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만약 모든 것이 정말 공정하다면
먼저 작은 사고 실험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완벽하게 공정한 사회가 만들어졌다고 상상해 봅시다. 부모의 재산도, 인맥도, 피부색도, 성별도 더는 인생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 당신의 재능과 노력만이 당신의 자리를 결정합니다. 똑똑하고 열심히 일하면 위로 올라가고, 그렇지 못하면 아래에 남습니다. 누구도 출신 때문에 차별받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사회가 정의롭다고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사회를 꿈꾸라고 배웠습니다. "노력하면 된다", "성공은 네 손에 달려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 같은 말이 그 꿈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편한 질문 하나가 따라옵니다. 만약 그 사회가 정말로 완벽하게 공정해서,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딱 맞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맨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이제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더는 사회를 탓할 수 없습니다. 차별도 불공정도 없었으니까요. 남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내가 부족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그는 2020년 책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에서 묻습니다. 완벽한 능력주의는 과연 우리가 바라던 천국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잔인함일까요.
이 글은 그 질문을 따라가 봅니다. 다만 한쪽 편을 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모두 진지하게 들어볼 것입니다. 판단은 끝까지 읽은 당신의 몫입니다.
1부 — 능력주의라는 단어의 수상한 탄생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태어난 말
흥미로운 사실 하나. 오늘날 우리가 좋은 뜻으로 쓰는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단어는 원래 칭찬이 아니라 풍자였습니다.
이 단어를 만든 사람은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입니다. 그는 1958년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the Meritocracy)』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목만 보면 능력주의를 예찬하는 책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이 책은 가상의 미래를 그린 풍자 소설이자 디스토피아였습니다.
영이 상상한 미래 사회는 이런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더는 가문이나 재산으로 자리를 얻지 않습니다. 오직 "지능 더하기 노력"으로 측정된 능력(merit)에 따라 모든 것이 배분됩니다. 시험과 측정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언뜻 공정해 보입니다.
그런데 영은 이 사회가 결국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능력으로 위에 오른 엘리트들은 점점 오만해집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과했고, 너희는 떨어졌다. 그러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정당하다." 반대로 아래에 남은 사람들은 변명할 거리조차 빼앗깁니다. 옛날에는 "세상이 불공정해서"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조차 불가능합니다. 능력으로 걸러졌다는 낙인만 남습니다.
영의 소설은 결국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반란으로 끝납니다. 그는 능력주의가 새로운 계급 사회를, 어쩌면 더 잔인한 계급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칭찬이 되어 버린 풍자
그런데 역사는 묘하게 흘러갔습니다. 영의 경고는 잊히고, "능력주의"라는 단어만 살아남아 긍정적인 뜻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치인들은 능력주의를 약속했고, 기업은 능력주의를 자랑했으며, 학교는 능력주의를 가르쳤습니다.
마이클 영은 이 상황을 보고 무척 답답해했습니다. 그는 2001년, 즉 죽기 직전에 한 신문에 글을 기고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자기가 경고하려고 만든 단어가 오히려 찬양의 깃발이 되어 버렸다고 말입니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이 "능력주의 사회"를 자랑스럽게 외치는 것을 보며, 자신의 풍자가 완전히 거꾸로 읽혔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이 능력주의라는 개념의 출발점입니다. 좋은 단어인지 나쁜 단어인지, 그 시작부터 이미 논쟁적이었던 셈입니다.
역사 속 한 장면 — 천 년 전의 능력주의, 과거제
그런데 능력주의라는 단어가 1958년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 발상까지 그때 처음 생긴 것은 아닙니다. 시험으로 사람을 가려 자리를 주자는 생각은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그 가장 인상적인 사례가 동아시아의 과거제(科擧制)입니다.
장면을 하나 그려 봅시다. 천 년 전 중국, 어느 추운 새벽입니다. 한 젊은이가 좁은 시험장 칸막이 안에 들어가 문이 닫힙니다. 그는 며칠 동안 그 작은 공간에서 먹고 자며 답안을 씁니다. 옆 칸에서는 누군가 긴장을 못 이겨 쓰러지기도 합니다. 합격자 명단이 나붙는 날, 어떤 가난한 집 아들은 하루아침에 관리가 되어 가문을 일으키고, 어떤 사람은 수십 년을 응시하고도 끝내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늙어 갑니다.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시작되어 천 년 넘게 이어진 과거제는, 출신이 아니라 시험 성적으로 관리를 뽑겠다는 거대한 실험이었습니다. 원리만 보면 놀라울 만큼 근대적입니다. 누구의 아들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아느냐로 사람을 평가하겠다는 것이니까요. 실제로 과거제는 평민 출신에게도 출셋길을 열어 주었고, 학문을 숭상하는 문화를 단단히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과거제의 그늘도 함께 보아야 공정합니다. 시험을 준비하려면 오랜 세월 공부에만 매달릴 여유가 있어야 했고, 그 여유는 결국 어느 정도 사는 집안에서 나왔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가 합격하는 일은 분명 있었지만, 그것은 규칙이라기보다 예외에 가까웠습니다. 또 시험이 모든 것을 결정하자, 사람들은 정해진 경전을 통째로 외우고 정형화된 답안을 쓰는 데 인생을 바쳤습니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실용적 지식이나 창의적 사고는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천 년 전의 능력주의는 이미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들, 곧 기회의 불평등과 시험 만능주의의 폐해를 작은 규모로 미리 보여 주고 있었던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근대 유럽이 관료를 시험으로 뽑는 제도를 도입할 때, 일부 개혁가들은 동아시아의 과거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출신이 아니라 시험으로 인재를 가리자는 발상이 동서양을 가로질러 흘러간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공무원 시험, 입학시험, 자격시험의 먼 조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추운 새벽의 시험장이었던 것입니다.
과거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일깨웁니다. 하나는 능력으로 사람을 뽑겠다는 이상이 인류에게 얼마나 오래되고 매력적인 꿈이었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꿈이 처음부터 빛과 그늘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그늘과 씨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부 — 능력주의의 매력은 진짜다
비판으로 곧장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가야 공정합니다. 능력주의에는 진짜 매력이 있습니다. 괜히 전 세계가 이 이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무엇과 비교하느냐가 중요하다
능력주의를 평가할 때 우리는 흔히 "완벽한 공정"과 비교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능력주의의 진짜 경쟁자는 완벽한 공정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던 제도들이었습니다. 바로 귀족제, 세습제, 정실주의(nepotism), 신분제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옛 제도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는지, 어느 가문인지, 어떤 신분인지가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농부의 자식도 귀족이 될 수 없었고, 아무리 무능한 귀족의 자식도 높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런 세상과 비교하면 능력주의는 거대한 진보입니다. 출신이 아니라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자는 생각은, 수많은 사람에게 처음으로 위로 올라갈 사다리를 놓아 주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도 공부를 잘하면 의사가 될 수 있고, 평범한 집 출신도 실력만 있으면 회사를 키울 수 있다는 약속. 이것은 분명 인류가 싸워서 얻어낸 소중한 가치입니다.
효율과 정의, 두 마리 토끼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근거를 듭니다.
첫째는 효율입니다. 가장 유능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기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롭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솜씨 좋은 외과 의사에게 수술받고 싶어 하지, 그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수술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도, 다리를 설계하는 공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에 따라 자리를 배분하면 사회가 더 잘 굴러갑니다.
둘째는 정의입니다. 노력과 재능에 보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당해 보입니다. 밤새워 공부한 사람이 놀기만 한 사람보다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옳다는 직관, 더 많이 기여한 사람이 더 많이 받는 것이 공평하다는 직관. 능력주의는 이 강력한 도덕적 직관 위에 서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가볍게 무시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조차 이 매력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동기라는 보이지 않는 엔진
옹호자들이 특히 힘주어 말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동기입니다.
작은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어느 회사에서 누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든, 결과가 좋든 나쁘든 모두에게 똑같이 보상한다고 선언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평등해 보여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밤늦게까지 남아 문제를 풀던 사람도, 새로운 방법을 궁리하던 사람도 점점 묻게 됩니다. "굳이 내가 더 애쓸 이유가 있을까." 노력과 결과의 연결이 끊기면, 사람을 움직이던 보이지 않는 엔진이 천천히 멈춥니다.
옹호자들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합니다. 능력에 따른 보상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더 주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더 나은 것을 만들어 내도록 끌어가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더 좋은 약을 개발하고, 더 안전한 다리를 짓고, 더 편리한 도구를 만드는 수많은 노력의 밑바닥에는 "잘하면 보답받는다"는 약속이 깔려 있습니다. 이 약속이 늘 완벽하게 지켜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아예 사라진 사회를 상상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물론 비판자들은 여기에 단서를 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가 오로지 물질적 보상뿐이냐는 것입니다. 호기심, 사명감, 동료를 돕고 싶은 마음처럼 보상과 무관한 동기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옹호자들의 핵심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노력과 결과의 연결을 함부로 끊으면 사회가 치를 대가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 이것은 능력주의를 그저 낡은 신화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묵직한 근거입니다.
3부 — 샌델의 첫 번째 칼날: 운(運)의 문제
샌델의 비판은 정교합니다. 그는 능력주의가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능력주의가 약속을 충분히 지키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설령 완벽하게 지킨다 해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차례로 파고듭니다.
첫 번째 칼날은 운입니다.
"내가 잘나서 성공했다"는 착각
질문 하나. 당신이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당신의 공로입니까? 당신이 성실한 기질을 물려받은 것은 당신이 노력한 결과입니까? 당신이 교육을 중시하는 부모 밑에서, 책이 많은 집에서, 안전한 동네에서 자란 것은 당신이 선택한 것입니까?
조금만 정직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자산 중 상당수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재능은 유전자의 추첨에서 받은 선물이고, 그 재능이 마침 우리 시대에 높게 평가받는 것도 행운입니다.
샌델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듭니다. 만약 농구가 아니라 다른 능력이 사회의 부와 명예를 결정하는 시대였다면, 뛰어난 농구 선수의 재능은 그저 평범한 재주에 그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느냐도 운이지만, 그 재능을 마침 높게 쳐주는 사회에 태어나느냐도 똑같이 운입니다.
이 생각은 사실 샌델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앞서 정치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는 1971년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비슷한 통찰을 폈습니다. 롤스는 타고난 재능의 분포를 "도덕적 관점에서 임의적인 것(arbitrary from a moral point of view)"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똑똑하게 태어나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는 도덕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우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롤스는 재능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마치 공동의 자산처럼 다루어, 가장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노력조차 운에 빚지고 있다
여기서 흔한 반박이 나옵니다. "재능은 운이라 쳐도, 노력은 내 것 아닌가? 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
샌델은 이 반박을 존중하면서도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노력하는 능력, 즉 자기를 단련하고 끈기 있게 버티는 기질조차 상당 부분 양육과 환경과 기질에 빚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공부할 수 있는 의지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을 길러 준 가정과 학교와 문화가 있었습니다. 같은 노력을 해도 어떤 환경에서는 보상을 받고, 어떤 환경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다리 자체가 없습니다.
이것은 노력을 깎아내리려는 말이 아닙니다. 노력은 분명 소중하고,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다만 샌델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의 성공은 온전히 나의 공로인가? 그 안에 내가 받은 행운의 몫은 없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태도는 조금 달라집니다.
4부 — 샌델의 두 번째 칼날: 오만과 굴욕
운의 문제는 사실 서막입니다. 샌델이 진짜로 걱정하는 것은 능력주의가 우리 마음에 심는 두 가지 감정입니다.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
승자의 오만
완벽한 능력주의를 믿는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은 위험합니다. 자기 성공이 온전히 자기 덕이라고 믿는 순간, 두 가지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감사입니다. 나를 도와준 부모, 스승, 사회, 그리고 운에 대한 감사가 사라집니다. 다른 하나는 겸손입니다. "나도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자리에 없을 수 있다"는 겸손이 사라집니다.
감사와 겸손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오만이 들어섭니다. 그리고 오만은 자연스럽게 아래를 향한 경멸로 이어집니다. "성공할 수 있었는데 안 한 사람들",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시선이 그것입니다.
패자의 굴욕
오만의 거울에 비친 것이 굴욕입니다. 완벽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옛날 신분제 사회에서 낮은 신분의 사람은 적어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세상이 불공정해서다." 이 생각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자존감을 지켜 주는 방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능력으로 결정된다고 모두가 믿는 사회에서는 그 방패가 사라집니다. 실패는 곧 "내가 부족하다"는 판결이 됩니다. 사회가 공정할수록, 역설적으로 실패의 책임은 더 무겁게 개인에게 돌아옵니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가장 잔인한 역설입니다. 공정함이 클수록 패자의 상처가 깊어진다는 것.
샌델은 이 굴욕감이 현대 정치의 큰 균열과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학벌과 전문성을 갖춘 엘리트들이 "당신이 뒤처진 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은근히 말하는 사회에서, 그 메시지를 매일 받는 사람들은 깊은 모욕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모욕감은 종종 분노로, 때로는 엘리트 전체에 대한 반발로 터져 나옵니다.
비슷한 목소리들
샌델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헤이스(Christopher Hayes)는 2012년 책 『엘리트들의 황혼(Twilight of the Elites)』에서, 능력주의 엘리트가 일단 위에 오르면 사다리를 걷어차고 자기 자녀에게 유리한 구조를 만든다고 지적했습니다. 능력주의가 스스로 세습 귀족제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법학자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도 2019년 『엘리트 세습(The Meritocracy Trap)』에서 비슷한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능력주의가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그 정점에 있는 엘리트조차 끝없는 경쟁과 소진으로 몰아넣는다고 보았습니다.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이라는 것입니다.
5부 — 학벌이라는 분류 기계
샌델이 특히 집중하는 현장이 있습니다. 바로 교육, 그중에서도 명문 대학을 둘러싼 경쟁입니다.
대학이 신분을 나누는 문이 될 때
현대 사회에서 좋은 대학 졸업장은 단순한 학력 증명을 넘어, 사실상 사회적 지위를 나누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샌델은 이를 "분류(sorting)" 기능이라고 부릅니다. 명문 대학은 가르치는 곳일 뿐 아니라, 누가 위로 가고 누가 아래로 갈지를 가려내는 거대한 분류 기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분류가 겉보기만큼 공정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명문 대학 입시는 능력으로 학생을 뽑는다고 하지만, 그 능력을 키울 기회 자체가 이미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 사교육, 풍부한 경험, 인맥에 접근할 수 있었던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같은 시험장에서 경쟁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종종 부모의 처지를 그대로 닮습니다.
샌델은 미국 명문대 신입생 구성을 두고, 최상위 소득층 가정 출신 학생의 비율이 최하위 소득층 출신보다 훨씬 높다는 자료를 인용합니다. 능력으로 뽑는다는 문이, 실제로는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위로 올려보내는 통로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학위라는 새로운 신분증
이렇게 되면 "학력주의(credentialism)"라는 현상이 생깁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보다, 어떤 졸업장을 가졌느냐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학위가 일종의 신분증처럼 작동합니다.
샌델은 이것이 학위 없는 다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우려합니다. 사회가 점점 더 학력으로 사람을 줄 세울수록,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류 시민 취급을 받는다고 느낍니다. 손으로 일하고, 물건을 만들고, 사람을 돌보는 수많은 노동이 그 가치에 비해 존중받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샌델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일의 존엄(the dignity of work)"입니다. 모든 가치 있는 일이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능력주의가 학위를 성공의 유일한 길로 만들어 버리면, 다른 길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들의 자존감과 사회적 인정이 깎여 나갑니다.
6부 — 그래서 능력주의를 버리자는 말인가
여기까지 읽으면 샌델이 능력주의를 폐기하자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 공정하게 양쪽을 들어 봅시다.
옹호자들의 반론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운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위험하다." 모든 것이 운이라면, 노력도 운이고 책임도 운이라면, 우리는 사람에게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일상은 책임과 자율의 전제 위에서 돌아갑니다. 노력의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면 누구도 애써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게 될지 모릅니다.
둘째, "대안이 더 나쁘다." 능력주의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그 대안인 정실주의나 세습이나 추첨이 더 정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결함을 지적하는 것과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능력주의를 흔들면 그 빈자리를 무엇이 채울 것이냐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셋째, "능력에 따른 보상은 사람들의 동기를 살린다." 노력하면 더 나은 결과를 얻는다는 믿음은 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엔진입니다. 이 연결고리를 끊으면 혁신과 헌신의 동력도 함께 약해질 수 있습니다.
넷째, "기회의 평등을 더 키우면 되지 않나." 진짜 문제는 능력주의 자체가 아니라, 출발선이 불평등하다는 점이라는 반론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능력주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진짜로 공정한 출발선을 보장하도록 교육과 복지를 강화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샌델이 실제로 제안하는 것
샌델의 답은 능력주의를 통째로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줄이고 태도를 바꾸자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가 던지는 제안 몇 가지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공에 대한 태도를 바꾸자는 것이 첫째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기 성공에 운과 타인의 도움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과 감사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일의 존엄을 회복하자는 것이 둘째입니다. 대학 학위가 없어도, 사회에 기여하는 모든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일이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여겨질 때 사람은 존엄을 느낍니다.
공동선(the common good)을 다시 묻자는 것이 셋째입니다. 능력주의는 각자도생의 윤리를 부추기기 쉽습니다. 샌델은 우리가 서로 빚지고 있는 존재라는 감각, 함께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토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샌델은 명문 대학 입시를 두고, 일정한 자격 기준을 넘은 지원자들 사이에서는 추첨으로 뽑자는 도발적인 제안까지 던졌습니다. 입시 경쟁의 광기를 누그러뜨리고, 합격이 순전한 자기 공로가 아니라 행운이 섞인 결과임을 모두가 인정하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이 제안에 동의하든 안 하든,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묵직합니다.
7부 — "응분의 몫"이라는 오래된 철학 논쟁
여기서 잠깐, 능력주의의 밑바닥에 깔린 더 오래된 철학적 질문 하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상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우리가 "저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자격(desert, 응분의 몫)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두고 다투어 왔습니다.
한쪽에는 응분의 몫을 강하게 믿는 입장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행위와 노력에 따라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일한 사람은 보상을, 게으름 피운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받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직관입니다. 이 입장에서 보면, 능력에 따른 보상은 단순한 효율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입니다.
다른 한쪽에는 응분의 몫을 의심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롤스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타고난 재능도, 그 재능을 키워 준 환경도, 심지어 노력하는 성향마저도 상당 부분 우연의 산물이라면, 우리가 그것에 근거해 누군가 "마땅히" 더 많이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롤스가 보기에 정의로운 사회는 사람들의 응분의 몫을 맞춰 주는 사회가 아니라, 우연으로 생긴 불평등을 모두에게, 특히 가장 약한 사람에게 이롭도록 조정하는 사회입니다.
양쪽 다 일리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논쟁에서 어느 쪽도 완전히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응분의 몫을 의심하는 쪽의 강점은 정직함입니다. 우리 성공에 깃든 운을 솔직하게 인정하게 만들고, 운 나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일깨웁니다. 그러나 이 논리를 끝까지 밀면 곤란한 결론에 이릅니다. 만약 노력조차 운이라면, 범죄자의 책임도 운이고, 선한 행동의 공로도 운이 됩니다. 그렇다면 칭찬도 비난도, 상도 벌도 모두 의미를 잃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결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응분의 몫을 믿는 쪽의 강점은 책임과 자율의 감각을 지켜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단순한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로 대우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를 끝까지 밀면, 운의 역할을 외면하고 약자를 너무 쉽게 탓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샌델의 입장은 흥미롭게도 이 둘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는 노력과 책임의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자기 공로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정의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태도의 문제로 논의를 끌어올리는 것이 그의 독특한 지점입니다.
8부 — 자연의 추첨, 더 깊이 들여다보기
운의 문제는 이 글에서 여러 번 등장했지만, 한 번쯤 정면으로 더 깊이 들여다볼 가치가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종종 "자연의 추첨(natural lottery)"이라고 부릅니다.
세 번의 추첨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적어도 세 번의 추첨이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유전자의 추첨입니다. 어떤 지능, 어떤 기질, 어떤 건강, 어떤 외모를 가지고 태어날지 우리는 고르지 못합니다.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아이도, 수학적 직관을 타고난 아이도, 그 재능을 주문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태어난 곳의 추첨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 어느 가정에서 태어날지도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똑같은 잠재력을 가진 두 아이가 한 명은 좋은 학교와 도서관이 가까운 동네에서, 다른 한 명은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곳에서 자란다면, 두 사람의 출발선은 처음부터 다릅니다.
셋째는 시대의 추첨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도 고르지 못합니다. 어떤 재능이 귀하게 대접받는지는 시대마다 다릅니다. 활을 잘 쏘는 능력이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던 시대가 있었고, 코드를 잘 짜는 능력이 그러한 시대도 있습니다. 같은 재능이라도 어느 시대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황금이 되기도 하고 무용지물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 번의 추첨 결과를 합치면, 우리가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이미 많은 것이 정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추첨으로 받은 패를 어떻게 쓰느냐는 분명 우리 몫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손에 쥔 패 자체는, 상당 부분 우리가 고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도 책임은 필요하다 — 옹호자의 응답
여기서 옹호자들은 중요한 반문을 던집니다. 모든 것이 추첨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당신의 노력도 결국 운이니 책임질 필요 없다"고 모두에게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환자를 살리려 밤을 새우는 의사도, 다리를 안전하게 설계하려 거듭 검산하는 공학자도, 그 헌신이 결국 운으로 환원된다면 무엇을 위해 애쓸까요. 사회는 사람들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노력에 보상이 따른다는 약속 위에서 굴러갑니다. 이 약속을 통째로 부정하면, 우리가 의지하는 많은 것이 함께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려 깊은 입장은 어느 한쪽을 통째로 택하지 않습니다. 운의 거대한 역할을 정직하게 인정하되, 그렇다고 노력과 책임의 의미를 폐기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자연의 추첨을 인정하는 일은 약자를 탓하지 않기 위한 겸손의 근거가 되고, 책임을 인정하는 일은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북돋우는 힘이 됩니다. 이 둘은 서로 모순처럼 보이지만, 성숙한 사회는 둘을 동시에 품으려고 애씁니다.
9부 — 능력주의 개념의 흐름 한눈에 보기
지금까지의 흐름을 한 장의 연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958 마이클 영, 『능력주의의 부상』 출간
-> "meritocracy"라는 단어를 풍자/디스토피아로 처음 사용
1971 존 롤스, 『정의론』 출간
-> 타고난 재능은 "도덕적으로 임의적"이라는 통찰
2001 마이클 영, 신문 기고로 한탄
-> 자기 경고가 칭찬으로 뒤집힌 현실을 비판
2012 크리스토퍼 헤이스, 『엘리트들의 황혼』
-> 능력주의 엘리트가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진단
2019 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 능력주의가 승자조차 소진시킨다는 비판
2020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 오만과 굴욕, 일의 존엄, 공동선을 묻다
10부 — 두 진영을 나란히 놓고 보기
비판과 옹호를 한 표로 마주 세워 보면 쟁점이 또렷해집니다.
| 쟁점 | 능력주의 비판 측 | 능력주의 옹호 측 |
| --- | --- | --- |
| 출발점 | 출발선이 이미 불평등하다 | 그래도 신분제보다 훨씬 공정하다 |
| 운의 역할 | 성공의 큰 몫이 운에 빚지고 있다 | 운을 강조하면 책임이 사라진다 |
| 승자의 마음 | 오만과 경멸을 부른다 | 정당한 자부심도 인정해야 한다 |
| 패자의 마음 | 굴욕과 자기 비하를 강요한다 | 동기와 분발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
| 학벌 | 신분을 세습하는 분류 기계다 | 능력을 가려내는 합리적 신호다 |
| 처방 | 겸손, 일의 존엄, 공동선 | 기회의 평등 확대, 출발선 보정 |
이 표에서 어느 칸도 한쪽이 완전히 옳고 다른 쪽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주제를 오래 곱씹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11부 — 작은 사고 실험들
개념을 더 생생하게 느끼기 위해 몇 가지 짧은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장면 하나: 쌍둥이의 갈림길
같은 재능을 가진 쌍둥이가 있다고 합시다. 한 명은 교육을 중시하는 안정된 가정에서 자랐고, 다른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20년 뒤 두 사람의 삶이 크게 갈렸다면, 그 차이는 온전히 두 사람의 노력 차이일까요. 같은 씨앗이라도 어느 땅에 떨어지느냐가 결과를 바꿉니다. 이 장면은 운과 환경의 무게를 떠올리게 합니다.
장면 둘: 청소부와 변호사
도시가 멈췄을 때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위생, 돌봄, 운송, 식량 같은 일들이 멈추면 사회는 곧바로 마비됩니다. 그런데 이런 필수 노동의 상당수는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지 않고, 보수도 사회적 인정도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능력주의가 어떤 일에는 과한 영예를, 어떤 일에는 과한 무시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장면 셋: 만약 추첨이라면
명문 대학이 자격을 갖춘 지원자들 가운데 추첨으로 신입생을 뽑는다고 상상해 봅시다. 합격한 학생은 "나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떨어진 학생은 "나는 부족한 게 아니라 운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만도 굴욕도 한결 누그러집니다. 동시에 이런 의문도 듭니다.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려내야 하는 자리까지 추첨에 맡길 수 있을까요. 이 장면은 능력주의를 누그러뜨리는 일이 동시에 무엇을 잃게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장면 넷: 두 장의 이력서
채용 담당자의 책상 위에 두 장의 이력서가 놓여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첫 번째 이력서의 주인은 이름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두 번째 이력서의 주인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십 년 동안 현장에서 같은 종류의 일을 해 왔고 누구보다 그 일을 잘 압니다. 채용 공고에는 "4년제 대학 졸업 이상"이라는 한 줄이 적혀 있습니다. 그 한 줄 때문에 두 번째 이력서는 사람의 눈에 닿기도 전에 걸러집니다.
이 장면은 학력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정작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를 묻기 전에, 학위라는 신분증부터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학위는 많은 경우 쓸모 있는 신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관문이 될 때, 다른 길로 능력을 쌓아 온 사람들은 출발선에 서 보지도 못한 채 탈락합니다. 능력주의가 진정 능력을 보는 제도인지, 아니면 학위를 능력으로 착각하는 제도인지를 이 장면은 되묻게 합니다.
장면 다섯: 무지의 베일
마지막으로 롤스가 제안한 유명한 사고 실험을 빌려 봅시다. 당신이 어떤 사회를 처음부터 설계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회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날지 전혀 모릅니다. 부자일지 가난뱅이일지, 영리할지 그렇지 않을지, 건강할지 병약할지, 어느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롤스는 이 상태를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베일 뒤에서 당신은 어떤 사회를 설계하겠습니까. 자신이 가장 운 나쁜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당신은 아마 맨 아래에 있는 사람조차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고를 것입니다. 이 사고 실험은 우리에게 묘한 거울을 들이댑니다. 내가 어디에 태어날지 모른다면, 나는 지금 우리 사회를 그대로 선택하겠는가. 이 질문은 운과 공정함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단숨에 또렷하게 만들어 줍니다.
12부 — 함께 풀어 보는 퀴즈
읽은 내용을 점검하는 짧은 퀴즈입니다. 답을 먼저 떠올린 뒤 아래 해설을 확인해 보세요.
문제 1.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과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문제 2.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측이 자주 드는 핵심 근거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문제 3. 샌델이 말하는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은 각각 어떤 마음의 상실에서 비롯될까요.
문제 4. 존 롤스가 타고난 재능을 두고 사용한 표현은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문제 5. 샌델이 명문 대학 입시와 관련해 던진 도발적인 제안은 무엇일까요.
문제 6. 동아시아의 과거제는 능력주의의 이상과 한계를 어떻게 동시에 보여 줄까요.
문제 7. "학력주의(credentialism)"란 무엇이며,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제 8.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란 어떤 사고 실험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게 할까요.
해설입니다.
해설 1.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능력주의의 부상』에서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 의도는 예찬이 아니라 풍자와 경고였습니다. 능력주의가 새로운 계급 사회를 낳을 수 있다는 디스토피아적 경고였습니다.
해설 2. 효율과 정의입니다. 유능한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면 사회가 더 잘 돌아간다는 효율 논리, 그리고 노력과 재능에 보상하는 것이 옳다는 정의 논리입니다. 여기에 더해 귀족제나 정실주의보다 공정하다는 점도 자주 언급됩니다.
해설 3. 오만은 감사와 겸손의 상실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성공을 온전히 자기 덕으로 여길 때 타인과 운에 대한 감사가 사라집니다. 굴욕은 변명할 방패의 상실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것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회에서 실패는 곧 자기 책임의 판결이 됩니다.
해설 4. 롤스는 타고난 재능의 분포를 "도덕적 관점에서 임의적인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 똑똑하게 태어나는지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일이 아니라 자연의 우연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해설 5. 일정한 자격 기준을 넘은 지원자들 사이에서는 추첨으로 합격자를 뽑자는 제안입니다. 입시 경쟁을 누그러뜨리고, 합격이 순전한 자기 공로가 아님을 인정하게 하려는 취지입니다.
해설 6. 과거제는 출신이 아니라 시험 성적으로 관리를 뽑겠다는 천 년 전의 능력주의 실험이었습니다. 평민에게도 출셋길을 열어 준 이상은 분명했지만, 오래 공부할 여유가 있는 집안에 유리했고 시험 만능주의의 폐해를 낳았습니다. 능력주의의 빛과 그늘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해설 7.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어떤 졸업장을 가졌느냐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을 학력주의라고 합니다. 학위가 능력의 유용한 신호일 때도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관문이 되면 다른 길로 능력을 쌓은 사람을 배제하고, 학위 없는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됩니다.
해설 8. 자신이 그 사회에서 어떤 처지로 태어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를 설계하게 하는 사고 실험입니다. 운 나쁜 사람으로 태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함으로써, 가장 약한 사람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고르도록 우리의 직관을 이끕니다. 운과 공정함에 대해 다시 묻게 하는 장치입니다.
13부 — 일상으로 내려온 능력주의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철학자와 정치, 명문 대학과 자연의 추첨. 그러나 능력주의는 사실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스며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들
"걔는 노력을 안 해서 그래." "그러게 공부 좀 하지." "성공한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별생각 없이 합니다. 이 말들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노력은 중요하고, 게으름의 결과는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샌델이 일깨우는 것은, 이런 말들이 어느 순간 칼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의 실패를 오롯이 그 사람 탓으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그가 어떤 출발선에서 시작했는지, 어떤 운을 만나거나 만나지 못했는지를 보지 않게 됩니다.
반대편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이 말 역시 절반은 진실입니다. 분명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전부가 되는 순간,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수많은 손길, 곧 부모와 스승과 친구와 사회와 운은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작은 태도의 전환
샌델의 제안은 거창한 제도 개혁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작은 말과 시선의 전환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성공을 이야기할 때 "운이 좋았다"는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 실패한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를 한 번 더 떠올리는 것. 학위가 없는 사람의 일을 그 가치만큼 존중하는 것. 이런 사소해 보이는 태도들이 모이면,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온도가 달라집니다.
능력주의의 가장 미묘한 함정은 제도 어딘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남과 자신을 평가하는 마음의 습관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논의는 결국 정책의 문제이자, 동시에 아주 개인적인 마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이 글의 결론은 어느 한쪽 손을 들어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비판자의 통찰도, 옹호자의 반론도,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곱씹어 볼 만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정답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그 질문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가며 — 그래서 당신의 답은
다시 처음의 사고 실험으로 돌아가 봅시다. 완벽하게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 거기서 맨 아래에 있는 사람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요.
샌델의 통찰은 이 질문이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공정함을 키우는 일과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는 일이 항상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때로 가장 공정한 시스템이 가장 잔인한 판결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능력주의를 버리는 것이 답일까요. 그 또한 간단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는 귀족제와 정실주의를 무너뜨린 인류의 소중한 무기였고, 효율과 정의라는 진짜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능력주의를 흔들면 그 빈자리를 무엇이 채울 것이냐는 무거운 질문이 따라옵니다.
어쩌면 핵심은 능력주의를 버리느냐 지키느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일지 모릅니다. 성공했을 때 운과 타인의 몫을 기억하는 겸손, 실패한 사람을 이류 시민으로 보지 않는 존중, 그리고 우리가 결국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존재라는 공동선의 감각. 능력주의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어쩌면 시스템을 바꾸기 전에 마음을 바꾸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곱씹어 볼 질문 몇 가지를 남깁니다.
당신의 가장 큰 성취를 떠올려 보세요. 그 안에 당신이 받은 행운의 몫은 얼마나 될까요.
당신이 무심코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긴 누군가는, 사실 어떤 출발선에서 시작했을까요.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수많은 일들을, 우리는 그 가치만큼 존중하고 있을까요.
만약 능력주의를 대신할 제도를 직접 설계해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능력의 기준으로 삼고, 운의 몫을 어떻게 다루겠습니까.
천 년 전 과거제 앞에 줄을 선 사람들과 오늘 입시와 취업을 준비하는 우리는, 정말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까요.
무지의 베일 뒤에서, 당신이 어디에 태어날지 모른다면, 당신은 지금 우리 사회를 그대로 다시 선택하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어려운 질문. 더 공정한 사회와 더 따뜻한 사회는 늘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때때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까요.
이 질문들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함께 묻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덜 오만하고 조금 더 다정한 사회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능력주의를 떠받칠지 허물지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우리 곁의 승자와 패자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어쩌면 그 시선을 고르는 일이야말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가장 작고도 가장 중요한 선택일지 모릅니다.
참고 자료
- Michael Sandel,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2020) — 출판사 소개 페이지: https://us.macmillan.com/books/9780374289980/thetyrannyofmerit
- Michael Young — Encyclopaedia Britannica: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Michael-Young-Baron-Young-of-Dartington
- John Rawls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rawls/
- Desert (응분의 몫)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desert/
- Distributive Justice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s://plato.stanford.edu/entries/justice-distributive/
- Daniel Markovits, "The Meritocracy Trap" — 저자 소개 페이지: https://law.yale.edu/daniel-markovits
- Michael J. Sandel — Harvard 교수 프로필: https://scholar.harvard.edu/san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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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작은 사고 실험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