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끝의 가게
비가 오는 날이면 도시의 뒷골목은 한층 깊어졌다. 젖은 벽돌은 검게 변했고, 가로등 불빛은 물웅덩이 위에서 흔들렸다. 그 골목의 가장 안쪽, 다른 어떤 간판도 더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작은 가게 하나가 있었다.
빗물은 처마를 타고 가느다란 실처럼 흘러내렸다. 골목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인 듯했고, 오직 빗소리만이 좁은 벽과 벽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은 이 안쪽까지 닿지 못했다.
간판에는 단정한 글씨로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기억 보관소.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사고 팝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가게의 소문을 한 번쯤은 들어 보았다. 그러나 정작 그 문을 열어 본 사람은 드물었다. 기억을 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어렴풋이만 알았다.
잊고 싶은 하루를 덜어 낼 수 있다고도 했다. 낯선 누군가의 행복했던 오후를 사서 자신의 것처럼 간직할 수 있다고도 했다. 어떤 이는 그 가게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헛소문일 뿐이라고도 했다.
연우는 그 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빗물이 어깨를 적시는 것도 모른 채.
그는 며칠을 망설였다. 이 골목을 찾아 헤맨 밤만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막상 문 앞에 서고 보니,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빗물이 속눈썹에 맺혔다가,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그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문에 닿을 듯 말 듯 멈칫했다. 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웠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또 하루를 견디는 일이었다.
손잡이는 차가웠다. 그가 문을 밀자 머리 위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가게 안
가게 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빗물에 식어 있던 손끝이, 문턱을 넘는 순간 천천히 풀렸다.
벽을 따라 끝없이 늘어선 선반에는 유리병이 가득했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떤 병은 따스한 호박빛이었고, 어떤 병은 차가운 푸른빛, 또 어떤 병은 거의 빛을 잃어 회색에 가까웠다.
공기에서는 오래된 종이와 마른 풀, 그리고 어렴풋한 차 냄새가 났다. 빛들이 흔들릴 때마다 천장에 작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연우는 마치 수많은 별이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계산대 뒤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백발에 둥근 안경을 쓴 그는 책을 읽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노인이 말했다. "비가 많이 오는군요."
"여기가, 기억을 파는 곳인가요." 연우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작아졌다.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지요." 노인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어느 쪽이신가요."
연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는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채 이곳에 왔다.
다만 견딜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고, 그 무게를 덜고 싶다는 마음만이 분명했다.
노인은 그의 침묵을 읽은 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천천히 둘러보셔도 됩니다. 기억은 도망가지 않으니까요. 적어도, 여기 있는 것들은요."
노인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재촉하지 않는 그 태도가, 연우의 어깨를 조금 가볍게 했다.
빛나는 병들
연우는 선반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가까이서 보니 병마다 작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첫눈 오던 날의 산책. 할머니의 부엌. 처음으로 자전거를 탄 여름. 라벨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병들은 손바닥만 한 것부터 두 손으로 안아야 할 만큼 큰 것까지 다양했다. 빛의 색도, 결도, 흔들리는 속도도 저마다 달랐다. 어떤 빛은 촛불처럼 잔잔했고, 어떤 빛은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 안에 정말 누군가의 기억이 들어 있나요." 그가 물었다.
"기억은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다고들 생각하지요." 노인이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기억은 결국 빛과 떨림의 무늬일 뿐입니다. 그것을 옮겨 담는 법을 알면, 병 속에도 담을 수 있지요."
노인은 호박빛으로 빛나는 병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건 어느 어부의 기억입니다. 평생 바다에서 일한 사람이지요. 새벽 바다의 냄새, 그물을 끌어올릴 때 손끝에 전해지던 무게, 수평선이 붉게 물드는 순간. 그 사람은 늙어 더는 바다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이 기억을 누군가 이어 가 주기를 바라며 맡기고 갔습니다."
"팔지 않고요."
"어떤 기억은 파는 것이 아니라 맡기는 것입니다." 노인은 병을 제자리에 두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도 있으니까요."
연우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가 덜어 내고 싶은 기억은, 값을 매길 수 있는 것일까.
첫눈과 돌아온 발걸음
노인은 연우의 시선이 한 병에 오래 머무는 것을 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작고 둥근 병이었다. 라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이의 첫눈.
"그 병이 궁금하신가 보군요." 노인이 말했다.
"빛이, 자꾸 깜박여서요." 연우가 말했다. "마치 웃는 것 같아요."
노인은 그 병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푸른빛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어느 어머니가 맡기고 간 기억입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본 날의 기억이지요. 창밖으로 하얀 것이 내려앉는 걸 보고, 아이가 손을 뻗으며 웃었답니다. 무엇인지도 모르면서요. 그 어머니는 그 순간을,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왜 맡기셨나요. 그렇게 소중한 기억을요."
"맡긴 것이지, 판 것이 아닙니다." 노인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언젠가 그 순간을 잊게 될까 두려워했지요. 그래서 가장 환할 때,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이곳에 맡겨 둔 겁니다. 잊더라도, 어딘가에 그 빛이 남아 있도록요."
연우는 병 속의 빛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작은 빛 하나가 정말로 누군가의 웃음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이런 병도 있습니다." 노인이 다른 선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붉은 기가 도는 따뜻한 빛의 병이 놓여 있었다. "오래 집을 떠나 있던 군인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의 기억입니다."
"전쟁에서요."
"먼 곳이었지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기차에서 내려, 익숙한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지요. 마당의 감나무, 문 앞에서 기다리던 늙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 나오던 식구들의 얼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들던 그 순간을, 그는 평생 잃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맡긴 거군요."
"맞습니다. 그는 다른 기억들은 흐려져도 좋으니, 이 하나만은 끝까지 또렷하게 남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끝까지 지키고 싶은 빛을 하나쯤 품고 살아가지요."
연우는 두 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첫눈의 푸른빛과, 귀향의 붉은빛. 둘 다 더없이 따뜻했다.
문득 그는, 자신이 덜어 내려는 것도 결국은 이런 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덜어 내고 싶은 것
"제가 팔고 싶은 기억이 있어요." 연우가 마침내 말했다.
노인은 계산대로 돌아가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기억인가요."
"한 사람을, 잃었어요." 연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오래 눌러 둔 무언가가 다시 차오르는 것 같았다.
"오래 함께한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떠난 뒤로,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그대로 남아서 저를 찌릅니다. 같이 걷던 길, 함께 먹던 저녁, 웃던 얼굴. 좋았던 기억일수록 더 아파요."
"그 기억들을, 전부 덜어 내고 싶어요."
가게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빗소리만이 창밖에서 낮게 울렸다.
노인은 한참 동안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동정도 비난도 없었다. 다만 깊은 이해 같은 것이 있었다.
"가능합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 기억을 모두 병에 담아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사람을 더는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름도, 얼굴도, 함께한 어떤 날도. 마치 처음부터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요."
"그렇게 해 주세요." 연우는 거의 매달리듯 말했다.
"하지만." 노인이 손을 들었다. "한 가지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기억은 따로 떨어진 점이 아닙니다. 서로 이어진 실이지요.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뽑아내면, 그 실에 함께 엮인 다른 것들도 풀려 나갑니다."
풀려 나가는 실
노인은 회색에 가까운 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안의 빛은 거의 꺼져 있었다.
"이건 어느 손님이 맡기고 간 기억입니다. 그분도 당신처럼,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덜고 싶어 했지요.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전부 제게 팔았습니다."
"그래서 편해졌나요."
"슬픔은 사라졌습니다." 노인은 병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분은 얼마 뒤 다시 찾아왔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요."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신이 왜 어떤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왜 특정한 계절이 되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비는지, 그 이유를 잃어버렸다고요."
연우는 숨을 죽였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뽑아냈을 때, 함께 풀려 나간 것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분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운 순간,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자라난 다정함, 이별을 견디며 단단해진 마음. 그런 것들까지 함께 사라졌지요."
"슬픔만 도려낼 수는 없었던 겁니다.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요."
연우는 회색 병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거의 꺼져 가는 빛이,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의 텅 빈 눈동자처럼 보였다.
사라진 이름
"그 손님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나요." 연우가 물었다.
노인은 회색 병을 가만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한동안 자주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로요. 그저 가슴 한복판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고만 했지요. 무언가 아주 소중한 것이 있었던 자리인데,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고요."
"되찾을 수는 없었나요. 이 병에 담긴 기억을, 다시 돌려드리면."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억은 한 번 병에 담기면, 본래의 자리로 온전히 돌아가지 못합니다. 마치 한 번 풀린 매듭처럼요. 다시 묶을 수는 있지만, 처음과 똑같은 모양은 아니지요. 나는 그분에게 이 병을 여러 번 돌려드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끝내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두려워하셨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빈자리가 다시 슬픔으로 채워질까 봐서요. 차라리 텅 빈 채로 사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그분은 슬픔을 잃은 것이 아니라, 사랑했던 사람을 한 번 더 잃은 것이었다는 걸요."
연우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빗물이 유리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빈자리를, 그는 상상해 보았다.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까닭 모를 공허만을 안고 살아가는 삶을. 그것은 슬픔보다 더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기억과 나라는 것
"그러면." 연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억이 곧 그 사람인가요. 우리 자신이라는 게."
노인은 안경 너머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좋은 질문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이름이나 얼굴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이름은 다른 사람도 부를 수 있고, 얼굴은 세월이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억, 인가요."
"기억은, 우리가 지나온 모든 길의 무늬입니다." 노인은 천천히 말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일, 무언가를 잃었던 일, 부끄러웠던 밤, 자랑스러웠던 아침. 그 무수한 무늬가 겹쳐져 지금의 당신이 되었지요. 무늬 하나를 지운다는 건, 천 전체에서 그 색실을 뽑아내는 일과 같습니다. 천은 남지만, 더는 같은 천이 아니게 되지요."
연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한때 누군가의 손을 잡았던 손이었다. 그 온기를 기억하는 손이었다.
"그러면 아픈 기억도, 결국 저의 일부라는 말씀이군요."
"아픈 기억일수록 더 깊이 짜여 있지요." 노인이 말했다. "기쁨은 가볍게 스치지만, 슬픔은 우리 안에 오래 머무릅니다. 그래서 우리를 더 단단히 엮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견뎌 낸 것들로 만들어진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빗소리가 잠시 거세졌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연우는 그 말을, 가슴속 어딘가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떠오르는 얼굴
연우는 다시 선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빛이 저마다의 속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빛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속에서도 오래 잠겨 있던 한 장면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 사람과 함께한 어느 늦여름의 부엌이었다.
창으로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별것 아닌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채소를 썰었고, 연우는 그 옆에서 서툰 손길로 쌀을 씻었다.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고, 창밖에서는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저녁이었다. 그런데도 연우는, 그 순간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이런 평범한 저녁이 평생 이어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그런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아니." 연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좋아서."
그 사람도 따라 웃었다. 햇살이 그 웃는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지금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연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뜨거움은 견딜 수 없는 아픔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분명, 한때 그토록 충만했던 어떤 행복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표정이 달라지셨군요."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방금,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연우가 말했다. "아주 평범한 저녁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가장 그리운 순간이 되어 버렸네요."
"그렇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장 깊이 그리워하는 것은, 대개 거창한 사건이 아닙니다. 함께 저녁을 짓던 부엌, 나란히 걷던 골목, 무심코 나눈 한마디. 그런 사소한 빛들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 사소함이, 그 사람이 정말로 우리 곁에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연우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이야기
연우는 오래 말이 없었다. 노인은 그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어 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을, 연우는 두 손으로 감쌌다.
"왜 이 일을 하시나요." 연우가 물었다. "기억을 사고파는 일이요."
노인은 안경을 벗어 천천히 닦았다. 그의 눈은 조금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래전에, 나도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때 나는 세상의 모든 기억을 다 지워서라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지요. 그래서 기억을 옮기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나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지우셨나요. 그 사람을."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방법을 완성한 날, 나는 그 사람과 함께했던 기억 하나를 병에 담아 보았습니다. 시험 삼아서요. 우리가 처음 만난 봄날의 기억이었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 병을 손에 들고 보니, 그 안의 빛이 너무 따뜻해서, 차마 그것을 영영 잃을 수가 없더군요. 그 봄날에는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떨어지는 꽃잎을 손으로 받으려다, 자꾸만 놓치고는 웃었지요. 나는 그 웃음소리를, 빛이 되어 병 속에 담긴 그 웃음소리를,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노인은 계산대 안쪽 깊은 곳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다른 어떤 병보다도 환하게, 가장 깊은 호박빛으로 빛나는 병이었다.
"그 뒤로 나는 깨달았습니다. 기억은 무게이기도 하지만, 그 무게가 바로 우리가 살았다는 증거라는 것을요. 아픈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그것을 견뎌 낸 나 자신의 일부도 지우는 일이라는 것을요."
견디는 법
연우는 노인이 손에 든 봄날의 병을 바라보았다. 그 환한 빛 속에서, 한 사람의 웃음과 흩날리는 벚꽃이 함께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고통은, 어떻게 견디셨나요." 연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을 지우지 않기로 하신 뒤에요."
노인은 한참 동안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다.
"견뎠다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에 가깝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처음에는 매일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슬픔이 조금씩 모양을 바꾸어 갔습니다. 칼날 같던 것이, 어느새 무겁지만 품을 수 있는 돌처럼 되었지요."
"슬픔이, 사라진 건 아니고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함께 사는 법을 익히는 겁니다." 노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제 그 슬픔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매일 일깨워 주니까요. 슬픔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연우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창밖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어쩐지 조금 다정하게 들렸다.
"기억하는 일은, 때로 매우 무겁습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무게를 짊어지는 것 또한, 사랑하는 일의 일부입니다. 떠난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일은, 어쩌면 그를 잊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게 안에 잠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빛나는 병들이, 두 사람의 침묵을 가만히 비추고 있었다.
선택
"그래서 나는 이 가게를 열었습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기억을 함부로 팔지 못하게 하려고요. 정말로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는 길을 열어 주되, 그 전에 반드시 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선택은 언제나 손님의 몫입니다."
노인은 연우 앞에 빈 병 하나를 놓았다. 투명하고, 아직 아무 빛도 담기지 않은 병이었다.
"자, 이제 당신이 결정할 차례입니다."
그는 잠시 연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이 병에 담아 가시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가벼워질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 자란 당신의 일부도 함께 떠나갈 겁니다. 아니면, 그 기억을 그대로 안고 가시겠습니까. 아픈 채로, 그러나 온전한 채로요."
연우는 빈 병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사람과 걷던 가을 길이 떠올랐다. 낙엽을 밟던 소리, 손을 잡았을 때의 온기, 별것 아닌 농담에 함께 웃던 저녁.
특히 한 저녁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비슷한 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두 사람은 작은 처마 밑에 나란히 서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손바닥을 내밀어 빗방울을 받으며,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 갔다. 연우는 그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 순간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평범한 저녁이, 훗날 이토록 사무치는 빛이 될 줄은.
그 모든 것이 지금은 칼날처럼 아팠다. 그러나 그 아픔 속에는, 분명 사랑이 있었다.
만약 이 기억을 덜어 낸다면, 그는 더 이상 그 사람을 떠올리며 울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을 사랑했던 자신도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법을 배운 그 시간들, 그 시간이 만든 지금의 자신.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잃는 일이었다.
빗속으로
연우는 천천히 빈 병을 노인 쪽으로 밀었다.
"가져가지 않을게요."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아픈 채로 가지고 있을게요. 그것도, 그 사람이 제게 남긴 거니까요."
노인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슬픔과 안도가 함께 있었다.
"좋은 선택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기억은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우리이게 합니다. 잊는 것이 늘 치유는 아니지요. 때로는 기억하는 것이, 가장 다정한 애도입니다."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잔을 내려놓는 그의 손길이, 들어올 때보다 한결 차분했다.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그는 다시 돌아보았다.
"그 봄날의 기억은, 아직 가지고 계세요."
노인은 가장 환하게 빛나는 그 병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물론입니다. 매일 밤, 가게 문을 닫고 나면, 나는 이 병을 꺼내 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잠시 내 곁에 다시 있는 것 같지요. 그것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머리 위에서 다시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아까보다 빗방울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연우는 우산도 없이 골목을 걸어 나갔다. 어깨가 젖었지만, 그는 더는 무겁지 않았다.
골목을 나서며, 그는 문득 그 사람과 함께 비를 피하던 그 처마 밑을 떠올렸다. 그러자 빗소리가, 더는 외롭게만 들리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구름 사이로, 빗줄기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가느다란 은빛으로 반짝였다. 문득 그 사람이라면, 이런 비를 보고 무어라 말했을까 싶었다. 분명 별것 아닌 말로, 그를 웃게 했을 것이다.
이제 그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남긴 다정함은, 여전히 그의 안에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었다.
가슴속의 기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프고, 따뜻하고, 온전하게. 그리고 연우는 그것을 안고 살아가기로 했다.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오래된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픈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아프게 하는 기억들은 대개 우리가 누군가를, 무언가를 깊이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만약 슬픔만을 깨끗이 도려낼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은 정말 우리를 자유롭게 할까, 아니면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무언가까지 함께 앗아갈까. 이 짧은 이야기가 그 물음을 잠시나마 함께 떠올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억은 우리가 지나온 모든 길의 무늬입니다. 어떤 무늬는 환하고, 어떤 무늬는 어둡지만, 그 모두가 모여 비로소 한 사람을 이룹니다. 어둠을 도려내려다, 우리는 종종 빛까지 함께 잃습니다.
기억은 무게입니다. 그러나 그 무게는, 우리가 분명히 살았고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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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면 도시의 뒷골목은 한층 깊어졌다. 젖은 벽돌은 검게 변했고, 가로등 불빛은 물웅덩이 위에서 흔들렸다. 그 골목의 가장 안쪽, 다른 어떤 간판도 더는 보이지 않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