낭만주의적 감수성과, 그 자연의 비밀을 정복하려는 과학의 야망.

이 둘의 긴장이 소설 전체를 관통합니다.

7. 왜 최초의 과학소설이라 불리는가

프랑켄슈타인은 흔히 세계 최초의 과학소설로 꼽힙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환상적인 이야기는 많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그것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마법이 아니라 과학

이 소설에서 생명은 마법이나 신의 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빅토르는 주문을 외우거나 신에게 빌지 않습니다.

그는 화학을 공부하고, 해부학을 익히고, 죽은 몸의 구조를 탐구합니다.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전기에 대한 관심도 이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생명은 인간의 지식과 실험으로 만들어집니다.

바로 이 점이 프랑켄슈타인을 과학소설로 만듭니다.

초자연이 아니라, 당대의 과학이 이야기의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과학이 던지는 질문을 다루다

과학소설의 참된 특징은 단지 과학 기술이 등장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과학이 인간과 사회에 던지는 물음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데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바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새로운 지식이 열어젖힌 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나아가도 좋은가.

이 물음이야말로 이후 수많은 과학소설이 되풀이해 온 주제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그 긴 계보의 출발점으로 여깁니다.

한 십 대 작가가, 자기 시대의 과학 위에서 이 새로운 이야기의 문을 열었습니다.

8. 오늘의 프랑켄슈타인 —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프랑켄슈타인이 200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소환되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 소설이 던진 물음이,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해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이 연결을 과장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정답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 볼 만한 하나의 유비입니다.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피조물

우리는 지금 스스로 배우고 판단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이 존재가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빅토르의 물음이 되살아납니다.

우리는 '만들 수 있는가'에는 열심이지만, '만들어도 되는가'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는 충분히 묻고 있는가.

피조물을 만들어 놓고 돌보지 않은 빅토르의 실수를, 우리는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가.

생명을 다루는 기술

생명공학의 발전도 이 소설을 새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이제 생명의 설계도 자체에 손을 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영역에 손을 댄다'는 오래된 표현이, 더는 비유로만 들리지 않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런 힘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를 일깨웁니다.

유비를 조심스럽게 다루기

물론 이런 연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살아 있는 피조물이 아니며, 오늘의 생명공학이 곧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프랑켄슈타인을 근거로 새로운 기술을 무작정 두려워하는 것은, 이 소설을 오해하는 일입니다.

이 소설의 핵심은 창조 그 자체를 죄악으로 몰아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든 것을 끝까지 책임지라는 데 있습니다.

셸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기술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창조자의 책임에 대한 물음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이 오래된 이야기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모든 시대에 여전히 유효합니다.

9. 영화 속 괴물 너머로 읽기

많은 사람이 프랑켄슈타인을 책이 아니라 영화로 먼저 만납니다.

흑백 영화 속의 그 유명한 이미지, 곧 목에 나사가 박히고 팔을 뻗은 채 걷는 초록빛 괴물 말입니다. 그러나 이 대중적 이미지는 원작과 사뭇 다릅니다.

원작을 영화 속 이미지 너머로 읽으려면, 몇 가지를 마음에 두면 좋습니다.

첫째, 괴물은 말 못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원작의 피조물은 유려하게 말하고,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슬픔을 조리 있게 풀어냅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핵심입니다.

둘째, 이 이야기의 무게 중심은 공포가 아니라 연민과 책임에 있습니다.

이것은 무섭게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누가 진짜 괴물인가를 물으며 읽어 보십시오.

흉한 몸으로 태어난 피조물인지, 그를 버린 창조자인지, 아니면 겉모습만으로 그를 내친 세상인지.

넷째, 이 소설이 열여덟 살 여성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머니를 잃고 자란 젊은 작가가, 어머니 없이 태어나 버림받는 존재의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은 이 작품을 한층 깊게 만듭니다.

이렇게 읽을 때, 프랑켄슈타인은 한낱 괴담이 아니라 인간과 창조에 관한 진지한 성찰로 다가옵니다.

마치며 — 우리가 만든 것 앞에서

프랑켄슈타인은 200년도 더 전에 쓰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물음은 조금도 낡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편안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애써 미뤄 두었던 질문들을 조용히 들이밉니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 때, 그것을 끝까지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를, 나는 겉모습만으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할 수 있다'는 것과 '해도 된다'는 것을, 나는 구별하고 있는가.

메리 셸리는 이 물음들에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다만 한 창조자와 그가 버린 피조물의 이야기를 우리 앞에 놓아둘 뿐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볼지는 온전히 읽는 이의 몫입니다.

한 십 대 작가가 여름 없는 해에 지어낸 이 현대의 신화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모든 시대를 향해 여전히 같은 물음을 건넵니다.

너는 네가 만든 것 앞에서, 무엇이 될 것인가.

생각할 거리

  1. 빅토르의 진짜 잘못은 생명을 만든 것인가, 아니면 만든 것을 버린 것인가. 창조와 책임 가운데 무엇이 더 무거운가.
  2. 피조물은 흉한 몸으로 태어났을 뿐 악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를 괴물로 만든 것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3.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창조자에게서 괴물에게로 옮겨 간 현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4.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시대에, 이 소설이 던지는 창조자의 책임이라는 물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