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모여드는 골목
마을 어귀에서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가면, 오래된 돌담을 따라 좁은 골목이 하나 나왔다. 그 골목 끝에 작은 시계방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시간 고치는 집이라 불렀다.
골목은 낮에도 어둑했다. 양옆으로 늘어선 돌담은 이끼에 덮여 푸르스름했고, 발밑의 둥근 돌들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걸음에 닳아 반들거렸다.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처마 끝에서는 마른 풀잎 하나가 바람도 없이 흔들렸다.
그 골목에 들어서면 누구나 한 가지를 가장 먼저 느꼈다. 소리였다. 아직 시계방 문을 열기도 전인데, 골목 가득 똑딱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새어 나왔다. 마치 골목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심장처럼, 어딘가에서 천천히 박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낡은 나무 문 위에는 둥근 괘종시계 모양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에서 똑딱이는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벽에도, 선반에도, 천장에도 온갖 시계가 가득했다. 손바닥만 한 회중시계부터 사람 키만 한 괘종시계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시계들이 저마다의 박자로 시간을 새기고 있었다.
어떤 시계는 빠르게, 어떤 시계는 느리게 똑딱였다. 그 무수한 박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묘하게도 어긋나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합창처럼 들렸다. 유리병 안에 담긴 작은 시계들도 있었다. 호롱불 같은 유리병 속에서, 작은 톱니바퀴들이 천천히 돌아가며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시계방의 주인은 노안의 시계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도 있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 시계공은 단지 시계를 고치는 게 아니라, 시간 그 자체를 고친다고.
그날, 한 여인이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름은 하린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멈춰 버린 낡은 손목시계가 들려 있었다.
멈춘 시계
"이 시계를 고쳐 주실 수 있나요." 하린이 시계공에게 시계를 내밀며 물었다.
시계공은 두꺼운 돋보기를 눈에 대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살피더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시계는, 오래전에 멈췄군요." 그가 말했다. "태엽이 끊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멈춰 둔 것 같습니다."
하린의 얼굴이 굳었다. "맞아요. 이건 제 어머니의 시계예요."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골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그 시각에 멈춰 있어요. 저는 그날 이후로 이 시계를 한 번도 감지 않았어요."
시계공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랜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시계라는 건 말이지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주인을 닮습니다. 오래 차고 다니면, 시계는 그 사람의 버릇과 마음까지 새기지요. 이 시계는, 슬픔을 새긴 채로 멈춰 있습니다."
그러고는 뜻밖의 말을 했다.
"고칠 수는 있습니다. 다만, 보통 시계와는 좀 다른 시계방이라서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시계를 다시 가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이 시계가 멈춘 그 시각으로, 돌아가고 싶으신 겁니까."
하린은 숨을 멈췄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입니다." 시계공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 시계방에서는, 후회로 멈춘 시간을 잠시 되돌릴 수 있습니다. 단 한 번,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만요."
어느 손님의 시계
하린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시계공은 선반 한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탁상시계 하나가 다른 시계들과 조금 떨어진 채 따로 놓여 있었다.
"이 시계는." 그가 시계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오래전, 한 어부가 맡기고 간 것입니다."
시계의 유리에는 가느다란 금이 하나 가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초침은 멀쩡하게,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 어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요." 시계공이 이야기를 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투었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모진 말을 내뱉었지요. 그리고 아들은 그날 밤 먼바다로 떠났습니다. 돌아오지 못했고요."
하린은 가만히 그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부는 이 시계를 가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날 밤으로 돌아가, 모진 말을 거두고 싶다고요. 저는 그를 그 밤으로 보내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말을 바꾸셨나요." 하린이 물었다.
"아니요." 시계공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요. 다만 그는 그 밤으로 돌아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이 문을 나서기 전, 잠시 멈춰 서서 아버지의 외투를 슬며시 문고리에 걸어 두는 모습을요. 추운 바다에 나가는 아버지가 감기라도 들까, 그 와중에도 그것을 걱정한 것이지요."
시계공은 시계를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어부는 돌아와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지요. 우리는 서로에게 모진 말을 했지만, 그 밑에 흐르던 것은 줄곧 사랑이었다고요. 그날 이후, 그는 더 이상 그 밤에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계의 금은." 하린이 작게 말했다. "사라지지 않았네요."
"그렇습니다." 시계공이 미소 지었다. "금은 그대로지요. 깨진 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그 금을 사이에 두고도, 시계는 다시 똑딱이며 잘 갑니다. 후회를 고친다는 건, 흉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흉터를 안고도 다시 걷는 일입니다."
시계공의 제안
하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계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계방 안의 무수한 시계들이 일제히 똑딱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그 말이 사실일 것만 같았다.
"되돌릴 수 있다면." 하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는 두 손으로 시계를 꼭 감싸 쥐었다.
"저는 그날, 어머니 곁에 없었어요. 일이 바빠서, 다음에 가면 된다고 미뤘죠. 그런데 그날 밤에, 어머니가 떠나셨어요. 저는 마지막 인사도 못 했어요. 그게 십 년째 저를 괴롭혀요."
"십 년이라." 시계공이 나직이 되뇌었다. "참으로 긴 시간입니다. 멈춰 있기에는요."
하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매일 밤 같은 꿈을 꿔요. 어머니의 방문 앞까지 갔다가,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서는 꿈이에요. 손잡이에 손을 얹으면, 거기서 늘 잠이 깨요. 십 년 동안, 저는 한 번도 그 문을 열지 못했어요."
시계공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그 시간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미리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당신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저 그 순간을, 다시 한번 살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마치 흘러간 강물을 다시 바라보는 것처럼요. 강물에 손을 담글 수는 있어도, 흐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바꿀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요." 하린이 물었다.
시계공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건, 직접 다녀오신 뒤에 답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부엌
시계공이 가장 큰 괘종시계 앞으로 안내하기 전, 하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머니를 떠올리려 하면,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엌이었다.
이른 아침, 부엌에서는 늘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작은 솥에 흰쌀을 안치고, 그 위로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곤 했다. 도마에 칼이 닿는 소리, 보글거리며 끓는 국 냄새,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던 아침 햇살.
어린 하린은 식탁 모서리에 턱을 괴고 앉아,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등은 넓고 단단해 보였다. 어머니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 그 작은 부엌 전체가 함께 흔들리는 것 같았다.
"하린아, 손 씻고 와." 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하린이 몰래 부엌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어느 겨울이었다. 하린이 감기로 며칠을 앓았다. 그날 밤, 어머니는 잠든 하린의 머리맡에 앉아, 차가운 손수건을 이마에 올려 주었다. 하린은 잠결에 어머니의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것을 느꼈다. 그 손길은 거칠었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다정했다.
그것이 하린이 기억하는 사랑의 모양이었다. 거창한 말이 아니라, 새벽의 김, 따뜻한 손수건, 뒤돌아보지 않고도 알아채는 마음.
하린은 눈을 떴다. 그 모든 기억이, 십 년 동안 멈춰 있던 시계 속에 함께 잠겨 있었다.
"준비되셨습니까." 시계공이 물었다.
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되돌아간 시간
시계공은 가장 큰 괘종시계 앞으로 하린을 데려갔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검은 나무로 된 오래된 시계였다.
시계의 진자는 천천히, 무겁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은 어딘가 사람의 호흡을 닮아 있었다. 시계공은 시계 뒷면의 작은 문을 열고, 그 안의 태엽을 거꾸로 감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소리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똑딱이는 소리가 거꾸로, 시계방의 빛이 일렁이고, 하린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방 안의 다른 시계들도 하나둘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초침들이 거꾸로 미끄러지고, 유리병 속의 톱니바퀴들이 반대로 돌았다. 골목의 소리도, 빛도, 공기도 모두 뒤로 흘러갔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시계방에 있지 않았다.
익숙한 방이었다. 어머니의 방. 창밖으로는 십 년 전의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공기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약 냄새와, 어머니가 늘 쓰던 동백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머리맡 작은 탁자 위에는, 반쯤 비운 물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어머니." 하린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불렀다.
어머니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은 하린을 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시계공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이 순간을 바꿀 수 없었다. 그저 다시 한번 살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하린은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어머니의 손을 그대로 통과했다. 마치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그녀는 이곳에서 한낱 구경꾼이었다.
그런데 그때, 하린은 십 년 전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보지 못했던 것
방 안에는, 어머니 혼자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침대 곁, 작은 탁자 위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봉투 위에는 어머니의 글씨로 하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십 년 전, 하린은 그 편지를 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녀는 슬픔에 잠겨 어머니의 방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한 채 떠나 버렸다. 그래서 그 편지는, 다른 짐들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하린은 떨리는 손으로 그 편지를 집어 들었다. 신기하게도, 편지만은 그녀의 손에 잡혔다. 마치 어머니가 오직 이것만은 딸에게 닿게 하려고 남겨 둔 것처럼.
봉투는 오래된 종이 특유의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봉투를 열자, 어머니의 단정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하린에게.
네가 바빠서 오지 못한다고 들었을 때, 처음엔 조금 서운했단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어. 우리 딸이 자기 삶을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고. 그게 얼마나 대견한 일이니.
엄마는 네가 와 주지 않아서 슬픈 게 아니라, 네가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기쁘단다. 네가 처음 걸음마를 떼던 날, 네가 처음으로 내 손을 놓고 혼자 걸어가던 그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엄마의 일은, 너를 붙잡는 게 아니라, 네가 멀리 걸어갈 수 있도록 손을 놓아 주는 것이었단다.
혹시 나중에 네가 그날 오지 못한 걸 마음에 두고 있을까 봐, 이 편지를 남겨 둔다. 미안해하지 마라. 너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
너는 그 자체로 내 가장 큰 기쁨이었단다. 부디 너무 오래 슬퍼하지 말고, 다시 웃으렴. 네가 웃으면, 어디에 있든 나도 함께 웃을 테니까.
하린은 편지를 가슴에 안고 흐느꼈다. 십 년 동안 그녀를 짓눌러 온 무게가, 그 글자들 속에서 천천히 풀려 가는 것 같았다.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린 것은 책망이 아니라, 용서였다는 것을.
침대 위의 어머니가, 아주 잠깐,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것 같았다. 그것이 진짜였는지, 하린의 바람이 만든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시계방으로
다시 눈을 떴을 때, 하린은 시계방에 돌아와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편지는 십 년 전 그 방에, 그 자리에 남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글자들은,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었다.
시계공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오셨군요." 그가 말했다.
하린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편지를 봤어요. 십 년 동안, 그게 거기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잠겼다.
"어머니는, 저를 원망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제가 행복하길 바라셨어요. 저는 십 년 동안, 있지도 않은 원망을 혼자 만들어 내고, 그 앞에서 떨고 있었던 거예요."
"시간은 바꿀 수 없습니다." 시계공이 말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이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마음일 때가 있지요."
하린은 그제야 시계공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십 년 동안, 그날을 바꾸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날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제가 그날 어머니 곁에 갔더라도." 하린이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는 똑같이 저를 사랑하셨을 거예요. 가지 못한 것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후회한 건, 저뿐이었어요."
"후회란 그런 것입니다." 시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는, 사랑이 갈 곳을 잃었을 때 생기는 것이지요. 당신이 그토록 오래 후회했다는 건, 그만큼 깊이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하린은 그 말에, 오래 참아 온 무언가가 마침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멈춘 시계가 다시 흐르다
하린은 어머니의 손목시계를 시계공에게 내밀었다. "이제, 이 시계를 다시 가게 해 주세요."
시계공은 미소를 지으며 시계를 받아 들었다. 그는 작은 도구로 시계의 뒷면을 열고, 끊어진 듯 보였던 태엽을 조심스럽게 다시 이었다.
"보십시오." 그가 나직이 말했다. "태엽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너무 단단히 멈춰 있었을 뿐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처럼요."
그러고는 천천히 시계를 감기 시작했다.
째깍.
오랫동안 멈춰 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초침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한 칸씩 나아갔다.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 시계는 다시 시간을 새기고 있었다.
그 소리는 작았지만, 시계방을 가득 채운 무수한 시계들 사이에서도 또렷이 들렸다. 마치 오래 침묵하던 누군가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연 것처럼.
"이제 이 시계는." 시계공이 시계를 돌려주며 말했다. "어머니가 떠나신 시각이 아니라, 당신이 어머니를 다시 만난 이 시각부터 흐를 겁니다. 슬픔의 시계가 아니라, 사랑의 시계로요."
하린은 시계를 손목에 찼다. 똑딱이는 작은 소리가, 마치 어머니의 심장 소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손목에 닿는 시계의 무게가 따뜻했다. 그것은 더 이상 멈춘 시간의 무게가 아니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의 무게였다.
골목을 나서며
하린은 시계공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값을, 어떻게 치러 드려야 할까요."
시계공은 손을 저었다. "값은 필요 없습니다. 이 시계방의 일은, 그저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것뿐이니까요. 당신이 다시 웃을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린은 마지막으로 시계방을 둘러보았다. 벽과 선반과 천장을 가득 메운 시계들이, 저마다의 박자로 똑딱이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생각했다. 저 수많은 시계들 하나하나가, 어쩌면 누군가의 멈췄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저 시계들은, 다." 그녀가 물었다.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것인가요."
시계공은 그저 빙긋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린은 시계방을 나섰다. 골목에는 어느새 저녁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돌담은 붉은빛을 머금어 따뜻해 보였고, 그녀의 그림자가 골목 위로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손목의 시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침은 여전히 똑딱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골목 끝에 있던 시계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오래된 돌담만이 조용히 서 있었다.
가득하던 똑딱임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골목은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무언가를 다 마친 뒤의 평온한 고요였다.
하린은 빙긋 웃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시계방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사랑은, 십 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
그녀는 손목의 시계 소리를 들으며, 노을 진 골목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녀 안에서 멈췄던 시간이, 이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오랜만에 어머니가 끓여 주던 국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에는, 그 국을 한번 끓여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손맛을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 따뜻함만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에 관한 것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바꿀 수 없다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 무언가를 바로잡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그 과거를 바라보는 지금의 마음일 때가 많습니다.
후회는 우리를 과거에 묶어 두는 멈춘 시계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시계를 다시 흐르게 하는 열쇠는,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랑과 용서를 발견하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야기 속 시계공은 흉터를 지워 주지 않습니다. 깨진 유리의 금은 그대로 남고,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그 흉터를 안고도 다시 걸을 수 있도록, 멈춘 시계를 다시 똑딱이게 해 줄 뿐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위로란, 아픔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함께 살아갈 힘을 건네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도 멈춰 있는 시계가 있다면, 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을 한 번쯤 다정하게 들여다보시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곳에, 당신이 미처 보지 못한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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