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페이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나에게 남겨진 것은 낡은 레시피 공책 한 권이었다.
표지는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고, 안쪽 종이는 세월에 누렇게 변해 있었다. 군데군데 기름 얼룩이 배어 있었고, 어떤 페이지는 국물이 튀었는지 글자가 번져 있었다. 할머니의 글씨는 크고 둥글둥글했다. 받아쓰기를 하다 만 아이의 글씨처럼, 어딘가 서툴면서도 정겨웠다.
유나는 그 공책을 부엌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다. 펼쳐 볼 자신이 없었다. 펼치는 순간, 할머니가 정말로 떠났다는 사실이 손에 잡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유나를 키운 사람이었다. 부모가 맞벌이로 바빴던 어린 시절, 유나는 방과 후면 늘 할머니 댁으로 갔다. 할머니의 부엌은 언제나 따뜻했고, 무언가 끓고 있었고, 좋은 냄새가 났다. 유나에게 '집'이라는 단어는 곧 할머니의 부엌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떠난 뒤, 유나의 부엌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유나는 더 이상 요리를 하지 않았다. 끓이고 볶을 기운이 나지 않았다. 매일 배달 음식과 즉석식품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어느 비 오는 일요일, 유나는 까닭 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창밖으로는 빗줄기가 줄곧 내렸고, 방 안은 어둑했다. 냉장고를 열어 보아도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배달 앱을 켰다가 다시 껐다. 무엇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서랍 속 공책이 떠올랐다.
유나는 공책을 꺼냈다. 표지를 한참 쓰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단정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배추된장국. 비 오는 날, 마음이 추울 때."
유나는 웃음이 났다. 마음이 추울 때라니. 할머니다운 표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마음이 어딘가 시린 날이었다.
배추된장국
유나는 레시피대로 재료를 사 왔다. 배추 반 통, 된장 두 큰술, 멸치 한 줌, 대파 한 뿌리. 별것 없는 재료였다.
레시피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불을 줄이고, 천천히. 급하게 끓이면 맛이 도망간다."
유나는 그 말대로 불을 줄였다. 냄비에서 김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된장이 풀어지며 구수한 냄새가 부엌을 채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김이 피어오르는 그 냄새 속에서, 유나는 갑자기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일곱 살쯤이었을까. 비가 오던 날, 유나는 할머니 댁 부엌의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된장국을 끓이고 있었다. 유나가 학교에서 친구와 다투고 시무룩하게 돌아온 날이었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된장국을 끓여 주었다.
"속이 따뜻해지면, 마음도 따라 풀린단다."
그때 할머니가 했던 말이, 김 속에서 또렷이 되살아났다. 유나는 그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냄새가, 잊고 있던 기억을 통째로 되살려 낸 것이다.
유나는 국 한 숟갈을 떠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맛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정확히 그날의 맛이었기 때문이다.
유나는 식탁에 앉아 천천히 국을 먹었다. 한 숟갈씩 입에 넣을 때마다, 속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정말로, 할머니의 말처럼 마음도 조금씩 풀렸다. 반년 동안 차갑게 식어 있던 무언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국 한 그릇에 천천히 녹아내렸다.
그날 밤, 유나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두 번째 페이지
그날 이후, 유나는 매주 공책의 한 페이지씩을 펼쳐 보기 시작했다.
두 번째 페이지에는 "잔치국수. 외로운 사람이 찾아왔을 때"라고 적혀 있었다.
유나는 갸웃했다. 외로운 사람이 찾아오다니. 누가 찾아온다는 걸까. 하지만 그날 저녁, 정말로 손님이 왔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촌 언니였다. 언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정처 없이 지방을 떠돌다가, 문득 유나가 생각났다고 했다.
"왜 갑자기 내 생각이 났어?"
"몰라. 그냥...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이 먹고 싶어서."
유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공책을 펼쳐, 잔치국수를 끓였다.
멸치와 다시마로 우린 맑은 국물에, 가늘게 썬 호박과 당근을 볶아 올리고, 계란 지단을 얇게 부쳐 채 썰었다. 언니는 국수를 한 젓가락 떠먹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맛... 어릴 때 할머니가 끓여 주시던 거랑 똑같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국수를 먹으며 옛날이야기를 했다. 어릴 적 할머니 댁 마당에서 함께 놀던 일, 여름이면 평상에 누워 수박을 먹던 일, 할머니가 두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일. 잊고 있던 기억들이 국수 가닥처럼 하나둘 풀려 나왔다.
"있잖아." 언니가 국물을 떠먹으며 말했다. "나 사실, 요즘 많이 힘들었어. 모든 게 다 무너진 것 같았거든. 그런데 오늘 이 국수를 먹으니까... 뭔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유나는 말없이 언니의 그릇에 국수를 더 덜어 주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이,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깊이 가닿고 있었다.
언니는 떠날 때,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현관에서 언니는 유나를 꼭 안아 주며 말했다. "고마워. 또 올게." 그 말에는 처음 왔을 때의 그늘이 사라져 있었다.
세 번째 페이지
세 번째 페이지에는 "팥죽. 한 해의 가장 긴 밤에"라고 적혀 있었다.
유나는 달력을 보았다. 마침 동지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유나는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지만, 이번에는 두렵기보다 신기하고 따뜻한 기분이었다.
유나는 팥을 삶았다. 붉은 팥을 푹 고아 체에 내리고, 새알심을 동글동글 빚어 넣었다. 부엌에는 달큼하고 구수한 냄새가 가득 찼다. 팥죽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며, 유나는 또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동지마다 할머니는 팥죽을 쑤었다. 그리고 새알심의 개수를 유나의 나이만큼 세어 넣어 주었다. "이걸 다 먹으면 한 살 더 먹는 거란다." 할머니의 그 말에, 어린 유나는 새알심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유나는 새알심을 빚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 개수를 세고 있었다. 손끝에 묻은 찹쌀가루의 감촉이, 할머니의 부엌을 그대로 불러왔다.
마법이 아니라
유나는 처음에 그것이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레시피를 펼치면, 신기하게도 그 음식이 필요한 사람이나 상황이 나타났다. "체한 날"이라고 적힌 페이지를 펼친 날에는 정말로 속이 더부룩했고, "기쁜 일이 있는 날"이라고 적힌 페이지를 펼친 날에는 정말로 작은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비 오는 날"이라 적힌 페이지를 펼치면 어김없이 창밖에 비가 내렸다.
유나는 한동안 이 신기한 우연들을 곱씹었다. 할머니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려 놓은 걸까. 공책에 어떤 힘이 깃들어 있는 걸까. 밤마다 유나는 공책을 머리맡에 두고, 그 둥글둥글한 글씨들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나는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마법이 아니라, 할머니가 평생에 걸쳐 알아낸 무언가가 그 공책에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람의 마음은 계절처럼 돌고 돈다는 것. 비 오는 날에는 누구나 조금 시리고, 외로운 사람은 늘 어딘가에 있으며, 기쁜 일과 슬픈 일은 번갈아 찾아온다는 것. 할머니는 그것을 음식으로 알고 있었다.
레시피는 단지 음식을 만드는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돌보는 법이었다. 어떤 날에는 따뜻한 국물이 필요하고, 어떤 날에는 매콤한 자극이 필요하며, 어떤 날에는 그저 누군가와 마주 앉아 같은 음식을 먹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나는 또 하나를 깨달았다. 신기한 우연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유나 자신이 변한 것인지도 몰랐다. 공책을 펼치고 음식을 만들면서, 유나는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외로운 사촌 언니가 보이고, 혼자 사는 옆집 할아버지가 보이고, 자신의 마음이 시린 날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마법은 공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만들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그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빈 페이지
공책의 절반쯤을 펼쳐 보았을 무렵, 유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공책의 뒤쪽 절반은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페이지였다.
유나는 처음에 할머니가 미처 채우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빈 페이지의 첫 장에는, 할머니의 그 둥글둥글한 글씨로 짧은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네 차례란다."
유나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할머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언젠가 떠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유나가 이 공책을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을. 레시피는 완성된 유산이 아니라, 함께 써 나가야 할 약속이었다.
첫 번째 기록
유나는 펜을 들었다.
무엇을 적을지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며칠 전, 옆집 할아버지가 혼자 지내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얼마 전 아내를 떠나보냈다고 했다. 유나는 가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 쓸쓸한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유나는 빈 페이지에 천천히 적었다.
"호박죽. 혼자 남은 사람에게."
그리고 호박을 사 와 죽을 끓였다. 늙은 호박을 푹 삶아 곱게 으깨고, 찹쌀가루를 풀어 걸쭉하게 끓였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부엌에 가득 찼다. 그 냄새 속에서, 유나는 다시 한번 할머니를 느꼈다. 할머니는 떠난 것이 아니라, 이 냄새 속에, 이 손끝에, 이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다.
유나는 죽을 그릇에 담아, 옆집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유나는 죽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마음이 추우실 것 같아서요. 속이 따뜻해지면, 마음도 따라 풀린대요."
할아버지의 눈가가 천천히 붉어졌다. 그것은 할머니가 유나에게 해 주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유나는 그 말을 자신도 모르게 옮기고 있었다. 기억은 그렇게, 음식과 함께 다음 사람에게로 흘러갔다.
"고마워요, 아가씨." 할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죽 그릇을 받았다. "집사람이 떠난 뒤로, 누가 따뜻한 걸 챙겨 준 게... 처음이라오."
며칠 뒤, 할아버지는 빈 그릇을 깨끗이 씻어 돌려주었다. 그릇 위에는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다음엔 내가 차 한잔 대접하리다." 유나는 그 쪽지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음식 한 그릇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고 있었다.
이어지는 페이지
그 뒤로 유나의 공책에는 한 페이지씩 새로운 기록이 쌓여 갔다.
"미역국. 누군가의 생일에."
"김치찌개. 친구와 밤새 이야기하고 싶은 날."
"수정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을 때."
각각의 페이지에는 음식 이름과 함께, 그날의 마음이 적혔다. 유나는 더 이상 레시피를 그저 따라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맛으로, 자신의 이야기로 공책을 채워 나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유나가 새 페이지를 적을 때마다, 그 음식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미역국을 적은 날에는 친구의 생일 연락이 왔고, 김치찌개를 적은 날에는 오랜 친구가 술 한잔하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유나는 이제 그것이 마법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떠올린 마음이 어떻게든 상대에게 가닿는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유나의 부엌은 다시 따뜻해졌다. 반년 동안 차갑게 식어 있던 그곳에, 이제는 매일 무언가가 끓고, 좋은 냄새가 났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부엌이 그러했듯이.
작은 손님
어느 봄날, 유나에게 작은 손님이 찾아왔다.
옆집 할아버지의 손녀, 여덟 살 난 소은이었다. 소은이는 방학마다 할아버지 댁에 놀러 왔는데, 어느새 유나의 부엌에도 곧잘 들르게 되었다. 유나가 요리하는 모습을 의자에 앉아 구경하는 것이, 소은이는 그렇게 좋다고 했다.
"언니, 그 공책은 뭐예요?"
소은이가 식탁 위의 낡은 공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유나는 미소 지으며 공책을 펼쳐 보였다.
"이건 우리 할머니가 남겨 주신 거야. 음식 만드는 법이 적혀 있는데... 그냥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만드는 법이 적혀 있단다."
유나는 소은이를 옆에 앉히고, 함께 송편을 빚었다. 작은 손과 큰 손이 나란히 반죽을 매만졌다. 소은이의 서툰 손끝에서 삐뚤빼뚤한 송편이 빚어졌지만, 유나는 그것이 더없이 예뻐 보였다. 문득, 자신의 작은 손을 잡아 주던 할머니의 손이 떠올랐다.
기억은 그렇게, 한 부엌에서 다음 부엌으로, 한 손에서 다음 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
여러 해가 흘렀다.
유나의 공책은 이제 절반보다 훨씬 더 채워져 있었다. 할머니의 글씨와 유나의 글씨가 한 권 안에 나란히 담겨 있었다. 둥글둥글한 글씨와 또박또박한 글씨. 두 사람의 손맛이, 두 사람의 시간이, 그렇게 한 권의 공책 속에서 만나고 있었다.
유나는 이따금 생각했다. 언젠가 이 공책의 빈 페이지가 모두 채워지면, 그다음은 또 누군가의 차례가 되리라고. 어쩌면 소은이가, 어쩌면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가. 레시피는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약속이었다.
어느 비 오는 일요일, 유나는 부엌에 서서 배추된장국을 끓였다. 처음 공책을 펼쳤던 그날처럼.
김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 냄새 속에서, 유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들었다.
"불을 줄이고, 천천히. 급하게 끓이면 맛이 도망간다."
유나는 미소 지으며 불을 줄였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네, 할머니. 천천히 할게요."
부엌은 따뜻한 김으로 가득했다. 창밖에는 비가 내렸지만, 유나의 마음은 더 이상 시리지 않았다.
작가의 말
음식에는 신기한 힘이 있습니다.
어떤 냄새는 한순간에 우리를 수십 년 전으로 데려갑니다. 김치찌개 냄새에 어머니의 부엌이 떠오르고, 빵 굽는 냄새에 어느 골목길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과학자들은 후각이 기억과 감정을 다루는 뇌의 영역과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 설명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음식이 단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채우고 마음을 채운다는 것을.
이 이야기에서 할머니의 레시피가 '마법'처럼 작동한 것은, 어쩌면 진짜 마법이어서가 아니라, 음식이 본래 가진 그 따뜻한 힘을 조금 과장해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마음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마법일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그런 레시피가 하나쯤 있기를 바랍니다. 펼치는 순간 누군가가 떠오르고, 만드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한 페이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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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나에게 남겨진 것은 낡은 레시피 공책 한 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