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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 스스로를 속이는 정신승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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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언제나 이기는 패배자

여기 한 사내가 있습니다.

이름도 성도 분명치 않고, 나이도 고향도 불확실합니다.

가진 땅 한 뼘 없이 남의 일을 해 주며 하루하루 먹고사는 날품팔이입니다.

마을 사람 누구에게나 무시당하고, 걸핏하면 얻어맞습니다.

그런데 이 사내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자기 머릿속에서는 그렇습니다.

건달들에게 두들겨 맞고 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아들뻘 되는 놈에게 맞은 셈이니, 사실은 내가 어른이고 저놈이 자식이다.

그러니 결국 이긴 것은 나다.

이렇게 그는 모든 굴욕을 마음속에서 승리로 바꿔치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루쉰이 그려 낸 아Q라는 인물이고, 그가 구사하는 기술의 이름은 정신승리법입니다.

아Q정전은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쉰이 1921년부터 이듬해까지 신문에 연재한 중편소설입니다.

발표된 지 백 년이 지났지만, 이 작고 우스꽝스러운 사내의 초상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서늘하게 찌릅니다.

웃다가 문득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루쉰이라는 인물과 20세기 초 중국의 격동을 짚습니다.

그다음 아Q라는 주인공과 그의 정신승리법을 들여다봅니다.

이어서 이 작품이 겨눈 국민성 비판과 그것이 불러온 논쟁, 1911년 신해혁명이라는 배경, 그리고 루쉰의 문학사적 위치를 살핍니다.

마지막으로 한 나라를 겨눈 날카로운 풍자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어떻게 읽어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아직 읽지 않은 분도 편안히 따라올 수 있습니다.


1. 루쉰과 세기 전환기의 중국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것이 태어난 시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아Q정전이 쓰인 1920년대 초의 중국은 오래된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것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혼돈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제국의 몰락

수천 년 이어져 온 중국의 황제 지배 체제는 20세기 초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청 왕조는 안으로는 부패와 무능에, 밖으로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아편전쟁 이래 이어진 굴욕적인 패배와 불평등 조약은 자부심 강했던 이 나라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1911년, 마침내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 왕조가 무너집니다.

이듬해 중화민국이 세워지고, 2천 년 넘게 이어진 제정이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혁명은 낡은 왕조를 무너뜨렸을 뿐, 사람들의 마음과 삶까지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군벌들이 각지에서 할거하며 나라는 다시 분열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바로 이 어정쩡한 시대의 공기 속에서 아Q라는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신문화운동과 백화문으로의 전환

이 무렵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나라를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고 절박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흐름이 이른바 신문화운동입니다.

이들은 낡은 유교 질서와 봉건적 관습을 비판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자고 외쳤습니다.

이 운동의 핵심 무기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중국의 공식 문어는 문언문이라 불리는 고전 한문이었습니다.

이 문어는 일상의 말과 크게 달라, 오랜 교육을 받은 소수만이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지식은 그렇게 소수의 특권으로 갇혀 있었습니다.

개혁가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말하는 방식에 가까운 글, 즉 백화문으로 글을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언어라야 새로운 사상이 대중에게 퍼질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루쉰은 바로 이 백화문으로 소설을 쓴 선구자였습니다.

의사에서 작가로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이며, 1881년에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나라를 구하려면 병든 몸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일본으로 의학을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그런데 유학 중 그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본 한 장의 환등기 사진이었습니다.

한 중국인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같은 중국인 구경꾼들이 무표정하게 둘러싸고 구경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루쉰은 여기서 깨달았다고 훗날 회고합니다.

정작 병든 것은 몸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이라는 것을.

아무리 몸이 튼튼해도 정신이 마비되어 있다면, 그저 무의미한 구경꾼이나 그 구경거리가 될 뿐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메스를 내려놓고 펜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정신을 흔들어 깨우는 문학으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이 선택에서 아Q정전을 비롯한 그의 문학이 탄생했습니다.


2. 아Q라는 주인공 — 이름조차 없는 사내

아Q정전의 주인공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영웅과는 정반대편에 있습니다.

루쉰은 소설 첫머리에서부터 짐짓 진지하게 이 점을 짚습니다.

이 사내는 성이 무엇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때 자신이 명문가 조씨와 같은 성이라고 자랑했다가, 조 나리에게 뺨을 얻어맞고 그럴 자격이 없다는 핀잔을 듣습니다.

이름도 정확히 전해지지 않아, 화자는 그저 소리를 따 아Q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여기서 이름의 마지막 글자 Q는 세 언어에서 모두 라틴 문자 Q 그대로 표기됩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도입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자입니다.

전기라는 형식은 본래 위대한 인물의 삶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루쉰은 그 거창한 형식을 빌려, 이름도 족보도 없는 최하층 인간의 이야기를 씁니다.

가장 낮은 자리의 사람

아Q는 웨이좡이라는 작은 마을에 얹혀사는 날품팔이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이라, 남의 논밭 일이며 방아 찧는 일을 해 주고 겨우 밥을 얻어먹습니다.

마을에서 그의 자리는 가장 낮은 밑바닥입니다.

건달들은 심심하면 그를 놀리고 때립니다.

그럴수록 아Q는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찾아 화풀이를 합니다.

힘센 자에게 밟히고, 약한 자를 밟는 이 서글픈 순환이 그의 세계입니다.

루쉰이 그리는 아Q는 결코 순수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그는 비겁하고, 허영에 차 있으며, 약자에게는 잔인합니다.

작가는 그를 미화하지도, 무작정 동정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 냉정한 거리 두기가 이 소설을 값싼 눈물에서 지켜 줍니다.


3. 정신승리법 — 굴욕을 승리로 바꾸는 기술

아Q정전이 남긴 가장 유명한 개념이 바로 정신승리법입니다.

이것은 현실에서 당한 패배와 굴욕을, 머릿속에서 상상의 승리로 뒤바꾸어 버리는 자기기만의 기술입니다.

지고도 이겼다고 믿는 마음

아Q는 싸움에서 거의 언제나 집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이 졌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건달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되뇝니다.

나는 자식뻘 되는 놈에게 맞은 셈이다.

요즘 세상이 참 말이 아니로구나, 자식이 아비를 때리다니.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그는 어느새 승자가 되어 만족스럽게 자리를 뜹니다.

또 어떤 때는 자기 뺨을 스스로 때립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이라 여기며 흡족해합니다.

때린 것은 자기 손이고 맞은 것은 남이라는 식으로, 자신을 두 사람으로 쪼개어 승리를 만들어 냅니다.

현실이 아무리 그를 짓밟아도, 그는 상상 속에서 늘 우위에 섭니다.

이것이 정신승리법의 핵심입니다.

자기기만이라는 안식처

정신승리법은 언뜻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서늘한 진실이 있습니다.

현실을 바꿀 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이 자기기만은 유일하게 남은 위안입니다.

패배를 승리로 고쳐 부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위안이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아Q는 정신승리에 취해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지 않습니다.

굴욕의 원인을 따지지도, 그것을 바꾸려 애쓰지도 않습니다.

그저 마음속에서 승리를 선언하고 만족한 채 잠들 뿐입니다.

루쉰이 겨눈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자기기만은 당장의 고통은 덜어 주지만, 사람을 그 자리에 영원히 묶어 둡니다.

현실을 바꾸는 대신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4. 국민성을 겨눈 풍자와 그 논쟁

루쉰이 아Q를 통해 그리려 한 것은 단지 한 불쌍한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Q라는 인물에 당대 중국 사회의 어떤 병든 정신을 담아내려 했습니다.

한 사람에서 한 나라로

정신승리법은 아Q 개인의 별난 버릇이 아닙니다.

루쉰은 그것을 당시 중국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은유로 삼았습니다.

열강에게 거듭 패하고도, 오래된 문화의 우월함을 되뇌며 스스로를 위로하던 태도.

현실의 굴욕을 직시하고 개혁에 나서는 대신, 정신적 자기만족에 안주하려던 경향.

루쉰은 그런 집단적 자기기만의 위험을 아Q라는 인물 하나에 압축해 담았습니다.

아Q는 그러므로 한 사람인 동시에 한 시대의 초상입니다.

작가는 사랑하는 조국을 향해 가장 아픈 거울을 들이댄 셈입니다.

너희가 웃고 있는 이 사내가, 실은 너희 자신의 모습이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비판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루쉰의 풍자는 조국을 조롱하거나 멸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중국을 깊이 사랑했기에, 그 병든 곳을 정직하게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환부를 도려내는 것은 환자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낫게 하려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루쉰의 신랄함 밑바닥에는 바로 그런 절박한 애정이 깔려 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아Q정전은 그저 냉소적인 조롱으로만 읽히기 쉽습니다.

뜨거운 논쟁

국민성을 겨눈 이 풍자는 발표 당시부터 지금까지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루쉰의 통찰에 깊이 공감하며 이를 각성의 계기로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불편해했습니다.

한 나라 사람들의 성격을 하나의 부정적 유형으로 단정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정신승리법이 정말 중국만의 특성인가, 아니면 힘없는 처지에 놓인 모든 인간의 보편적 반응인가.

이런 물음들이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정신승리법이라는 말은 훗날 중국어에서 하나의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자기 처지를 외면하고 억지 위안에 빠지는 태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한 편의 소설이 언어 자체를 바꾼 드문 사례입니다.


5. 신해혁명이라는 배경과 아Q의 최후

아Q정전의 후반부는 1911년 신해혁명이라는 실제 역사와 겹쳐집니다.

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웨이좡이라는 작은 마을에, 그리고 아Q라는 밑바닥 인간에게 어떻게 비쳤는지가 그려집니다.

혁명을 오해하는 사람

혁명의 소문이 마을에 이르자, 아Q는 묘한 흥분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혁명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혁명당이 되면 자신을 무시하던 자들 위에 설 수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할 뿐입니다.

그의 머릿속 혁명은 사상도 대의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갖고 싶던 물건을 빼앗고, 미워하던 자들에게 복수하는 상상일 뿐입니다.

여기서 루쉰의 풍자는 이중으로 겨눕니다.

혁명을 이토록 천박하게 오해하는 아Q를 겨누는 동시에, 정작 밑바닥 민중을 각성시키지 못한 혁명 자체의 한계도 겨눕니다.

마을의 유력자들은 재빨리 혁명당의 옷을 걸치고 여전히 권세를 누립니다.

세상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낡은 질서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아Q 같은 진짜 약자에게 혁명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어이없는 최후

여기서부터는 결말과 관련된 내용을 짧게 다룹니다.

아직 읽지 않았다면 이 대목은 건너뛰어도 좋습니다.

아Q의 마지막은 지극히 허망합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강도 사건의 누명을 쓰고 붙잡힙니다.

영문도 제대로 모른 채 재판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갑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그는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를 둘러싼 구경꾼들은 예전 루쉰이 환등기에서 본 그 무표정한 군중과 겹쳐집니다.

한 인간이 부당하게 스러지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심드렁한 구경거리로 바라볼 뿐입니다.

아Q의 죽음에는 영웅적 비장함도, 통쾌한 정의도 없습니다.

오직 서늘한 무의미와 씁쓸함만이 남습니다.

바로 그 무의미함이야말로 루쉰이 독자의 가슴에 새기려 한 것입니다.


6. 근대 중국문학의 아버지, 루쉰

아Q정전은 루쉰이라는 작가의 위상과 떼어 놓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흔히 근대 중국문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백화문 소설의 선구

루쉰은 앞서 발표한 광인일기로 백화문으로 쓴 최초의 근대 단편소설을 선보였습니다.

이어 아Q정전으로 그 성취를 한층 넓고 깊게 밀고 나갔습니다.

일상의 언어로 쓰인 이 소설들은, 문학이 소수 지식인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널리 읽힐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동시에 그 언어로도 인간 정신의 깊은 곳을 파고들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이 점에서 루쉰은 새로운 중국문학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문학을 넘어선 영향

루쉰의 영향은 문학의 울타리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그의 글은 세기 전환기 중국의 지식인과 청년들에게 깊은 자극을 주었습니다.

낡은 관습을 향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 약자를 향한 연민, 그리고 타협 없는 정직함은 하나의 정신적 유산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루쉰의 작품은 중국의 학교에서 널리 읽힙니다.

그의 문장과 표현 가운데 상당수는 일상어 속에 녹아들었습니다.

한 작가가 한 나라의 정신적 자화상을 이토록 오래 규정한 예는 흔치 않습니다.

물론 그의 유산이 시대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해석되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는 점은 함께 기억해 둘 만합니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후대의 다양한 읽기 속에 놓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7. 날카로운 칼날과 읽기의 논쟁

아Q정전은 결코 읽기 편한 소설이 아닙니다.

그 풍자의 칼날이 워낙 날카로워, 읽는 이를 웃기다가도 이내 불편하게 만듭니다.

웃음 뒤의 서늘함

아Q의 정신승리법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웃음이 납니다.

그의 억지 논리가 우스꽝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읽다 보면 웃음이 잦아듭니다.

문득 이런 물음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아Q와 다른가.

내가 아끼는 어떤 위안들도, 실은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정신승리는 아닐까.

이 지점에서 아Q는 더 이상 먼 나라의 우스운 사내가 아니게 됩니다.

그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어떤 회피의 초상이 됩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논쟁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두고는 오래도록 서로 다른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것을 특정 시대, 특정 사회의 병폐를 겨눈 역사적 풍자로 읽는 관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을 시대와 국경을 넘어선 인간 보편의 자기기만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관점입니다.

두 읽기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아Q정전의 힘은 오히려 이 두 층위를 동시에 품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한 시대의 구체적 초상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넘는 인간 심리의 우화이기도 한 것입니다.

좋은 고전은 이렇게 여러 겹의 읽기를 견뎌 냅니다.


8. 한 나라를 겨눈 풍자를 문화의 경계 너머에서 읽는 법

여기서 한 가지 조심스러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아Q정전은 특정 나라의 국민성을 겨눈 날카로운 풍자입니다.

이런 작품을 다른 문화권의 독자가 읽을 때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정신승리의 순환]

  현실의 굴욕을 당함
  머릿속에서 승리로 바꿔치기
  잠깐의 만족과 위안
  현실은 그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
        └────── 다시 굴욕으로 (순환 반복)

납작하게 만들지 않기

가장 흔한 오독은 아Q를 특정 민족 전체의 고정된 이미지로 굳혀 버리는 것입니다.

루쉰은 자기 조국을 향한 사랑과 절박함에서 이 거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풍자를 바깥에서 가져다가 특정 민족을 깎아내리는 도구로 쓴다면, 그것은 작가의 의도를 정반대로 뒤집는 일입니다.

내부자의 뼈아픈 자기비판과 외부자의 손쉬운 조롱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누가 어떤 마음으로 발화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정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거울을 자기 쪽으로 돌리기

그렇다면 다른 문화권의 독자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을까요.

가장 건강한 독법은 거울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 보는 것입니다.

정신승리법은 결코 한 나라만의 것이 아닙니다.

힘없는 처지에서 억지 위안으로 자신을 달래는 태도는 어느 사회, 어느 개인에게나 있습니다.

아Q의 초상 앞에서 우리가 던질 물음은 저들은 왜 저럴까가 아닙니다.

나와 우리는 어떤 정신승리에 기대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아Q정전은 특정 민족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인간 모두를 향한 겸허한 성찰의 거울이 됩니다.

맥락과 함께 읽기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그것이 태어난 역사적 맥락과 함께 읽을 때 가장 풍요롭습니다.

제국의 몰락, 반복된 패배, 신문화운동이라는 배경을 알고 나면, 루쉰의 신랄함이 어디서 나왔는지가 비로소 보입니다.

풍자를 맥락에서 떼어 내 문구만 인용하면 오해가 자라기 쉽습니다.

작품이 딛고 선 시대의 무게를 함께 느낄 때, 우리는 이 오래된 풍자를 납작하게 만들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치며 — 거울 앞에 선 우리

아Q정전은 한 우스운 사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웃음의 끝에서 우리는 웃음을 잃습니다.

거기 비친 것이 낯선 타인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자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루쉰은 우리에게 손쉬운 위로를 건네지 않습니다.

대신 아프도록 정직한 거울 하나를 들이댑니다.

너는 지금 어떤 굴욕을 승리로 고쳐 부르며 자신을 속이고 있는가.

그 자기기만은 너를 어디에 붙잡아 두고 있는가.

싸움에서 늘 지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이기던 한 사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각자의 마음속 거울로 이어집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 작은 소설은 조용히 일깨웁니다.

그것이 아Q정전을 여전히 살아 있는 고전으로 만드는 이유입니다.

생각할 거리

  1. 당신에게도 굴욕이나 실패를 마음속에서 다르게 고쳐 부르는 순간이 있나요. 그것은 위안일까요, 아니면 회피일까요.
  2. 정신승리법은 특정 나라만의 특성일까요, 아니면 힘없는 처지에 놓인 모든 인간의 보편적 반응일까요.
  3. 루쉰의 비판은 조국을 향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사랑과 비판은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요.
  4. 다른 문화권의 자기비판적 풍자를 읽을 때, 그것을 조롱의 도구로 만들지 않으려면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