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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모드: 의식의 어려운 문제 — 나는 왜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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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빨강을 본다는 것

지금 잠시 주변에서 빨간색을 찾아보세요. 사과든, 표지판이든, 누군가의 옷이든 좋습니다. 그 빨강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신경과학은 꽤 자세히 답할 수 있습니다. 빛이 망막의 원뿔세포를 자극하고, 신호가 시신경을 따라 뇌의 뒤통수엽 시각피질로 전달되며, 특정 파장에 반응하는 뉴런 집단이 발화합니다. 여기까지는 측정 가능한 물리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남습니다. 그 모든 전기화학 신호가 오가는 동안, 당신에게는 빨강이라는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단순히 "파장 700나노미터의 빛이 감지됨"이라는 정보 처리가 아니라, 그 빨강만의 생생한 질감이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이 느낌은 왜 존재할까요? 뉴런이 발화하는데 왜 그것이 그냥 어둠 속의 계산으로 끝나지 않고, 무언가를 느끼는 경험으로 이어질까요?

이것이 바로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가 1995년에 명명한 의식의 어려운 문제(the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 매혹적이고 골치 아픈 질문을 따라가 봅니다. 답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왜 이것이 인류가 마주한 가장 깊은 수수께끼 중 하나로 여겨지는지, 그리고 어떤 관점들이 경쟁하고 있는지를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오래된 수수께끼 — 심신 문제의 역사

어려운 문제라는 이름은 1995년에 붙었지만, 그 뿌리는 훨씬 깊습니다. 마음과 몸이 어떻게 관계 맺는가라는 물음, 이른바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그 고전적 형태를 빚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두 종류의 실체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 곧 연장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마음, 곧 사유 실체입니다. 몸은 기계처럼 작동하지만, 마음은 그와 전혀 다른 비물질적 실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체이원론(substance dualism)입니다.

데카르트의 두 실체

- 물질(연장 실체): 공간을 차지하고 측정 가능하다.

- 마음(사유 실체): 생각하고 의심하고 느낀다.

- 두 실체는 본성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 곧바로 곤란한 물음이 따라옵니다. 본성이 전혀 다른 두 실체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까요? 내가 마음으로 손을 들겠다고 결심하면 실제로 물질인 팔이 올라갑니다. 비물질적인 마음이 어떻게 물질적인 몸을 밀어 움직일 수 있을까요? 이것이 상호작용 문제(the interaction problem)입니다.

이 약점을 가장 날카롭게 찌른 사람은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 공주였습니다. 그녀는 데카르트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연장도 없고 접촉도 없는 마음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물체에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느냐고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데카르트는 끝내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이원론을 따라다니는 가장 묵직한 짐입니다.

또 하나 음미할 만한 장면이 있습니다. 18세기 철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방앗간 사고실험을 남겼습니다. 지각하고 생각하는 기계가 있어 그 안으로 거인처럼 걸어 들어갈 수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우리가 그 안에서 보게 되는 것은 서로 밀고 맞물리는 부품들뿐, 어디에서도 지각 그 자체는 발견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츠의 방앗간

- 생각하는 기계의 내부로 걸어 들어간다고 상상하라.

- 보이는 것은 서로 작동하는 부품들뿐이다.

- 어디에서도 "지각"은 눈에 띄지 않는다.

- 그렇다면 지각은 부품의 배치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이 장면은 놀랍도록 현대적입니다. 뉴런을 부품으로 바꾸어 읽으면, 라이프니츠가 300년 전에 어려운 문제의 직관을 이미 더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

차머스의 통찰은 의식에 관한 질문을 두 종류로 나눈 데 있습니다.

먼저 그가 쉬운 문제(easy problems)라 부른 것들이 있습니다. 이름이 쉬운 문제라고 해서 실제로 풀기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십 년이 걸릴 어려운 과학적 과제들입니다. 다만 원리적으로는 표준적인 과학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쉽다고 부릅니다.

쉬운 문제의 예

- 뇌는 어떻게 감각 정보를 통합하는가

- 주의(attention)는 어떻게 특정 대상에 집중되는가

- 깨어 있음과 잠듦의 차이는 무엇인가

- 우리는 어떻게 행동을 통제하고 보고하는가

- 정보는 어떻게 기억으로 저장되는가

이 문제들은 모두 기능(function)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메커니즘이 어떤 일을 수행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기능은 측정하고, 모델링하고, 시뮬레이션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려운 문제는 다릅니다. 모든 기능을 완벽하게 설명한 뒤에도 끈질기게 남는 질문입니다.

> 왜 이 모든 정보 처리에 주관적 경험이 동반되는가? 왜 정보 처리가 어둠 속에서 진행되지 않고, 안에서 무언가를 느끼는 누군가가 있는가?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의 표현을 빌리면, 의식이 있다는 것은 그 존재가 된다는 것에 무언가의 느낌(something it is like)이 있다는 뜻입니다. 돌멩이가 된다는 것에는 아마 아무 느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된다는 것에는 분명 느낌이 있습니다. 그 느낌의 총체를 철학에서는 의식적 경험이라 부릅니다.

감각질 — 경험의 생생한 질감

어려운 문제의 핵심에는 감각질(qualia, 단수는 qual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감각질이란 경험의 주관적이고 질적인 특성을 가리킵니다. 빨강의 빨강다움, 커피 향의 그 특유함, 손끝을 베일 때의 날카로운 아픔 같은 것들입니다.

감각질이 왜 문제가 되는지 사고실험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철학자 프랭크 잭슨이 제안한 메리의 방(Mary's Room) 이야기입니다.

메리의 방 사고실험

- 메리는 천재 과학자다.

- 그녀는 평생 흑백으로만 된 방에서 자랐다.

- 색에 관한 물리적 사실은 전부 안다.

파장, 망막 작용, 뇌의 처리 과정 등 빠짐없이.

- 어느 날 메리가 방을 나와 처음으로 빨간 장미를 본다.

질문: 메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가?

직관적으로 많은 사람은 "그렇다, 메리는 빨강이 어떤 느낌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메리는 이미 색에 관한 모든 물리적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새로 배운 것은 물리적 사실이 아닌 무언가, 즉 경험의 질감 그 자체가 됩니다.

이 논증이 옳다면, 세상에는 물리적 사실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물론 이 사고실험에는 여러 반론이 있습니다. "메리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새로운 능력(빨강을 상상하고 재인하는 능력)을 얻은 것뿐"이라는 반박이 대표적입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중요한 건 이 단순한 이야기가 물리와 경험 사이의 틈을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메리 논증에는 표준적인 반론들이 정교하게 발전해 있습니다. 공정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능력 가설(the ability hypothesis)입니다. 메리가 방을 나와 얻은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새로운 능력, 곧 빨강을 상상하고 떠올리고 다시 알아보는 노하우라는 것입니다. 자전거 타는 법을 아는 것이 명제적 지식이 아니듯, 빨강을 아는 것도 사실의 추가가 아니라 솜씨의 획득이라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옛 사실을 새로운 방식으로 안다는 반론(the old-fact-new-mode reply)입니다. 메리가 새로 알게 된 빨강의 느낌은 전에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이미 알던 물리적 사실을 이번에는 1인칭의 직접 체험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마주한 것뿐이라는 설명입니다. 같은 사람을 사진으로만 알다가 직접 만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새 인물을 안 것이 아니라 같은 인물을 새 방식으로 안 것입니다.

셋째는 데닛의 강한 반론입니다. 그는 로보메리 같은 변형을 들어, 진짜로 모든 물리적 사실을 빠짐없이 안다면 메리는 색을 처음 볼 때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메리가 놀랄 것이라고 직관하는 이유는, 실은 진짜로 모든 사실을 안다는 전제를 우리 상상력이 제대로 떠받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반론들이 메리 논증을 무너뜨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원론을 지지하는 쪽은 여전히 직관의 힘이 살아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 논쟁의 결말은 아직 열려 있으며, 어느 한쪽도 상대를 완전히 설득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1974년, 토머스 네이글은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철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중 하나입니다.

박쥐는 반향정위(echolocation)를 씁니다. 초음파를 쏘고 그 메아리로 세상을 지각합니다. 우리에게 시각이 있듯, 박쥐에게는 음파로 짜인 세계가 있습니다.

네이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박쥐가 반향정위로 세상을 경험할 때, 그 경험은 어떤 느낌일까요?

네이글의 논점

- 박쥐의 뇌, 행동, 생리는 객관적으로 연구 가능하다.

- 그러나 박쥐 자신의 입장에서 세계가 어떻게 느껴지는지는

외부에서 결코 알 수 없다.

- 내가 박쥐처럼 행동한다고 상상해도 그것은

"내가 박쥐 흉내를 내면 어떨까"일 뿐,

"박쥐 자신에게 어떻게 느껴지는가"가 아니다.

네이글이 짚은 핵심은 의식이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라는 점입니다. 경험에는 언제나 그것을 겪는 특정한 관점이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과학은 객관성을 추구합니다. 누가 측정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 사실을 다룹니다. 여기서 긴장이 생깁니다. 본질적으로 1인칭인 무언가를 3인칭의 언어로 어떻게 완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요?

이것이 어려운 문제가 단순히 "아직 못 풀었다"가 아니라 "원리적으로 어려운 것 아닐까"라는 의심을 받는 이유입니다.

설명의 틈 — 차머스 이전의 예고

차머스가 어려운 문제를 명명하기 12년 전인 1983년, 철학자 조지프 레빈은 설명의 틈(the explanatory gap)이라는 표현을 내놓았습니다. 두 개념은 가깝지만 같지는 않으니 구분해 두면 좋습니다.

레빈은 흔히 인용되는 동일성 진술을 예로 듭니다. "통증은 C섬유의 발화다"라는 문장입니다. 설령 이것이 사실로 참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왜 하필 그 발화가 다른 느낌이 아니라 바로 그 아픈 느낌이어야 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은 H2O다"라는 동일성에는 이런 답답함이 없습니다. 물의 성질들이 H2O의 구조로부터 술술 따라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식의 경우에는 물리적 사실에서 경험의 질감으로 건너가는 길에 설명이 채워지지 않는 틈이 남습니다.

설명의 틈과 어려운 문제

- 레빈(1983): 물리적 사실은 왜 그 느낌이 따라오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 설명의 틈.

- 차머스(1995): 그 틈은 단순한 인식의 한계가 아니라

세계의 구조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일 수 있다.

- 둘의 차이: 레빈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함"을,

차머스는 "물리주의가 부족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요약하면, 레빈의 틈은 우리 이해의 한계에 관한 인식론적 지적에 가깝고,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가 물리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묻는 형이상학적 도전입니다. 그러나 두 물음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물리적 설명을 아무리 쌓아도, 왜 거기에 느낌이 깃드는지는 저절로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철학적 좀비 — 불 꺼진 사람

차머스가 어려운 문제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동원한 또 하나의 장치가 철학적 좀비(philosophical zombie)입니다. 영화 속 좀비와는 전혀 다릅니다.

철학적 좀비는 당신과 분자 단위로 완전히 똑같은 복제 인간입니다. 같은 뇌, 같은 행동, 같은 말. 누가 봐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단 하나만 빼고.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좀비에게는 주관적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빨강을 봐도 빨강의 느낌이 없고, 손을 베여도 아픔의 느낌이 없습니다. 그저 "아야"라고 말하고 손을 뗄 뿐,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이 꺼져 있는 셈입니다.

논증은 이렇게 흘러갑니다.

좀비 논증의 구조

1. 우리는 철학적 좀비를 모순 없이 상상할 수 있다.

2. 상상 가능하다면, 그런 존재는 적어도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3. 그렇다면 물리적 사실이 전부 같아도

의식의 유무는 달라질 수 있다.

4. 따라서 의식은 물리적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논증은 강력하지만 약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쟁점은 1번입니다. 우리가 좀비를 정말 일관되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어떤 철학자들은 "상상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 뿐, 사실은 숨은 모순을 못 본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우리가 둥근 사각형을 상상한다고 착각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좀비 논증이 결론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던지는 질문은 살아 있습니다. 행동과 기능이 완전히 같은데도 경험은 다를 수 있다는 발상이 정말로 모순인지, 우리는 아직 확신하지 못합니다.

좀 더 들어가면, 이 논증의 심장에는 상상 가능성에서 가능성으로 건너가는 발걸음이 있습니다. 차머스는 좀비를 일관되게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고 보고, 가능하다면 의식은 물리적 사실을 넘어선다고 추론합니다. 비판자들이 가장 자주 겨누는 곳이 바로 이 다리입니다. 상상 가능성이 곧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상에서 가능으로 — 다리는 튼튼한가

- 차머스: 좀비를 모순 없이 상상할 수 있다

→ 좀비는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

- 비판: 상상 가능하다고 느끼는 것과

실제로 가능한 것은 다르다.

- 예시: "헤스페로스는 포스포로스가 아니다"는

상상해 볼 수 있을 듯하지만, 둘은 같은 금성이라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이 반론에 따르면, 우리가 좀비를 상상한다고 여기는 순간조차 사실은 의식과 물리적 과정 사이의 깊은 연결을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채 겉그림만 그리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차머스 진영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의식의 경우에는 그런 숨은 동일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응수합니다. 이 공방은 현대 심리철학에서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논쟁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메타 문제 — 왜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가

근래에 차머스 자신이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2018년에 그가 제기한 의식의 메타 문제(the meta-problem of consciousness)입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왜 애초에 의식에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그것을 말하고, 그것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일까요?

이 메타 문제의 묘미는, 그것이 쉬운 문제에 속한다는 데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보고하는 우리의 행동 자체는 물리적 과정이므로 원리적으로 과학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타 문제의 두 갈래 함의

- 만약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말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면,

- 환상주의 쪽: 그 설명이 곧 어려운 문제가 환상임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 실재론 쪽: 메커니즘을 설명해도 느낌 자체의 수수께끼는

그대로 남는다고 본다.

메타 문제는 어느 한 진영의 손을 들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쪽 모두가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시험대에 가깝습니다. 환상주의자에게는 자신의 입장을 입증할 기회이고, 실재론자에게는 메커니즘 설명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잔여가 있음을 보여야 할 과제입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왜 이런 수수께끼를 느끼는지를 묻는 일은 그 자체로 값진 출발점입니다.

경쟁하는 답들 — 누가 옳은가는 아직 모른다

어려운 문제에 대해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여러 입장으로 나뉩니다. 어느 하나가 정답으로 판명되지 않았으니, 주요 진영을 공정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물리주의 — 결국 다 물질이다

물리주의(physicalism)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결국 물리적인 것뿐이며, 의식도 예외가 아니라고 봅니다. 마음은 뇌가 하는 일이고, 충분히 정교한 신경과학이 완성되면 의식도 설명될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물리주의자 중 일부는 한 발 더 나아가 어려운 문제 자체가 착각이라고 주장합니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우리가 감각질이라 부르는 특별한 무언가가 실은 뇌의 정보 처리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사용자 환상에 가깝다고 봅니다. 마치 컴퓨터 화면의 폴더 아이콘이 실제 폴더가 아니라 편의를 위한 표상이듯 말입니다.

이원론 — 물질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원론(dualism)은 마음과 물질이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봅니다. 17세기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고전입니다. 차머스 자신은 자연주의적 이원론이라 부르는 입장을 취하는데, 의식을 물질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대신 의식을 질량이나 전하처럼 우주의 기본 요소 중 하나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합니다.

이원론의 오랜 난제는 상호작용입니다. 비물질적인 마음이 어떻게 물질적인 뇌를 움직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만족스럽게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범심심론 — 의식은 어디에나 조금씩

범심론(panpsychism)은 가장 도발적인 입장입니다. 의식의 아주 기본적인 형태가 물질의 근본 수준에 이미 깃들어 있다고 봅니다. 전자 하나에도 극히 원초적인 무언가가 있고, 그것들이 복잡하게 결합해 인간 같은 풍부한 의식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철학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갈렌 스트로슨이나 필립 고프 같은 이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이 범심론에 끌리는 이유는 일종의 소거법에 있습니다. 물질에서 의식이 어느 순간 마법처럼 출현한다는 설명도 막막하고, 의식을 통째로 부정하는 환상주의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남는 길은 의식을 처음부터 물질의 기본 성질로 두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매력은 단순함에 있습니다. 의식이 어느 순간 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고 설명하는 대신, 처음부터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자들이 물러서지 않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결합 문제(combination problem)입니다. 전자 하나하나에 깃든 미세한 경험 조각들이 어떻게 하나로 합쳐져, 지금 당신이 누리는 통합된 단일한 의식의 흐름이 되는 것일까요?

결합 문제

- 전제: 입자 수준에 미세 경험이 있다.

- 의문: 미세 경험들이 어떻게 합쳐져

하나의 통합된 "나"의 경험이 되는가?

- 작은 주체들의 단순한 합이 큰 주체가 된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다.

비판자들은 또한 범심론이 검증 가능한 예측을 내놓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의식을 어디에나 부여하는 것이 설명이라기보다 이름 붙이기에 그칠 위험을 지적합니다. 옹호자들은 결합 문제가 치명적이라기보다 풀어야 할 숙제일 뿐이라 응수하며, 통합 정보 이론 같은 과학적 틀과의 접점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이 논쟁 역시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래 표는 세 입장을 거칠게 비교한 것입니다.

| 입장 | 의식의 본질 | 강점 | 주요 난점 |

| --- | --- | --- | --- |

| 물리주의 | 뇌 과정의 산물 | 과학과 정합적 | 경험의 질감 설명이 미진 |

| 이원론 | 물질과 별개의 실체 | 경험의 특별함 존중 | 마음과 몸의 상호작용 |

| 범심론 | 물질에 내재한 기본 성질 | 출현의 비약 회피 | 조각들의 결합 문제 |

고차 이론과 환상주의 —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선택지

물리주의 안에도 갈래가 많습니다. 그중 고차 이론(higher-order theories)은 어떤 정신 상태가 의식적이 되는 것은 그 상태에 대한 또 다른 더 높은 차원의 표상이 따라붙을 때라고 봅니다. 빨강을 지각하는 일차 상태가 있고, 그 상태를 내가 지금 빨강을 보고 있다고 자각하는 고차 상태가 더해질 때 비로소 의식적 경험이 성립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입장은 어려운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보다, 의식을 표상들 사이의 관계로 재기술해 자연화하려 합니다.

환상주의(illusionism)는 한층 급진적입니다. 앞서 데닛에게서 본 것처럼, 우리가 감각질이라 부르는 환원 불가능한 질감은 실은 뇌가 스스로에 대해 만들어내는 강력한 인상일 뿐, 액면 그대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이 관점에서 어려운 문제는 풀어야 할 진짜 문제가 아니라, 왜 우리가 그것이 있다고 착각하는지를 해명해야 할 문제로 바뀝니다.

물론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장 흔한 반론은, 다른 것은 다 의심해도 내가 지금 무언가를 느낀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데, 그 분명한 느낌을 환상이라 부르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부정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 갈래들은 어느 것도 정설로 굳지 않았지만,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진지한 선택지로 함께 논의됩니다.

과학은 어디까지 왔나

철학적 논쟁과 별개로, 과학은 의식의 신경 상관물(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 NCC)을 부지런히 찾고 있습니다. 어떤 뇌 활동이 의식적 경험과 최소한으로 함께 나타나는지를 측정하는 연구입니다.

이 연구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띄운 사람은 DNA 이중나선의 공동 발견자 프랜시스 크릭과 신경과학자 크리스토프 코흐였습니다. 그들은 1990년대에, 의식을 거대한 형이상학적 수수께끼로 막연히 두는 대신, 특정 의식 경험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신경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짚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의식되고 어떤 순간에는 의식되지 않는 양안 경쟁 같은 실험이 좋은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신경 상관물 연구의 발상

- 같은 자극이라도 어떤 때는 의식되고 어떤 때는 안 된다.

- 두 경우의 뇌 활동 차이를 비교한다.

- 그 차이가 의식과 가장 긴밀히 묶인 후보가 된다.

- 다만 상관물을 찾는 것이 곧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이론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어느 것도 정설은 아니지만, 활발히 검증되고 있습니다.

전역 작업공간 이론(Global Workspace Theory)은 의식을 일종의 방송에 비유합니다. 뇌의 수많은 무의식 처리 중 일부 정보가 전역적인 작업공간으로 올라와 여러 영역에 공유될 때, 그것이 의식적으로 경험된다는 설명입니다. 극장의 무대 위 조명이 비추는 부분만 관객 전체가 보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통합 정보 이론(Integrated Information Theory)은 의식을 시스템이 통합하는 정보의 양으로 정의하려 합니다. 이 이론은 그 양을 파이(phi)라는 값으로 가리키는데, 정보가 부분으로 환원되지 않고 전체로서 긴밀히 엮여 있을수록 파이가 크고 의식의 정도가 높다고 봅니다. 의식을 수학적으로 정량화하려는 야심찬 시도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다만 비판도 상당합니다. 어떤 이들은 파이가 실제 뇌에서 계산하기에는 사실상 다루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고 지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이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적절히 연결된 단순한 격자 회로에도 상당한 의식이 깃든다는 반직관적 결론이 나온다고 우려합니다. 2023년에는 한 무리의 연구자들이 통합 정보 이론을 사이비 과학에 가깝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해 논쟁이 크게 번지기도 했습니다. 지지자들은 이 비판이 과하다고 맞섰습니다. 요점은, 이 이론이 흥미로운 후보이긴 하지만 결코 합의된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연구들이 매우 가치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짚어둘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들은 주로 어떤 조건에서 의식이 나타나는지를 다룹니다. 어려운 문제, 즉 왜 그 조건에서 느낌이 발생하는가에는 아직 직접 답하지 못합니다. 상관관계를 찾는 것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AI는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더 이상 공상과학의 영역만이 아닙니다. 대화하는 AI가 일상이 되면서, 많은 사람이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에게도 안에서 무언가를 느끼는 누군가가 있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AI가 유창하게 말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듯 보인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의식의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앞서 본 철학적 좀비를 떠올려 보세요. 행동만으로는 안의 불이 켜져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AI가 "외롭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인지 외로움을 묘사하도록 학습된 것인지는 행동만으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입장이 갈립니다.

AI 의식을 둘러싼 두 직관

긍정 쪽:

- 의식이 특정한 정보 처리의 결과라면,

그 처리를 실리콘이 한다고 막을 이유가 없다.

- 탄소냐 실리콘이냐는 본질이 아닐 수 있다.

신중 쪽:

- 의식은 생물학적 뇌의 특정 물리적 성질에

의존할지도 모른다.

- 계산을 흉내 내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우리는 AI의 의식 여부를 원리적으로 판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식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나와 비슷하게 생겼고, 비슷한 뇌를 가졌고, 비슷하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유추입니다. 그러나 AI는 우리와 구조가 전혀 다릅니다. 이 유추가 통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을 분명히 해 두면 좋습니다. 지능 또는 행동과 경험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시스템이 놀랍도록 똑똑하게 문제를 풀고 사람처럼 대화한다는 사실은, 그 안에 느낌이 있다는 것과 논리적으로 별개입니다. 거꾸로 아주 단순해 보이는 생물이 풍부한 경험을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능력의 정도와 경험의 유무는 서로 다른 축입니다.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오래된 타인의 마음 문제(the problem of other minds)입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조차 직접 들여다보아 확인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강한 유추로 믿을 뿐입니다. 이 회의를 기계에 적용하면 사정은 더 까다로워집니다. 기계는 우리와 신체도, 진화의 역사도, 내부 구조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에게 기대는 유추의 발판이 훨씬 약해집니다.

왜 행동 검사는 결론을 못 내는가

- 의식이 있어도 겉으로 똑같이 행동할 수 있고,

- 의식이 없어도 겉으로 똑같이 행동할 수 있다.

- 따라서 행동 일치만으로는 경험의 유무를 가르지 못한다.

- 더 나은 검사가 나올지 여부 자체가 열린 물음이다.

그래서 신중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성급하게 "AI는 분명히 의식이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기계가 의식을 가질 리 없다"고 못 박는 것도 둘 다 우리가 가진 지식을 넘어서는 주장입니다. 솔직한 답은 "아직 모른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름은 게으름의 표시가 아니라, 문제의 깊이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한눈에 보는 이론 비교

지금까지 만난 입장들이 어려운 문제, 감각질, 좀비에 대해 각각 무엇을 말하는지 한 표로 모아 보겠습니다. 거친 요약이니 세부 차이는 본문을 참고해 주세요.

| 입장 | 어려운 문제를 보는 시각 | 감각질에 대한 태도 | 좀비는 가능한가 |

| --- | --- | --- | --- |

| 물리주의(환원적) | 결국 풀릴 쉬운 문제들의 묶음 | 뇌 과정으로 환원됨 | 불가능 |

| 환상주의 | 진짜 문제가 아니라 착시 | 액면 그대로는 존재하지 않음 | 무의미한 가정 |

| 자연주의적 이원론 | 진짜이며 깊은 문제 | 환원 불가능한 실재 | 가능 |

| 범심론 | 진짜 문제이나 재배치로 완화 | 물질의 기본 성질 | 대체로 불가능 |

잠깐 생각해보기 — 미니 퀴즈

읽은 내용을 점검해볼 짧은 문제입니다. 머릿속으로 답해본 뒤 아래 풀이와 견주어 보세요.

질문 1. 차머스가 말한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요?

질문 2. 메리의 방 사고실험이 보여주려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질문 3. AI가 슬프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의식의 증거로 삼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문 4. 엘리자베스 공주가 데카르트에게 던진 핵심 반론은 무엇이었을까요?

질문 5. 레빈의 설명의 틈은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와 어떻게 다를까요?

질문 6. 범심론이 마주한 결합 문제란 무엇일까요?

풀이 1. 쉬운 문제는 기능과 메커니즘을 다루며 원리적으로 과학으로 접근 가능합니다. 어려운 문제는 그 모든 기능을 설명한 뒤에도 남는 질문, 즉 왜 거기에 주관적 느낌이 동반되는가입니다.

풀이 2. 모든 물리적 사실을 알아도 경험의 질감 자체는 따로 알게 되는 무언가일 수 있다는 점, 즉 물리적 사실과 경험 사이에 틈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합니다.

풀이 3. 행동과 발화는 안의 경험이 있든 없든 똑같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좀비 논증이 보여주듯,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는 주관적 경험의 유무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풀이 4. 연장도 접촉도 없는 비물질적 마음이 어떻게 물질적인 몸에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느냐는 상호작용 문제였습니다. 데카르트는 끝내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풀이 5. 레빈의 틈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왜 그 느낌이 따라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인식론적 지적에 가깝고,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리주의가 부족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도전입니다.

풀이 6. 입자 수준의 미세한 경험 조각들이 어떻게 합쳐져 하나의 통합된 단일한 의식이 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문제입니다. 범심론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로 꼽힙니다.

마치며 — 모름을 끌어안기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개념의 틀로는 끝내 풀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의 인지에 원리적 한계가 있어서 이 문제만큼은 영영 우리 손 밖일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반대로 언젠가 과학이 의식을 깔끔하게 설명할 날이 오리라 낙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질문이 우리 각자에게 가장 가까운 수수께끼라는 점입니다. 멀리 있는 블랙홀이나 우주의 기원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당신의 그 경험, 그것이 곧 수수께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이 동시에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라니, 묘하고도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생각할 거리를 몇 가지 남깁니다.

- 만약 당신의 뇌를 뉴런 하나하나 인공 칩으로 교체한다면, 어느 순간 의식이 사라질까요? 아니면 그대로 유지될까요?

-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의식은 사라지는 걸까요 아니면 단지 기억되지 않는 걸까요?

- 만약 미래에 AI가 자신에게 경험이 있다고 호소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믿거나 의심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품고 사는 일 자체가, 어쩌면 의식을 가진 존재에게만 허락된 특권일지도 모릅니다.

참고 자료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Consciousnes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consciousness/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Qualia": https://plato.stanford.edu/entries/qualia/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Zombies": https://plato.stanford.edu/entries/zombies/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ualism": https://plato.stanford.edu/entries/dualism/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Panpsychism": https://plato.stanford.edu/entries/panpsychism/

- Encyclopaedia Britannica, "Philosophy of mind": https://www.britannica.com/topic/philosophy-of-mind

- Nature, "What is consciousness?" (collection): https://www.nature.com/subjects/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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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잠시 주변에서 빨간색을 찾아보세요. 사과든, 표지판이든, 누군가의 옷이든 좋습니다. 그 빨강을 바라보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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