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로마의 몸값 목록에 적힌 후추
408년, 서고트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하고 철수 조건을 제시합니다. 역사가 조시무스가 전하는 목록은 이렇습니다. 금 5000파운드, 은 3만 파운드, 비단 튜닉 4000벌, 붉게 물들인 가죽 3000장, 그리고 후추 3000파운드. 오늘날 단위로 1360킬로그램 남짓입니다.
금과 은 사이에 후추가 끼어 있는 이 목록은 한 시대의 가치 체계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후추는 향신료가 아니라 자산이었습니다. 영국 법률 용어에 지금도 남아 있는 후추 한 알 지대, 즉 계약을 성립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대가를 뜻하는 표현은 그 시절의 화석입니다. 후추 한 알이 명목상의 값으로 통할 만큼 값이 떨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뒤늦은 사건이었습니다.
지금 후추는 어느 마트에서나 몇천 원입니다. 이 가격 붕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따라가면,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는 현상의 설계도가 거의 그대로 나옵니다. 항로와 회사와 무력과 플랜테이션, 그리고 비용이 누구에게 청구되었는가 하는 문제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왜 그렇게 비쌌나 — 사슬의 길이, 그리고 상한 고기 신화
향신료가 비쌌던 첫 번째 이유는 단순합니다. 원산지가 지독하게 멀고 좁았습니다. 후추는 인도 남서부 말라바르 해안, 계피는 스리랑카, 정향은 몰루카 제도의 테르나테와 티도레 일대, 육두구는 세계에서 오직 반다 제도 몇 개 섬에서만 났습니다. 지구상 몇 평방킬로미터에서 나는 열매가 유라시아 전역의 수요를 감당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슬의 길이입니다. 말라바르에서 유럽까지 향신료는 여러 손을 거쳤습니다. 인도 상인이 아랍 상인에게 넘기고, 홍해나 페르시아만을 거쳐 맘루크 왕조의 이집트로 들어가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 갤리선에 실려 유럽에 도착합니다. 각 구간마다 통행세와 관세와 중개 마진이 붙었습니다. 맘루크 술탄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매긴 관세율은 시기에 따라 가치의 3분의 1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고, 베네치아는 유럽 쪽 병목을 사실상 독점하며 그 위에 다시 이윤을 얹었습니다. 먼 거리 자체가 비싼 것이 아니라, 그 거리 위에 세워진 관문의 개수가 비쌌습니다.
여기서 널리 퍼진 설명 하나를 정리해야 합니다. 중세 유럽인이 상한 고기의 냄새를 감추려고 향신료를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근거가 약합니다. 첫째, 산술이 맞지 않습니다. 후추는 무게당 고기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후추를 살 형편이면 신선한 고기를 살 형편도 됩니다. 둘째, 도시의 정육 거래는 길드 규약과 시 조례로 촘촘하게 규제되었고 상한 고기를 파는 행위는 처벌 대상이었습니다. 셋째, 부패를 막는 실제 방법은 따로 있었습니다. 소금 절임과 훈연과 건조였고, 이쪽이 훨씬 쌌습니다. 향신료사 연구의 표준 저작으로 꼽히는 폴 프리드먼(Paul Freedman)의 2008년 저작도 이 통설을 사료에서 확인할 수 없다고 정리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 가지가 겹칩니다. 하나는 과시입니다. 향신료를 아낌없이 쓴 요리는 그 자체로 재산 증명이었고, 연회에서 후추 통을 식탁에 올려 두는 것은 오늘날 값비싼 시계를 차는 것과 비슷한 신호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의학입니다. 갈레노스 이래의 체액설에서 향신료는 뜨겁고 건조한 성질로 분류되어 차고 습한 음식의 성질을 교정한다고 여겨졌습니다. 후추와 생강은 약이었습니다. 마지막은 신학적 상상력입니다. 향신료가 지상 낙원 근처에서 흘러나온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향은 이국의 냄새가 아니라 에덴의 냄새로 소비되었습니다.
1498년, 캘리컷 — 가격 구조가 바뀐 날
1497년 7월 8일, 배 네 척과 170명 남짓이 리스본을 떠납니다. 11월 하순 희망봉을 돌고, 동아프리카 말린디에서 인도양 계절풍을 아는 항해사를 얻어 아라비아해를 건넜습니다. 이 항해사가 유명한 이븐 마지드였다는 이야기가 오래 돌았지만 사료상 근거가 약해 지금은 대체로 부정됩니다. 1498년 5월 20일, 바스쿠 다 가마의 함대가 인도 남서부 캘리컷 앞바다에 닻을 내립니다.
첫 만남은 굴욕적이었습니다. 다 가마가 캘리컷의 통치자 자모린에게 바친 예물은 줄무늬 천 몇 필, 모자, 산호, 설탕, 꿀, 기름이었습니다. 궁정 관리들은 웃었습니다. 이 항구에는 훨씬 부유한 아랍 상인들이 드나들고 있었고, 포르투갈이 내민 물건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통하던 수준의 교역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은 이 시점에 아시아 무역망의 부유한 손님이 아니라 변두리의 신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1499년 리스본으로 돌아온 두 척의 배는 항해 비용을 크게 웃도는 화물을 싣고 있었습니다. 흔히 인용되는 60배라는 수익률은 출처가 불분명한 숫자이니 액수보다 구조를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핵심은 사슬 전체를 건너뛰었다는 데 있습니다. 홍해와 이집트와 베네치아를 거치며 붙던 통행세와 중개 마진이 한꺼번에 사라졌습니다. 승무원의 절반 이상이 괴혈병으로 죽었지만 회계상으로는 남는 장사였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의 행보는 상업이 아니라 통제였습니다. 1500년 카브랄, 1502년 다 가마의 두 번째 항해, 1509년 디우 해전, 1510년 알부케르크의 고아 점령, 1511년 말라카, 1515년 호르무즈로 이어집니다. 요새를 항로의 길목에 박고, 카르타즈라는 통행증을 발급해 이것이 없는 배를 나포했습니다. 인도양은 오랫동안 어느 세력도 배타적으로 지배하지 않던 열린 바다였는데, 유럽 국가가 바다에 세관을 세운 것입니다.
다만 흔히 그려지는 것처럼 지중해 향신료 무역이 곧바로 죽지는 않았습니다. 프레더릭 레인과 닐스 스텐스고르 같은 연구자들이 보여 준 대로, 16세기 중반이 되면 홍해와 레반트를 거치는 옛 경로가 상당히 회복되고 베네치아의 향신료 거래도 되살아납니다. 포르투갈은 항로를 열었을 뿐 독점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인력도 자본도 그만한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다음 세기 다른 조직이 맡습니다.
1602년, VOC — 주식회사라는 발명과 폭력의 기업화
1602년 3월 20일, 네덜란드 연방의회는 서로 경쟁하던 여러 무역 회사를 하나로 묶어 연합동인도회사, 즉 VOC를 설립합니다. 희망봉 동쪽에서 마젤란 해협 서쪽까지의 무역을 21년간 독점하는 특허가 함께 주어졌습니다. 자본금은 640만 길더가 넘었고, 1800명 안팎이 출자했습니다. 하녀와 목수도 명부에 있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설계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전까지 원거리 무역 회사는 항해 한 번마다 자본을 모으고, 배가 돌아오면 화물을 팔아 청산하고 해산했습니다. VOC는 자본을 청산하지 않고 계속 굴렸고, 대신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게 했습니다. 투자자가 돈을 회수하는 방법이 회사를 해체하는 것에서 지분을 파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 순간 유통시장이 필요해졌습니다. 암스테르담에 상설 거래소가 자리 잡고, 1609년에는 이사크 르메르가 이끄는 집단이 주가 하락에 베팅한 사건이 벌어져 이듬해 공매도 규제가 나옵니다. 1688년 요셉 데 라 베가가 남긴 거래소 풍경 기록에는 옵션과 선물과 군중 심리가 이미 다 나옵니다. 현대 자본시장의 문법이 향신료 회사의 회계 문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특허장에는 다른 조항도 있었습니다. VOC는 조약을 맺고, 전쟁을 하고, 요새를 쌓고, 화폐를 주조하고, 총독을 임명하고, 사람을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권한을 위임받은 회사였습니다. 이 조합이 무엇을 낳는지는 곧 드러납니다.
1621년, 총독 얀 피터르스존 쿤이 함대를 이끌고 반다 제도로 갑니다. 육두구가 세계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던 시절이었고, 반다 사람들은 여러 상대와 거래하며 독점 계약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쿤은 정복을 실행했습니다. 유력자 44명이 참수되었고, 주민들은 죽거나 굶어 죽거나 노예로 팔려 가거나 산으로 쫓겼습니다. 정복 전 1만 5000명 안팎으로 추정되는 인구는 1000명 남짓만 남았다는 것이 널리 인용되는 수치입니다. 비워진 섬은 페르켄이라는 농장 단위로 쪼개져 회사 관계자에게 분배되었고, 노동은 다른 지역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맡았습니다. 회사는 이후 지정 구역 밖의 정향과 육두구 나무를 조직적으로 베어 없애는 원정을 정례화합니다. 공급을 물리적으로 삭제해 가격을 유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향신료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생략되는 부분입니다.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라는 근대적 발명은, 같은 문서에 서명된 교전권과 함께 세상에 나왔습니다.
1667년, 브레다 — 룬 섬과 맨해튼
반다 제도의 서쪽 끝에 룬이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길이 3킬로미터 남짓입니다. 1616년 영국인 너새니얼 코트호프가 이 섬에서 4년 가까이 네덜란드의 봉쇄를 버티다 목숨을 잃었고, 영국은 이후로도 룬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1667년 7월 31일, 제2차 영란전쟁을 끝내는 브레다 조약이 체결됩니다. 원칙은 현상 유지였습니다. 강화 시점에 각자 점유한 것을 그대로 갖기로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그해 2월에 빼앗은 수리남과 룬을 갖고, 영국은 1664년에 점령한 뉴네덜란드, 즉 뉴암스테르담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요약이 나옵니다. 네덜란드가 육두구 섬을 지키려고 맨해튼을 넘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몇 가지를 보태야 정확해집니다. 첫째, 두 섬을 맞바꾼 단일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조약은 이미 점유한 상태를 추인했을 뿐이고, 협상 직전 네덜란드 함대가 템스강 하구를 급습해 영국 군함을 불태운 메드웨이 기습 덕분에 네덜란드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둘째, 네덜란드가 얻은 것 중 당대 기준으로 더 값진 쪽은 룬이 아니라 설탕을 생산하던 수리남이었습니다. 셋째, 룬은 이미 네덜란드가 실효 지배 중이었고 육두구 나무도 파괴된 뒤였습니다. 넷째, 당시 뉴암스테르담은 인구 1500명 규모의 적자 정착지였습니다. 어리석은 거래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300년 뒤의 맨해튼 지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 1667년의 장부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맨해튼에 붙은 다른 통설도 함께 정리해 둘 만합니다. 1626년 페터르 미나위트가 24달러어치 장신구로 맨해튼을 샀다는 이야기입니다. 근거가 되는 문서는 그해 스하헨이 본국에 보낸 편지 한 통이고, 거기에는 60길더 상당의 물품이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24달러라는 숫자는 19세기 미국 역사가가 당시 환율로 환산한 값이며, 300년의 물가를 무시한 수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계약의 성격입니다. 토지의 영구적 배타적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레나페 사람들의 법 관념에 없었으므로, 양측이 같은 계약에 서명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독점이 무너지는 방식 — 가격의 붕괴와 입맛의 변화
독점은 두 방향에서 무너졌습니다. 하나는 식물입니다. 향신료 나무는 특허를 낼 수 없습니다. 1770년과 1772년, 프랑스령 일드프랑스, 지금의 모리셔스를 관리하던 피에르 푸아브르가 몰루카에서 육두구와 정향 묘목을 빼내 오는 데 성공합니다. 이 묘목은 곧 레위니옹과 세이셸을 거쳐 여러 대륙으로 퍼졌습니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정향의 주산지는 몰루카가 아니라 아프리카 동해안의 잔지바르였고, 육두구는 1843년 이식된 카리브해의 그레나다가 세계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레나다 국기에 육두구가 그려져 있는 이유입니다.
다른 하나는 회사 자신입니다. VOC는 밀무역과 부패, 지나치게 비대해진 관료 조직, 그리고 아시아 내부 무역에서 발생한 손실로 18세기 후반 급속히 부실해집니다. 1799년 12월 31일 회사는 1억 3400만 길더 규모의 부채를 남기고 소멸하며, 자산과 식민지는 국가가 승계합니다. 200년 가까이 육두구 한 알의 가격을 지키기 위해 섬 하나를 비웠던 조직의 결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붕괴는 수요 쪽에서 일어났습니다. 향신료가 흔해지자 유럽 상류층이 향신료를 버린 것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요리는 1651년 라 바렌의 요리서를 기점으로 후추와 계피를 잔뜩 쏟아붓는 중세식 조리에서 벗어나, 버터와 육수와 신선한 허브로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는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프리드먼의 지적대로 향신료의 매력이 상당 부분 희소성에서 왔다면, 값이 떨어진 순간 그 매력도 함께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후추는 부자의 신호이기를 그만두고 나서야 모두의 양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시의 자리는 곧 다른 상품이 채웁니다. 설탕과 커피와 차와 담배와 카카오입니다. 이들은 향신료와 달리 대규모 재배가 가능했고, 그래서 필요한 것은 항로 통제가 아니라 땅과 강제 노동이었습니다.
| 시기 | 통제의 주체 | 이윤의 원천 | 폭력의 형태 | 무너진 이유 |
|---|---|---|---|---|
| 1498년 이전 | 여러 중개상과 도시국가 | 긴 사슬의 통행세와 중개 마진 | 산발적 약탈과 관세 | 사슬을 건너뛰는 항로의 등장 |
| 1500년대 | 포르투갈 왕실의 에스타두 다 인디아 | 항로 장악과 통행증 발급 | 요새와 함대의 나포 | 인력과 자본 부족, 옛 항로의 부활 |
| 1602년부터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 산지 독점과 생산량 통제 | 회사가 수행한 정복과 학살 | 묘목 반출, 부채와 부패 |
| 19세기 | 제국의 플랜테이션 체제 | 값싼 토지와 강제 노동 | 노예제와 계약 노동, 토지 수탈 | 공급 확대에 따른 장기 가격 하락 |
| 오늘 | 브랜드와 유통과 물류 | 가공과 유통 단계의 부가가치 | 계약 조건과 가격 결정력 | 진행 중 |
오늘로 이어지는 선 — 공급망, 플랜테이션, 기호품
향신료의 지도는 다시 그려졌습니다. 오늘 세계 후추 수출의 최대 국가는 인도도 인도네시아도 아닌 베트남입니다. 2000년대 초부터 1위를 지키고 있고, 세계 물량의 40퍼센트 안팎을 담당합니다. 육두구는 인도네시아와 그레나다가 나눠 갖고, 바닐라는 마다가스카르에 극단적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2017년 사이클론이 마다가스카르 북동부를 훑고 지나간 뒤 바닐라 가격이 킬로그램당 수백 달러대로 치솟았고, 농가가 밤새 밭을 지키고 덜 익은 꼬투리를 미리 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400년 전 반다에서 벌어진 일과 원인은 다르지만, 한 지역에 산지가 몰려 있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에 대한 답은 같습니다.
가치가 어디서 남는지도 그대로입니다. 세계 카카오의 60퍼센트 남짓이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에서 나오지만, 초콜릿 한 개의 소매가에서 재배 농가가 가져가는 몫은 한 자릿수 퍼센트에 머문다는 추정이 꾸준히 보고됩니다. 2020년 미국 시카고대 연구기관이 발표한 조사에서는 두 나라의 카카오 산지에서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는 아동이 15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커피도 구조가 비슷합니다. 원료를 기르는 쪽이 가격 변동의 위험을 대부분 떠안고, 가공과 브랜드와 유통 쪽이 안정적인 마진을 가져가는 배치는 후추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병목의 정치도 남아 있습니다. 2021년 3월 초대형 컨테이너선 한 척이 수에즈 운하를 엿새 동안 막았을 때, 세계 교역량의 10퍼센트 남짓이 지나는 통로 하나가 멈추자 유럽의 공장 라인과 아시아의 선적 일정이 동시에 흔들렸습니다. 말라카 해협에는 세계 교역 물량의 4분의 1가량이 지나갑니다. 홍해 항로의 불안이 운임과 물가에 곧바로 반영되는 장면도 최근 몇 해 동안 반복해서 봤습니다. 알부케르크가 호르무즈와 말라카를 먼저 노린 이유를 지금의 해운 지도가 그대로 설명해 줍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회사와 주권의 관계입니다. VOC처럼 노골적으로 교전권을 가진 기업은 사라졌지만, 국가와 기업의 경계에 걸친 장치들은 여전히 작동합니다. 투자자가 국가를 상대로 중재를 제기하는 제도, 특정 자원의 채굴권을 둘러싼 장기 계약, 자원 산지에 세워지는 기업 도시 같은 것들입니다. 형태가 부드러워졌을 뿐 질문은 같습니다. 누가 규칙을 정하고, 누가 그 규칙 아래 살게 되는가.
마치며 — 세계화는 오래된 기계다
세계화가 최근의 일이라는 감각은 착시입니다. 1세기 로마의 식탁에 인도산 후추가 올랐고, 16세기 아메리카의 은이 태평양을 건너 중국으로 흘렀으며,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상인은 지구 반대편 섬의 작황에 따라 지분 가격이 오르내리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우리가 새 시대의 특징이라고 부르는 것들, 즉 원거리 공급망과 다국적 조직과 병목 하나에 흔들리는 가격은 최소 500년 된 기계의 작동음입니다.
달라진 것은 속도와 규모이지 구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역사에서 가져올 것은 세계화가 좋다 나쁘다는 판정이 아니라 회계 습관에 가깝습니다. 어떤 물건이 놀랍도록 싸다면, 그 가격이 기술 덕분인지 아니면 비용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결과인지를 묻는 습관 말입니다. 향신료 무역의 500년이 남긴 교훈은 한 문장으로 줄어듭니다. 비용은 사라지지 않고 옮겨 다니며, 청구서는 언제나 가장 멀리 있는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오늘 아침 갈아 넣은 후추 한 줌은 그 청구서가 마침내 아주 얇아진 상태이고, 그렇게 되기까지 몇 개의 섬이 비워졌는지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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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년, 서고트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하고 철수 조건을 제시합니다. 역사가 조시무스가 전하는 목록은 이렇습니다. 금 5000파운드, 은 3만 파운드, 비단 튜닉 4000벌, 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